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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신약 서론

신약 서론
국제신학대학교 대학원 유럽 세미나리
최승락 교수
 
 
시기:                         2009 여름학기 2009.8.15-21. 09:00-21:30

장소:                         독일 프랑크푸르트 

정리자:             송다니엘.

자료보관:             cafe.daum.net/Reformanda
 
 
정리자 comment: 이번 신약서론 강의는 독일대학에서 신약서론으로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내용, 즉 신약정경 27권의 저자, 저작년도, 내용구분을 다루는 대신에 신약 일반과 해석학을 다루었다. 

최승락 교수는 전문적 지식을 전달하였지만, 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의 깊이에 감탄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시간 부족으로 적은 내용만을 다루었다. 
 
 
[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정리자가 보충한 것이다. 

본 정리록의 그리이스어를 보려면 그리이스어 폰트를 설치해야 한다. 

강의 내용 중 적지 않은 내용이 최승락 교수의 저서 „성경해석 산책“(SFC 출판사)에 들어 있음.

헬라어는 읽는 방법만 배웠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송다니엘 목사가 헬라어 강의를 개설할 예정임.
 
 
 
 
 
 

* 들어가면서
 
 
신약서론이란 신학을 연구하는데에 있어서 orientation을 주는 것이다. 이것의 다른 이름은 신약개론, 신약총론이다. 이것은 각 신학대학의 지침과 연구방법과도 연관된다.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신약서론이 다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학대학원은 3년 과정으로서 신약학 과목으로서는 3년 동안 복음서부터 시작하여 사도행전, 바울서신을 배우게 되는데 신약서론은 이 과정을 하기 전에 신약 전체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의 해석학적 orientation을 다루는 것이다. 

내용이 방대한 관계로 신약 27권을 각자 권별로 다루지 않고, 큰 테두리로 묶어서 한다. 그리고 나서 3학년 때에 그간 배운 것을 신약신학으로 정리한다. 그다음에 성경신학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여 다루며, 이것을 조직신학과도 연결한다. 
 
 
16세기 칼빈 때에는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총괄적 신학이 가능하였다. 칼빈은 주해를 하고 주석을 하여 그 내용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 강요는 계속 증보되어 5판이 최종판이 되었다. 이러한 방법이 이상적이며 신학교에서도 추구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신학은 그 이후로 급속도로 발전하여서 한 사람이 총괄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할 수 없이 여러 과목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처음부터 구분된 것처럼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안된다. 원래는 구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을 총괄적으로 연구해서 복음사역에 쓰임을 받아야 한다. 
 
 
 

* 서론: 성경연구를 위한 orientation
 
 
조지 휫필드1)는 겔43:4(?) „동방으로 부터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으로 좋은 설교를 하였다. 여기에서 동방으로는 „해가 뜨는 동쪽“을 말하는데 당시 그가 참조한 KJV에는 본문이 „in der fire“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자는 하나님을 영광되게 해야 하는데 고난 속에서 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 설교는 내용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와 일치가 되고 매우 감동을 주는 탁월한 설교이기는 하지만, 본문과는 상관이 없다. 누구나 이러한 우를 범할 수가 있다. 본문은 단지 지리적 의미만 있을 뿐이다. 

본문이 무엇인가?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대한 좋은 참고 서적은 Gorden Fee의 „신약성경 해석 방법론“
 
 
Exegesis2)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주해, 석의라는 말로 번역한다. Exegesis란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다음에 이것을 바탕으로 해석, 강해로 나아감. 즉 현대 청중들에게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즉 본문의 원뜻을 먼저 정확히 밝힌 후에 이것으로 청중들에게 적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해를 할 때는 현대 청자를 생각하지 말고 본문의 의미를 고대의 맥락 속에서만 드러낸다. 본문을 일차적으로 접한 사람들은 우리와는 엄청난 갶이 있다: 사건적,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갶.

[Exegesis라는 말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Eisgesi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ex라는 말은 „…으로부터“라는 전치사(from)이다. 즉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주입을 시켜서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서 가르치는 의미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eis라는 말은 …안으로(in)라는 전치사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본문 안으로 투사한다는 의미이다]

각자 석의 본문(석의 노트)를 만들어라! 이것을 축적해 놓을 것. 이것으로 설교(이차적 노트)를 쓰는 것이다. 
 
 
 

* 석의(주해, Exegesis)의 1단계
 
 
석의의 1단계로는 본문을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원문3)이 아니라, 사본들을 정리한 것4)을 번역한 것이다. 본문을 어떻게 확정하는가, 즉 어떠한 사본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한국어)번역이 다르다.
 
 
각 사본들의 차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해석의 차이의 예
 
 
예1.
 
 
고전16:22 말미: MARANAΘA5)

MARANAΘA를 어떻게 끊어서 읽을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차이가 있다. 

