esesang91.com 정태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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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RPTBOOK 도서안내
작성일 2013-08-2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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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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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행방을 찾아서
십일조의 행방을 찾아서

이런 글을 뉴스엔조이에서 올리고 참 신기하네요 ㅎㅎ


십일조의 행방을 찾아서

데스크 승인 2013.08.26  17:16:20 김재수 ()  
본 논문은 주석적 방법으로 마 23:23 에 나타난 십일조는 영원한 의무임을 밝힌다.

1. 십일조 연구 동기 :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신약의 십일조에 대해서 '있다'와 '없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논란을 벌이고 있다. 필자는 일전에 타 인터넷 뉴스에 '있다'는 편에서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오늘은 그에 더하여 마 23:23을 중심으로 주석적 방법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십일조를 역사적 고찰, 평균화, 신앙고백 등의 측면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미 많은 글이 있기 때문이다.

2. 한글성경

개역한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른성경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신뢰는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NIV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give a tenth of your spices--mint, dill and cumin. But you have neglected the more important matters of the law--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neglecting the former.

요약 설명하면 개역성경은 현재로 그리고 바른성경과 NIV는 과거로 번역했다. 문맥을 고려하면, 이들의 번역은 과거에 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 것(바른성경과 NIV) 혹은 해야만 하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개역한글)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는 번역이다.

한글 성경은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고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하였으나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NIV처럼 "전자를 버림이 없이 without neglecting the former"라고 하나의 부사구로 번역하였다.

3. 마 23:23 의 카이아스틱 구조

헬라어 마 23:23을 비교하여 요약 분해하면 다음과 같은 키아스틱 대칭 구조를 이룬다.

가) 아포데카투테 ἀποδεκατοῦτε (현재, 습관적, 정기적으로 십일조 드리다)

나) 아페카테ἀφήκατε (부정과거, 완료적, 율법의 중한 것을 버렸다).

다) 헤데이 ἔδει (미완료, 그것은 당연하다. 추후 토론)

나') 포이에사이 ποιῆσαι (부정과거 부정사, 확언적, 율법의 중한 것을 개시하라)

가') 메 아피에나이 μὴἀφιέναι (현재 금지 부정사, 정기적인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

이 구조는 미완료를 중심으로 현재동사와 부정과거 동사를 요소로 하는 카이아스틱 구조이다.

미완료 헤데이 ἔδει 이전에 위치한 두 동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현재 행하고 있는 것을 대조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미완료 헤데이 ἔδει 이후에 나타나는 두 부정사들은 미완료를 본동사로 하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해야 할 것을 묘사하고 있다.

4.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현재 행위들

아포데카투테(ἀποδεκατοῦτε) 는 현재동사로서 이는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다'는 의미를 가진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에 근거하여 심지어 허브까지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아페카테 ἀφήκατε 는 완료적 부정과거 동사로서, 이는 율법의 중한 것을 현재까지 행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5.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해야 할 행위

포이에사이 ποιῆ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이다 (이것도 행하고). 부정과거라고 해서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시상을 고려하면 이 부정과거는 율법의 중한 것을 실천하기 시작할 것을 시사하는 진입적 부정과거 혹은 확언적 부정과거라고 해서 요약하는 의미를 지닌 부정과거로서 단순하게 '십일조를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둘 중에 전자의 의미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율법의 중한 것을 행하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행하기 시작하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완료 동사 헤데이 ἔδει 의 진주어 역할을 한다.

메 아피에나이 μὴ ἀφιέναι는 현재 금지 부정사로서 미완료 동사 헤데이 ἔδει 의 진주어 역할을 한다. 이 금지 부정사는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를 폐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십일조를 계속 드리라는 의미이다.

6. 미완료 헤데이 ἔδει

마 23:23을 카이아스틱 구조로 볼 때 미완료동사 헤데이 ἔδει가 핵심이 된다. 그 이유는 23:23의 하반부에서 주어가 되는 두 개의 부정사를 수행해야 하는 시점을 이 헤데이 ἔδει 동사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동사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6.1 데이 δεῖ

헤데이 ἔδει는 데이 δεῖ의 미완료동사이다. 이 데이 δεῖ는 '당연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비인칭동사로서 부정사를 주어로 가진다. 비인칭동사는 선행사가 없으므로 앞 문장과 문법적으로 전혀 연계성이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문장이다. 영어 성경은 문맥을 고려하여 you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라는 주어를 넣어서 번역하였다. 비 인칭동사는 날씨, 감정, 부정사를 주어로 하여 의무 혹은 필요성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부정사는 인칭을 가지지 않고 시제와 법을 가지지만 시제는 시간을 언급하지 않고 시상을 언급한다. 마 23:23의 전반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말씀이었지만 후반부는 비인칭동사를 사용하여서 행위자를 언급함이 없이 새로운 주제인 '의무'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이다.

