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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의사(구원론)

수태와 새출생 사이(질의응답)

수태와 새출생 사이(질의응답)
자료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1229211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londonhorace%2F1229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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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토론 중에 아래와 같은 사항이 궁금해서 여쭙니다.
1. 중생1-회개까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가요? 이 기간 동안에 무늬만 그리스도인은 아니지요?
2. 중생2-회심-칭의의 순서가 동시적인가요? 아니면 서로 시간적인 갭이 존재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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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질문의 요지는, 피터 마스터스의 회심의 모델에 있어서 제기하는 ‘연속적 중생관’(the elongated view of regeneration)에서, 그 첫단계인 ‘수태’(conception or initial regeneration)과 소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중생’ 혹은 ‘새출생’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중생1’이라고 했지만, 오해가 있을 수 있다. 피터 마스터스는 분명하게 그것을 ‘초기중생’이라고 했지만, ‘수태’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용어의 정리는 토론의 활성화와 생산적인 열매를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어째튼, 그 ‘수태’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니, 그 절대적 주권의 역사 속에서 삼위의 한 분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염두에 둔다면, 그 ‘수태’ 이후에 그 수태를 가능하게 한 성령님의 내주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해결된다.
흔히 천국비유 장으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비유가 여러 개 나온다. 주님께서 직접 설파하셨던 비유이다. 특별히 처음 두개의 비유를 음미하게 되면, 지금 제기되는 질문들에 많은 빛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첫번째 비유는, 씨뿌리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똑같은 씨가 뿌려지더라도 그 뿌려지는 땅의 상태에 따라서 맺혀지는 열매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하시고 나서, 왜 주님께서 다른 비유를 더하셨을까? 이 비유 때문에 생기는 어떤 오해를 예상하셨던 것은 아닐까? 어떤 오해였을까? 아마도 이런 오해였는지 모른다. 첫번째 비유를 들으면서 사람들 마음 속에 ‘천국말씀’이 뿌려졌다고 하니, 그 천국말씀을 뿌린 자가 전도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뿌리신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직접 씨앗을 뿌렸는데, 어떻게 그 씨앗이 비록 돌짝 밭에 뿌려졌다고 하더라도 열매를 맺는데까지 나아갈 수 없더란 말인가?
실은, 두 번째 비유가 다루고 있는 것이 과연 누가 씨앗을 뿌리는가? 그리고 그 뿌리는 자에 의해서 뿌려지는 씨앗이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님을 비유로 설명하고 계신다. 곧 뿌려진 씨앗 중에는 ‘원수’가 뿌린 씨앗도 있다는 것이요,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가라지라고 하더라도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권유하고 있다.
회심에 있어서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개입될 수 있는 연장된(elongated) 시간 사이에 과연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가 하는 문제에 답변이 제공되려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이 두 가지 비유를 종합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곧 천국말씀으로 뿌려진 씨앗들로 보이는 어떤 씨앗들은 실은 현실적으로 원수가 뿌려놓은 씨앗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하였다. ‘천국말씀’의 씨앗은 당연히 ‘천국말씀’의 씨앗이다. 그리고 가라지는 분명히 가라지이다. 문제는, 이것이 서로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에, 혼동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혼동될 수 있는 여지를 참고하셔서, 그것을 하나의 비유로 하신 것이 아니고 두 개의 비유로 나눠서 각각의 측면들을 강조하셨던 것은 아닐까?
첫번째 비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자, 씨앗이 뿌려졌다. 똑같은 질의 씨앗이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 곧 뿌려진 곳의 상태에 따라서, 길가, 돌짝밭, 가시밭, 그리고 좋은 땅으로 구분된다. 똑같은 시간, 예를 들어서 한 달이라는 기간 중에,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은 싹이 나지도 않았을 수도 있는데,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그 돌 밑의 영양분을 순식간에 흡수해서, 햇빛을 받아서 금방 싹이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버리게 된다. 이런 차이의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씨앗의 질 때문일까? 아니다, 바로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문제는, 이 비유만 있다면, 천국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니, 알미니안적 복음에 적합한 개념이다. 사람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서 그 씨앗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이 비유만 예수님께서 하신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곧 이어서 다른 비유를 하심으로 당신의 앞 비유를 보충하시고 또한 은연 중에 해석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반응에 의해서 열매맺는 것이 아니고, 바로 누가 어떤 씨앗을 뿌렸느냐 하는 것도 본질적으로 그 열매를 맺는 문제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비유가 상호보충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상호보충적인 비유를 모두 종합한 것이 바로 피터 마스터스목사의 회심모델이고, 또한 개혁신학적 견해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설명하자. 돌짝밭에 뿌려진 씨앗이 순간적이나마 자라게 되는 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이되,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the general work of the Spirit)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연계에 있어서의 이 성장현상 자체가 성령님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실은, 영적인 세계의 좋은 비유가 되기도 한다. 자라게 하시다가,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아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은 가라지조차도 성령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문제는, 성령의 역사라 하더라도 앞의 비유에서는 이 자란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둘째 비유에서는 이 자란 식물이 ‘가라지’로 판명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데 이르지 못하고, 또한 가라지가 자라는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를 영적인 출생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놀라운 것은 청교도들 중에서 Thomas Boston이라는 이가 스코틀란드 청교도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읽혀진 책들 중의 한 권으로 유명한 ‘인간의 4중 본성’(Human Nature in its Fourfold States)이란 책에서 이 씨뿌리는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이런 씨뿌리는 비유를 히브리서 6장4-6절에 적용시키면서 돌밭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They may be ‘enlightened, taste of the heavenly gift, be partakers of the Holy Spirit, taste the good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Common operations of the divine Spirit, like a land-flood, make a strange turning of things upside down: but when they are over, all runs again in the ordinary channel. All these things may be, where the sanctifying Spirit of Christ never rests upon the soul, but the stony heart still remains; and in that case these affections cannot but wither, because they have no root.”(p.207).