MARAN AΘA: 주가 오신다(서술 고백문)

MARANA ΘA: 주여 오소서(기원문)
 
 
익살: Godisnowhere  God is nowhere! God is now here. 이 양자가 가능하다.
 
 
 

예2.
 
 
히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καὶ γάρ ἐσμεν εὐηγγελισμένοι καθάπερ κἀκεῖνοι· ἀλλ᾽ οὐκ ὠφέλησεν ὁ λόγος τῆς ἀκοῆς ἐκείνους μὴ συγκεκερασμένους τῇ πίστει τοῖς ἀκούσασιν.
 
 
이 말씀은 시95 본문을 인용한 것이다. „출애굽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라는 의미인데 사본들의 차이로 말미암아 번역자가 어느 사본을 택하는가에 따라서 번역이 약간 달라짐6). 사본 중에서도 더 공신력이 있는 사본과 덜 공신력이 있는 사본이 있다. 시95 경우에는 두 사본이 비슷한 무게가 있으므로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 
 
 
한글번역이 사용한 사본의 헬라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희가(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 믿음으로 들은 자와 화합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ἐκείνους μὴ συγκεκερασμένους로 되어 있으나 ἐκείνος μὴ συγκεκερασμένος7)로 되어 있는 사본도 있다. 이 경우에는 목적격이 주격이 되므로 의미가 다르다. 
 
 
 

예3.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말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의 슬로건인지 구분이 없다. 원문에는 구두점이 없으므로 내용만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현대신학자들은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그들의 생각을 인용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바람직한 번역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대신에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한다“로 하고 첨가된 말을 표기하는 것이다.
 
 
 

예4
 
 
약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논박자(어떤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볼 것인가?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의미상 전체 구절이 논박자의 말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따옴포를 붙여서 표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논박자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말이 연결이 잘 안됨. 아마도 논박자는 믿음과 행위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 같다. 
 
 
 

* Codex와 Papirus의 차이
 
 
성경의 사본은 코텍스와 파피루스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가 Codex Sinaiticus이다. 코텍스는 양피지를 사용.

시내판이라고 하는 이 사본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서 이집트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던 것을 Tischendorf가 가져온 것이다. 이것이 다시 러시아로 가 있던 것을 볼셰비키 혁명 당시에 영국이 1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사온 것. 현재 이짚트에서 반환을 위한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형태는 일반 책처럼 되어 있음. 양면을 이용함.
 
 
파피루스는 갈대의 속을 잘라서 가로 세로로 놓고 붙인 것. 양쪽 끝에 손잡이가 있고, 둘둘 감아서 보관한다. Volumen은 „말다“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고대의 표준 재료. 10 미터가 표준. 
 
 
신약에서 가장 긴 책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합한 것(10 미터). [원래는 두책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책이다. 이것을 후대에서 분리하여 각자에 제목을 단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한계, 제약을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음. 따라서 반복적으로 기술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다: 바울의 회심은 3번 기록. 고넬료 사건은 유사한 내용을 길게 반복을 함(10, 11장). 이것은 이방인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내기 위해 반복되어 기술됨. 
 
 
파피루스는 보관 문제로 말미암아 오늘날 많이 남아있지 않다. 유명한 사본으로는 에이레의 체티 사본, 보스머 사본 등이 있으나 분량은 많지 않다. 

파피루스 사본을 나타내는 표시: P46. P는 파피루스, 46은 사본 번호의 약자.
 
 
양피지의 기원:

갈대밭이 많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파피루스를 많이 생산했음. 학문의 도시. 큰 도서관 소재. BC 2세기 경 버가모 왕이 큰 도서관을 만들고자 함.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쟁을 느끼고 파피루스의 공급을 중단함.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양피를 다듬어서 활용함으로써 오히려 큰 발전을 가져옴. 파피루스의 단점으로서는:

1.색인 작업이 어렵다. 고넬료 사건을 찾으려면 두루마리를 전부 돌려야 한다.

2.한 면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 비경제적.

3.보존이 어렵다. 양피지는 훨씬 오랫동안 보존된다. 
 
 
코덱스의 종류

(정리자 추가)
 
 
표기            명칭                                    발생년도와 보관장소           

א            Sinaiticus                        4세기, 영국                        완전한 신약. 1844년 수도원에서 땔감을 위한 

                                                                                    휴지통에서 발견을 했다고 함.

A            Alexandrinus                        5세기, 영국                        약간의 빠진 부분이 있는 전체 성경. 

B            Vaticanus                        4세기, 바티칸                        약간의 빠진 부분이 있는 전체 성경.

C            Ephaemi rescriptus            5세기, 파리                       

D            Bezae Cantabrigiensis            6세기, 켐브리지           

.

.