6.2 전통적 연구

전통적 헬라어 문법에서는 미완료 동사 헤데이 ἔδει의 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 혹은 현재의 의무를 표현한다.' 마 23:23 후반부에서는 한 개의 미완료 동사 헤데이 ἔδει는 두 개의 부정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부정사는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었다. 이해를 위해서 이 구조를 다음과 같이 두 개의 문장으로 배열할 수 있다. 기억할 것은 실제로 아래 구조에서 동사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ἔδει ποιῆσαι : 율법의 중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번역은 실제로 율법의 중한 것들을 시행하지 않았던 경우에 해당하는 번역으로서 율법의 중한 것들을 행했어야 한다는 의미임)

ἔδει μὴ ἀφιέναι : 십일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 번역은 실제로 십일조를 시행하지 않았던 경우에 해당하는 번역으로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미임)

위 번역은 미완료 ἔδει 동사를 실행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의무를 표현하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전자는 바르게 번역되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중요한 것들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번역은 실제 상황과 모순된다. 실제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십일조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문법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후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어 성경은 카케이나 메 아피에나이 κἀκεῖνα μὴ ἀφιέναι를 "전자를 무시함이 없이 without neglecting the former"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카케이나 κἀκεῖνα (καί + ἐκεῖνa: 그리고 + 저것들) 에서 카이 καί를 강조 부사, '역시'로 번역한 것 같다.

요약하면 대부분의 전통적인 연구는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신학적 근거는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십일조는 당연한 의무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핸드릭슨은 이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핸드릭슨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십일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한국의 많은 학자가 이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십일조 옹호자들은 교회사적으로 즉 신앙고백 차원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6.3 최근의 연구

스봐트는 마 23:23 에 나타나는 미완료 헤데이 ἔδει는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무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봐트는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덱커는 마 23:23 의 미완료 동사 헤데이 ἔδει를 화용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마 23:23 의 헤데이 ἔδει는 비시간적 미완료 혹은 격언적 미완료라는 것이다. 필자는 덱커의 이론을 지지한다.

6.3.1. 시상 (aspect)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헬라어 동사의 시상(aspect)을 조사해야 한다. 시상이란 화자가 행동을 설명하는 관점(point of view)이라고 간략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는 동작의 진행 상태를 진행형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는 이 진행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헬라어 동사가 진행형인지 아닌지는 단지 시상으로 판단할 따름이다. 또 다른 예는 영어의 완료시제이다. 완료시제는 경험, 결과, 완료, 계속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표현한다. 헬라어 동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상이라고 한다.

덱커는 동사의 시상(aspect)은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시상에 의해서 문장을 이해해야 한다. 시상을 결정하는 것은 문의론(semantics)과 화용론(pragmatics) 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시상은 어휘, 지시사(특히 시간을 표현하는 부사), 그리고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6.3.2. 헤데이 ἔδει는 영원한 의무를 표현하는 비시간적 미완료

마 23:23에서 언급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도 성도들이 행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덱커의 논리에 의하면, 율법의 중한 것들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 폐지되어져야 한다면, 이 경우에는 십일조도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중한 것들은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율법의 중한 것들과 함께 언급된 십일조 역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시행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마 23:23 은 '십일조 하는 것과 율법의 중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영원한 의무이다'는 의미를 가진다.

만약에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 성도들이 십일조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예수님은 십일조 성취론을 어떤 식으로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구약에서 언급된 것이며, 예수님이 구약에서 언급된 것을 말씀하실 때에는 항상 신약시대에 적용될 수 있도록 재해석하셨기 때문이다. 마 23장~25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강연 혹은 집회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는 마태가 기록한 것보다는 더 길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메시지를 들은 마태는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재해석하신 말씀의 핵심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의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7. 요약, 결론 그리고 최종 번역

이상의 것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마 23:23의 미완료동사 헤데이 ἔδει는 비시간적 미완료로서 의무를 표현한다. 이 동사는 두 개의 부정사와 함께 사용되어, 율법의 중한 것과 십일조는 영원한 성도의 의무라는 것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마 23:23은 2013년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태는 23:23을 통해 십일조 유지론을 주장했다. 십일조는 지금도 변함없는 성도들의 분명한 의무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십일조를 무시하는 일이 없이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원한 의무이다.

이 글의 제목이 십일조의 행방을 찾아서이다. 그 행방을 찾았다. 여기에 있다: 십일조는 오늘날에도 영원한 의무이다. 
(자료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4938)


 

   
이름아이콘 청지기의삶
2013-10-22 19:54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다. 믿음의 십일조이다. 만약 구약이나 신약에 나오는 십일조의 물질의 양을 따진다면 구약에서는 분의 이 이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장자를 대신한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와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한 구제의 십일조 그리고 3년에 한번 성전을 가기 위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그래서 실제로 십일조는 물질의 분량이 아닌 믿음의 분량으로 해야만한다. 내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 믿음이라면 아까운 물질 낭비 없이 십일조 할 필요가 없고, 믿음이 구원을 확신한 믿음이면 그 믿음의 감사의 분량으로 하면 된다. 그러나 믿는 자라면 그 십일조 즉 믿음의 감사는 의무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물질의 분량을 보시지 않는다. 믿음의 분량을 보신다.
헌금 궤 앞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 보신 예수님께서 과부의 믿음을 보시곤 최고로 많이 넣었다고 하셧다.
어떤분은 과부가 가진 돈이 두렙돈이고 그 돈을 다 넣었기 때문에 많이 넣었다고 하셨다고 해석한다.
틀리지 않지만 그 뒤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과부의 믿음을 보지 않는 해석이다.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 없이는 굶어야 하고 살아야 하는 전 재산을 헌금 궤에 넣을 수가 없다.
십일조도 같은 맥락이다. 믿음이 없는 십일조는 물질 낭비다. 자신의 소득에 십분의 일만큼 낭비다.
그것 한다고 하나님께서 더주시지 않는다. 사고 안 일어난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점점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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