[그들은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의 일반적인 작용이 마치 홍수처럼 만사를 뒤집어 놓게되지만, 그 홍수가 지나가고 나면 모두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 그 영혼에 결코 머물지 않는 곳에도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돌밭같은 마음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에 이런 감정적인 체험들은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뿌리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맨 처음의 제기된 질문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태’에서부터 새출생 사이의 기간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개와 믿음을 거쳐서 새출생하지 않게 되는 자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님이 내주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성령님의 일반적인 역사일 뿐이지, 새생명을 낳게 되는 특별한 역사로서 내주하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회개와 믿음으로 참으로 거듭난 자에게만 성령님께서 내주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내주하심으로 성도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심으로 성도의 특권이요, 구원받은 자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기 때문이다. 수태는 아직 구원의 역사가 시작한 것이지, 어떤 의미로서 새출생한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내주하시는 역사가 아니다.
비록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에 역사하는 것은 열매를 낳게 되는 역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하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조차도 아직 성령님께서 내주하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길가, 돌밭, 가시밭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이뤄지는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와는 다른 면이 있어서,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 생명에 이르게 하는 역사라고 불러 그 차이를 강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성령의 내주하심의 역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두 번째 비유를 고려하면 더욱 분명해 진다. 가라지가 자라는 것이 성령님의 일반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수’의 뿌린 씨앗이 자란 것이다. 아무리 잘 봐주어도 성령님의 특수한 자라게 하심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님의 내주를 고려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알곡이 씨가 뿌려져서 그 열매를 맺게 될 때까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가? 이 경우에도, 앞의 비유를 적용할 때와 같이 정리해야 할 것이다. 곧, 알곡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씨앗이라고 하더라도, 그 수태의 과정에서 새출생의 기간까지는 아직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외적인 활동의 영향을 받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내적인 활동의 영향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한 작용이 아니고, 내주하시지 않으시면서도 감화와 감동을 입히시는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태는 그 영혼이 깨어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해 진다. 하지만, 새출생은, 깨어난 그 영혼이 성령님의 그 감화와 감동을 통해서, 이전의 습성과 옛기질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로 결단하는 것이 동반된다. 이 결단은 죄인의 전인격이 동반되는 것이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문제는, 두 번째 질문을 다루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질문을 답변하면서, 수태(혹은 중생1)에서 회개를 거쳐 ‘새출생’에 이르게 되기까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 내주하심은 ‘새출생’이후부터 라고 하였다. 그것은 영원전의 삼위 안에서 맺으셨던 ‘언약’에 기초해서 창세전에 ‘선택’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언약과 선택이 적용되는 것은, ‘수태’부터가 아니고, 믿음과 회개 이후에 오는 ‘새출생’때부터임을 의미한다.
영원 전에 선택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영원 전에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게 되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이다. 꼭 그것처럼, 하나님에 의하여 ‘천국말씀’이 옥토에 뿌려져서 구원에 이르게 될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수태의 때가 아니고,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새출생’하게 되는 순간, 곧, ‘거듭나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거듭나게 되는 순간을 ‘회심한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바로 ‘칭의’의 순간이요, 일반적인 조직신학의 논의에서 언급되는 그런 ‘성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 곧, ‘새출생’(혹은 중생2)와 ‘회심’, 그리고, ‘칭의’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적이고 또한 ‘순간적’이다. 연속적 중생관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시작되는 순간적인 역사는 두 군데에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수태’때에, 그리고 또 하나는 ‘새출생’때에 있는 역사이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으로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때와 방법을 따라서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점에 대해서 피터 마스터스목사가 잘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거듭남은 중생2라고 할 수 있다. 중생1은 거듭남의 시작이다. 이 시작은 참으로 위대한 시작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작은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중생이 된 것도 아니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회심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힘을 써서 구원을 이뤄야 할 것이다(그렇다고 이 구원을 자신의 뜻이나 능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힘을 쓸 수 있도록 설교자들이나 상담자들이 그런 사람을 또한 힘써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구원하심이 설교자들이나 상담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달렸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설교자들과 상담자들, 혹은 여러가지 전략이나 방법들을 섭리적으로 사용하시기를 즐거워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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