046                                                8세기, 바티칸                        계시록
 
 
초기에는 대문자로 쓰여짐: Uncial8)이라고 함. 당시 펜의 질이 나빠서 대문자가 쓰기 쉬워서. 

9세기에 소문자(Minuscle)가 등장함.
 
 
 

* 본문비평9)
 
 
어떠한 것이 가장 원문에 가까운지를 결정하는 것. 즉 본문 확정을 하는 것. 

사본 이문들 중에서 비고의적인 경우(실수)와 고의적으로 바꾼 경우로 나눈다.
 
 
비고의적인 경우

·잘 못 읽은 경우.

·잘 읽었지만 잘못 기억한 경우.

·다량 복사를 위하여 앞에서 낭독해 줄 때 잘못 듣게 되는 경우. 연음이 붙는 경우. 

·잘못 판단, 혹은 착시. 고전12:13 „한 성령을 마셨다“에서 성령은 원래 pneuma이지만 자주 나오는 말이므로 pma로 줄여서 쓴다. 이 경우 자음 위에 줄을 그어서 축약을 표시함. 그런데 앞에 마셨다는 말이 있으므로 pma를 poma(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예로는 요5:39 „성령이 나를 증거하는 것“ αἱ μαρτυροῦσαι를 ἁμαρθατσαι로 필사하는 경우. 이 경우는 의미가 „성경이 내게 죄를 짓는다“가 되므로 타인이 쉽게 오류를 발견할 수가 있다. 
 
 
고의적으로 바꾼 경우

- 교리적 문제로 인한 경우: 마24:36 οὐδὲ ὁ υἱός: nor the Son이 빠진 경우.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1589 GNS(Stephanus판)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즉 D(Bezae Cantabrigiensis)에 의거한 번역판 속에는 빠짐. 교리적 결정이 원인: 아버지가 아는 데, 아들이 모를 리가 없다. 

- 계4:8: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원래 3번 반복되는 „거룩하다“라는 표현이 바티칸 사본에는 9번으로 늘어남. 최대는 13회.
 
 
- 요20:31을 기록한 목적: ἵνα πιστεύ[σ]ητε. 여러분들이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σ가 있는 사본과 없는 사본이 있다. 서로 의미가 다소 차이가 있다.

„히나“는 so that, damit과 같이 …하기 위하여를 의미하는 접속사이다. 뒤에는 가정법이 나옴. 

1.ἵνα πιστεύητε: 현재 가정법. 지금 믿고 있는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2.ἵνα πιστεύσητε: 과거 가정법. 믿음이 발생되도록. 비신자들을 위한 선교적 목적. 

1. 의 내용을 선택하는 사람들 중에서 요한복음의 내용에 비밀 코드가 숨어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안과 밖을 엄밀히 구분하여 사회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 
 
 
 

킹 제임스판의 문제: 열등한 대본 사용.

-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KJV: 믿음과 능력

NIV: 은혜와 능력

이것은 킹 제임스 판이 1611까지 가용한 사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좋은 사본들이 많이 발견되었음]. 1516에 에라스무스가 사본을 정리하여 에라스무스판이 나왔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줌. 루터도 그의 독일어 성서 번역에 이 판의 도움을 받음. 그러나 그는 열등한 사본10)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계시록 사본이 없어서 Vulgata(라틴어로 번역한 가톨릭 성경)를 번역한 것도 있다. 수없이 많은 탈자, 오자가 있었다. 이것이 여러번 개정을 거치면서 Textus Receptus(공인판)이 만들어짐. 이것이 킴 제임스 번역판의 대본이 되었다11). Metzger(장동수 교수: 침신대 출판부) 책에 자세히 나와 있음. 
 
 
 

* 번역에 따른 해석의 차이
 
 
같은 대본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문맥에 따라서 같은 말을 다르게 번역하고 다른 말을 같은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한 단어의 의미장(場)은 문화권에서 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번역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 경우에는 헬라어 지식이 있으면 쉽게 분별을 할 수 있다.
 
 
엑수시아(exousia)의 번역문제: 같은 말을 달리 번역
 
 
고전8:9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에서 사용된 자유라는 말은 권리라는 뜻을 가진 엑수시아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 동일한 단어를 9:4-6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함: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고린도 교회의 강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앞세우며(우상숭배 재물에 관련하여) 다른 약한 형제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즉 내 권리보다 앞장서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중심적인 사고, 복음적인 원리가 더 중요하다.

한 단락에서 엑수시아가 자유, 권리로 다르게 번역됨으로서 문맥이 다소 흐리게 되는 예이다. 
 
 
아르케고스의 번역: 다른 말(아르케고스, 퀴리오스)을 같은 말(주)로 번역한 경우.
 
 
히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주(아르케고스)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개역개정판에서는 창시자로 번역함)

Archegos: 선구자, 영도자, 길 안내자. 
 
 
히2:5-18에서 시8:4-6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과 존귀를 설명함. 

시8:4-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이것은 인간 창조에 대해 노래하는 대표적인 시편. 인간이 영광되고 존귀하게 지어졌으나 곧 타락하여 이 시편 말씀이 의미를 잃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잃어버린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을 시켜서 성경 신학적인 통로를 제공함: 우리가 잃어버린 창조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캪틴으로 오셨다. 주인, 주권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아르케고스는 우리가 곤궁에 빠져 있을 때 찾아와서 앞서서 건져주시는 일을 함. 사기가 떨어진 병사를 북돋아 주시는 캪틴, 개척자. 우리를 위해 우리 앞에서 우리의 대적에 대항하여 싸우시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캪틴 노릇을 하시기 위해서는 고난에 처한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야만 했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우리 앞에서 대신 그 고난을 극복하심으로써 우리가 근원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8에 기술된 인간 본연의 영광이 회복됨. 그분이 우리에게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짐.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심: 예수님의 부활, 승천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심: 하나님이 그를 높이심.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시8편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 예수님은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가?
 
 
히12:2 믿음의 주(아르케고스)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τρέχωμεν τὸν προκείμενον ἡμῖν ἀγῶνα) ἀφορῶντες εἰς τὸν τῆς πίστεως ἀρχηγὸν καὶ τελειωτὴν Ἰησοῦν

여기에서 주 동사는 바라보자가 아니라 „달려가자“이다. 즉 „믿음의 아르케고스를 바라보면서 달려가자“이다. 이렇게 믿음은 경주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를 앞에서 끌어 당기시는 이분만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친근한 분이다. 
 
 
헤 디케: 현장감이나 생동감 상실
 
 
행28: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ἡ δίκη: 헤 디케는 복수의 여신이다. 원주민의 말에는 그들의 디케 여신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가 용케 빠져나왔지만 디케는 반드시 죽인다. 그러나 사도 버울은 독사를 불속에 던져버림. 그는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았다. 생명의 주관자는 누구인가? 디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생동감있게 드러남.
 
 
 

* 번역성경에 표시된 작은 글씨
 
 
작은 글씨는 번역할 때 이해를 돕기위해 첨가된 첨가어를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다.
 
 
예1: 행21:7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원문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다. 단지 그들을 공궤(디아코니아)를 맡는다고 했다. 그러나 말씀 전하는 일도 말씀 디아코니아 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도 디아코니아를 적용함: 행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διακονίᾳ τοῦ λόγου)에 힘쓰리라 하니
 
 
예2: 막1:19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사본에는 아들이라는 말이 없다. 
 
 
예3: 딤전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μὴ νεόφυτον, ἵνα μὴ τυφωθεὶς εἰς κρίμα ἐμπέσῃ τοῦ διαβόλου.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는 원문에서 „마귀의 정죄“이다. 소유격은 의미상 주어, 혹은 목적격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해석자가 문맥상 선택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마귀가 정죄하는지, 혹은 마귀를 정죄하는지의 두 가지 중의 하나인데, 번역자는 후자를 선택했다. 예를 들어 „예수의 믿음“은 예수님이 믿는 것인 경우도 있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faith in Jesus)“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것은 신학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다. 
 
 
예4: 요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ego eimi)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ἐὰν 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ὅτι ἐγώ εἰμι: „hoti“ 는 that이라는 접속사이고 „ego eimi“는 „I am“이라는 말이다. 

ego eimi 다음에는 보통 보어가 따라 옴: I am the bread of life. 

보어가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된 용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자기 계시를 하실 때 사용되는 것이다. 즉 출3:14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심. 즉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ego eimi) 줄을 알고“ 여기에서도 같은 표현. 
 
 
예5: 작은 글씨 첨가가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 

고전 7:3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ὥστε καὶ ὁ γαμίζων τὴν ἑαυτοῦ παρθένον καλῶς ποιεῖ καὶ ὁ μὴ γαμίζων κρεῖσσον ποιήσει.

원문직역: 자기 처녀(파르테노스)를 결혼하는 것(혹은 결혼시키는 것). 여기에서 처녀란 정혼관계에 있는 여자라는 의미인데, 문맥상 자기의 정혼녀와 결혼해야 하는지의 의문이 관건이다. 즉 정혼자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결혼을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러나 „개역한글“판에서는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는 의미로 번역함. 이것은 아마도 번역 당시의 한국인의 심성이 번영된 것이라고 할 수있다. „개역개정“에는 올바로 번역됨.
 
 
 

* Floating text 문제: 요 7:53-8:11
 
 
간음한 여인 텍스트. 위치가 불안함. 즉 유력한 사본에는 이 자리에 없고, 후대 사본들에 가서 오늘날의 이 자리에 있음. 요7,8장의 설교는 유대인의 절기 지키는 것과 관련됨. 

이 텍스트로 말미암아 본문의 흐름이 단절됨: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2절에서 „또“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초막절의 두번째 설교임을 나타낸다. 
 
 
1차 설교에서는 물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물과 관련된 당시의 의식때문에.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와 제식 마지막에 제단을 7번 돌고난 후에 제단 위에 물을 쏟아 부음.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때에 하나님께서 물을 주신 것을 상징함]

예수님의 메시지: 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지만, 이것은 쏟아 붓는 순간 없어진다. 진정한 물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물, 즉 성령이다. 
 
 
그 후에 야간에 불을 밝히는 예식이 있다. 이때 2차 설교를 하심. 

초막절은 먼저 추수감사의 의미가 있다. 곡식, 과일을 거두는 시기인 가을에 거행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광야생활을 상기시키는 예식이 불을 밝히는 예식이다. 성전에 높은 횟대를 세워서 불을 밝힘. 이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계시하심. „나는 성전을 밝히는 정도의 빛이 아니고 세상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다“라는 의미.
 
 
2차설교의 장소는 20절이 힌트. 헌금함 앞에서 하셨다고 함. 헌금함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즉 여인들의 뜰앞에 마련되어 있다.
 
 
[이 단락은 요한복음의 원본에는 없었던 것이나 후기에 삽입됨. 다른 사본 그룹에는 요21:24 뒤에 붙은 경우도 있고(요한복음은 25절이 마지막 구절), 누가복음21:38 뒤(수난 바로 이전)에 붙은 사본 그룹이 있다. 짐작컨데 이 이야기의 출처는 소아시아의 요한제자들인 것 같다. 125년 경에 요한의 제자인 파피아스는 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의 스승인 사도 요한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복음서에 추가한 것 같다. 복음서 뒷편에 추가한 것을 나중 다른 사람이 7:52 다음의 자리로 옮긴 것 같음]
 
 
 

* 역동적 성경해석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셔서 유대인의 삶의 사이클 속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그래서 성경 기술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분은 삶 속에서 진리를 가르치셨고 또한 삶으로 진리를 보여 주셨다. 따라서 우리가 유대인의 풍습과, 절기와 관련된 지식을 가진다면 복음서를 좀 더 생동감있게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유월절(3-4월), 8장은 초막절(9-10월), 10장은 수전절(겨울)이 배경이 된다. 
 
 
1) 6장: 유월절 배경.

예수님께서는 무리로 하여금 유월절(광야생활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떡을 먹이심. 6:33-35: „내가 떡이다“

당시 유대인의 기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다음에 만나를 내려주셨다.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오시고, 하늘의 만나 창고가 새롭게 열려져서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만나와 같은 물질을 기대했으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로 떡을 물질이 아니라 인격으로 정의를 하심.

6:50 οὗτός ἐστιν ὁ ἄρτος 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ταβαίνων: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사람을 나타내는 분사) 떡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떡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심. 바로 다음절에서 ego eimi를 사용하시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으로 계시하심.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유월절이라는 절기와 관련이 있다. 
 
 
2) 7,8장: 초막절 배경. 앞에서 다룸.
 
 
3) 10장: 수전절 배경.

BC167년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제국은 그의 4장군에 의해 4분할된다. 그중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의 영토를 헬라화 시켜 재 부흥기를 꿈꾸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눈에 가시 역할을 하게 되어 아크라라고 하는 군대를 상주시킴. 성전을 훼손하고 제우스상을 세움. 돼지피로 제사를 지냄. 마카비형제들이 BC165에 성전을 수복함. 이렇게 해서 수전절(하누카)이 유래함. 그후에 100여년동안 독립을 유지하지만(하스모니안 왕조), BC63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다시 성전이 더렵혀짐.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유대인은 수전절에 특별히 메시아를 찾기 때문에 팽배해진 메시아 대망 의식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마카비 가문이 한 것처럼 로마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계시한 메시아는 10장 앞 부분의 양의 문, 목자이다. 과거에는 거짓 목자, 메시아들이 있었다. 안티오쿠스 시절부터 그들의 수종을 들던 삮군 목자(대제사장)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각 절기마다 증폭되어 나온 기대감에 따라 계시를 하심.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소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빵, 물, 빛…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던져서 골탕을 먹이지 아니하셨다. 청자가 매일 살아가는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 
 
 
 

* 복음서 해석시 주의할 고려할 사항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4 복음서를 가지고 있다. 2세기에 Tatian이 Diatessaron(디아테사론)이란 이름으로 4복음서를 종합하여 단일복음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의 영감과 인도로 4 복음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꿰어 맞추면 안된다. 4 복음서를 주신 성령님의 뜻을 존중하여 해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복음서마다 표현 방식의 차이가 나타나는가? 청중들의 형편을 고려한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된다. 에를 들어

마태: 대상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표현을 유대인에 맞게 함.

누가: 대상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표현을 그들에 맞게 함. 
 
 
예1: 속옷과 겉옷.

마5: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눅6:29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양자에 있어서 의도는 같다. 

마태에서 송사는 법정용어이다. 겉옷은 율법상 보호를 받는 물품이다. 밤에는 이불로 사용되기 때문에 겉옷을 빼앗을 수가 없다. 권리를 넘어서는 약자의 보호를 표시함. 

누가에 있어서 강탈의 의미가 있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는 관심이 없이 보이는 속옷까지 주어라. 누가는 당시의 이방인들을 위해 표현을 바꿈. 복음서에서 수신자를 위하여 표현을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예2: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음

막2:23-28. 핵심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고,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12:1-8: 앞 부분은 마가의 내용과 비슷함. 그러나 5,6절이 더 들어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에수님은 6절에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이라고 선언적 표현을 하심. 성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 영역이다. 치외 법권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서 큰 자유를 누린다. 이러한 논조는 마태적이다. 누가보다 더 세부적이다. 

마태복음 전체로 볼 때 12장적인 패턴적이 계속해서 나타남.
 
 
예3: …보다 더 큰 이

마12:38절에서 서기관들이 표적을 요청함: 증거를 달라.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심.

1) 6: 성전보다 더 큰 이

2) 41: 요나보다 더 큰 이. 요나같이 시원찮은 선지자가 회개 설교를 해도 이방인들도 회개를 했는데, 너희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았다. 

3) 42: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솔로몬보다 터 크신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 
 
 
3회에 걸쳐 예수님은 자신을 „…보다 더 큰 이“라고 계시하심. 

양면적 선포:

1.자신이 누구인가? 유대인이 매우 크다고 한 것들보다 더 큰 이시다.

2.완악한 이 시대 유대인들 고발: 심판 시에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하나님 자손이라는 이스라엘을 책망할 것임.
 
 
성서, 성전, 선지자, 제사장들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폭탄 선언이다. 예수님의 논증은 설교의 모범과 같다(양날 칼):

1.예수님은 누구신가?

2.인간의 죄가 무엇인가? 숨은 죄, 완악함. 
 
 
그런데 이러한 설교는 이스라엘과 같이 권위체제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마가는 그가 대상으로하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성서, 선지자에 대한 권위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예4: 산상수훈의 6가지 반제(Antithesis)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유효하다. 
 
 
 

* qal wahomer(칼 와호멜) 방식

점층법. A fortiori. 하물며 논증법: 작은 일에 해당되는 진리를 기반으로 해서 더 큰 진리를 입증.
 
 
1)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A: 하나님 – 꽃(을 아름답게 입히심)

B: 하나님 – 너희(자녀들을 훨씬 더 신경쓰심)
 
 
2) 마12는 칼 와호멜을 더 높여서 적용.

A: 성전내에서 –                         안식일 율법으로부터 자유함. 

B: 성전보다 더 크신이 –             그 안에서 누리는 더 큰 자유.

A: 요나 –                                     이방인 회개.

B: 요나보다 더 큰 이 –                         유대인 불 회개  심판경고.
 
 
3) 불의한 재판관: 눅18

A: 불의한 재판관 –             과부의 청을 들어줌. 

B: 의로우신 하나님 –             택하신 자기 백성의 청을 당연히 들어 주신다. 

너희도 확신을 하고 기도하라! 마지막에 뒤엎으심. 너희들에게는 그 믿음(ten pistin: 정관사가 붙어서 과부가 가졌던 그 믿음을 칭함)이 없다.
 
 
4) 롬5:8-10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A: 죄인(원수) –             화목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하셨다. 독생자를 죽이심)

B: 의인 –             구원 (하물며 이제 의인이 되었는데 더욱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미래는 확실하다.

구원의 reference point는 과거이다. 이것을 현존적으로 적용한다: 과거 성령의 역사 – 현재의 측면 – 미래의 차원 (미래에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구원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지만, 불안하지 않다. 과거 하나님의 행위를 볼 때 현재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명백하고, 미래에서 구원이 완성될 것이 명백하다 구원의 3시제. 
 
 
[구원의 3시제: ]

엪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딤후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5) 히2:1f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A: 천사들을 통한 말씀 (유대적인 표현방법: 율법의 말씀) – 저촉을 형벌받음

B: 아들을 통해 주신 구원 (큰 구원) – 더욱더 구원으로 이끄신다.

히브리서의 논증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칼 와호멜 방식.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방식으로 읽지 말 것. 

아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이 이루어졌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긍정에서 더 큰 긍정으로 나아감. 
 
 
6) 히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A: 짐승의 피 –                         육체를 거룩하게 함

B: 그리스도의 피 –             양심을 깨끗하게 함
 
 
 

* 비유
 
 
은유: Metapher. A는 B이다. A가 B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공통적 특징이 연결된다. 

예: 눈은 (몸의) 등불이다.

마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면 의미가 없다. 그다음 단계로 발전될 때 묘미가 있다. 
 
 
마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일상적 단계에서 추상적 단계로 넘어감. 핵심은 네 안의 빛이다.

눈이 성할 때 몸이 성하다. 눈이 불편하면 부딪혀서 몸이 괴롭다. 내 안의 눈이 나쁘면, 내 삶 전체가 어두움에 떨어진다. 눈과 몸의 관계를 유추해 볼 때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네가 마음에 복음의 빛을 가져야 삶이 행복하다. 이것이 없으면 너는 어두움에 살고 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기호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a:b = c:d. 이것을 유비, analog이라고 한다. 눈: 마음의 등불 = 눈이 밝으면(복음의 빛이 있으면): 온몸이 성하다(행복한 삶을 산다)
 
 
신약은 많은 은유, 유비를 사용한다. 

유비의 예:

어린아이 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어린아이 – 젖을 몹시 사모함.

영적 유아 – 말씀을 몹시 사모함.
 
 
은유가 발전해서 비유가 되고, 비유가 발전해서 narrative가 된다. 

비유의 형태로는: 

단일구조: 은유에 가까운 간단한 형태

이중구조

삼중구조
 
 
단일구조의 예로는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이다“ 이것은 형식상으로는 은유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시지 않고 등장인물이 등장함. 한 사람이 씨를 뿌림.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이다“가 내용적 표현이지만 예수님께서 이것을 풀어서 쓰심.
 
 
이중구조: 두 사람 등장. 대비가 주축. 눅 18:9ff.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 

성전에서의 기도: 성전은 바리세인의 home ground. 그들은 성전을 위해 헌금함. 

세리: 성전에 들어가면 주눅이 들림. 적진에 들어가서 기도. 그래서 기도내용은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속죄적 의미: 나를 덮어 주소서!)

예수님 평가: 세리가 더 의롭다!
 
 
삼중구조: 삼분지 이가 3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narrative로 발전함.

·한 아들과 두 부류의 아들

·왕과 두 신하

·한 신랑과 두 부류의 들러리.

·포도원 주인과 두 부류의 품꾼

단순히 일러주기 위함 보다는 청자를 비유중의 인물들과 동일시하게 만들고 끝에서는 예상을  뒤엎음. 하나님 나라의 시각, 가치관을 이해하도록 도와줌.

포도원 주인과 두 부류의 품꾼에서 청자를 열심히 일하는 품꾼으로 동일시 하게 만들어 나중에 온 자를 멸시하게 만듦.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의 가치관을 뒤엎음.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

중세의 4중 해석의 예: 물

문자적 해석            : 물

도덕적 해석            : 정결한 생활

영적 해석            : 생명수

교리적 해석:            : 세례
 
 
오리겐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한 예:

한 사람                        : 아담

여리고                        : 세상

예루살렘            : 천국



사마리아인            : 예수님



다시 오신다            : 재림
 
 
Adolf Juelicher는 one point 해석이론으로 비유해석의 전기를 만듦: 비유는 단지 하나의 명제만을 가지고 있다. 비유는 직접 이야기하면 효과가 작으니 많은 삽화를 넣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비유를 명제 전달의 통로로만 이해를 하는 것. 율리혀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언어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물과 사물을 나타내는 언어적 상징이 가장 근접하게 1:1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 언어적 표현이 많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한성이 있다. 

율리혀는 비유가 가르침의 전달 수단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고 함으로서 명제 중심적 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알레고리 해석을 제약한 점에서는 공헌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비유속으로 끌어들이셔서 동화속으로 불러 들이심. 여기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이것을 반전시키셔서 자신을 깨닽게 하신다. 율리혀는 이러한 비유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았다.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에 은유적 통로를 거쳐야 한다. 컴퓨터를 클릭하는 것을 마우스(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컴퓨터의 마우스는 살아있는 쥐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구속이라는 말은 원래 누군가가 시장바닥에서 노예를 사서 그를 해방을 시키는 것이다. 의롭다는 말은 법정용어이다. 지위를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 선고이다. 대제사장이 언약궤 뚜껑 위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데, 이 피를 뿌리는 장소를 70인역에서 힐라스테리온이라고 한다(죄를 덮는 장소). 이 말은 사도 바울이 화목제물(희생제물)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구원을 나타내는 언어들은 한 단어가 구원의  전체 의미를 카바하지는 못한다. 구속, 칭의란 말도 구원의 전부를 말하지 못한다. 칭의는 법정적 용어로서 약간 딱딱한 표현이다. 이것보다 훨씬 더 따뜻한 표현으로는 양자, 입양(로마 시대에 나와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을 나의 자녀로 삼음. 그는 나의 모든 권리를 누림). 롬 8, 갈 4에서 아들의 명분을 얻는다고 한다. 사도 바울도 구원을 여러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언어가 각각 가진 한계, 성격을 잘 따져서 폭넓게 이해를 해야한다. 

종교개혁이후 청교도때에 입양의 의미가 많이 상실됨. 오늘날 칭의와 성화만을 주로 이야기 한다. 
 
 
 

은유적 차용
 
 
- Thriambeuo 
 
 
1)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오

Τῷ δὲ θεῷ χάρις τῷ πάντοτε θριαμβεύοντι ἡμᾶς ἐν τῷ Χριστῷ καὶ τὴν ὀσμὴν τῆς γνώσεως αὐτοῦ φανεροῦντι δι᾽ ἡμῶν ἐν παντὶ τόπῳ·
 
 
Thriambeuo(triumph)는 „개선행진하다“는 의미이고 nikao는 „승리하다“라는 의미로서 서로 다른 개념이다. 트리암뷰오를 단순히 승리하다라고 번역하면 본문의 풍부한 의미가 손실된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두고 있음. 우리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을 따르는 것. 개선 행진은 제식적 행위로서 대단한 행렬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대대적인 승리를 한 장군에게 트리암뷰오를 해준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참여를 하고 있다. 제사장의 제사 향내는 이 개선행렬에서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죽음의 냄새이다. [이 퍼레이드는 로마의 시가를 지나 쥬피터 신전까지 간다]

개선행진의 순서는:

제사장 – 포로가 된 적의 왕 – 포로들 – 로마군사 – 제물 – 개선장군 [이 순서는 실제와 다를 수 있음 ]
 
 
 

2) 골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죄의 빚문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5 ἀπεκδυσάμενος τὰς ἀρχὰς καὶ τὰς ἐξουσίας ἐδειγμάτισεν ἐν παρρησίᾳ, θριαμβεύσας αὐτοὺς ἐν αὐτῷ.
 
 
 우리를 지배하던 사단적 세력을 벗겨버리시고, 그를 권세의 자리에서 내치시고, 수치의 자리로 내 몰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심) 십자가로 개선행진 하셨다(트리암뷰오). 

완전히 뒤바뀌는 운명. 우리가 전에는 (사단의) 포로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뒤 바뀌어 졌고, 그리스도께서 개선행진의 승리자로 바뀌어 놓으심. 

죄의 빚문서: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심. 삼중으로 강조함.

당시 사람들에게는 트리암뷰오가 생생하게 머리에 들어옴. 이러한 은유적 차용을 사용하여 복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Epithanatius (에피타나티우스)

고전4:8-9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8 ἤδη κεκορεσμένοι ἐστέ, ἤδη ἐπλουτήσατε, χωρὶς ἡμῶν ἐβασιλεύσατε· καὶ ὄφελόν γε ἐβασιλεύσατε, ἵνα καὶ ἡμεῖς ὑμῖν συμβασιλεύσωμεν. 

9 δοκῶ γάρ, ὁ θεὸς ἡμᾶς τοὺς ἀποστόλους ἐσχάτους ἀπέδειξεν ὡς ἐπιθανατίους, ὅτι θέατρον ἐγενήθημεν τῷ κόσμῳ καὶ ἀγγέλοις καὶ ἀνθρώποις.
 
 
8절은 종말론적 표현으로서 신자가 종말론적 왕노릇 하는 것이다. 

9절은 자신의 자화상: 에피타나티우스. 죽이기로 작정한 자. 무장하지 않는 죄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기장에서 쓰는 용어이다. 이들은 경기장에 나타날 때 미말에 나옴. 관중들에게 단순히 피를 보이기 위해 사용되는 사람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감당해야 할 고난의 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차원을 넘어선 것. 이미 배부르고 축복받아 왕처럼 사는 자가 되었다. 복음적 수고와 고난은 안중에도 없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짐. 
 
 
[ 트리암뷰오와 에피타나티우스 이 두가지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극적인 양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개선장군으로서 개선행렬을 이끄는 그 행렬에 참가하는 자랑스러운 승리자인 동시에, 또한 죽음으로 끌려가는 수치스러운 죄인과 같은 실존이다.]
 
 
 

프뉴마티코스와 사르키노스(영적인 자와 육적인 자)/ 프뉴마티코스와 프쉬키코스 대비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 Κἀγώ, ἀδελφοί, οὐκ ἠδυνήθην λαλῆσαι ὑμῖν ὡς πνευματικοῖς ἀλλ᾽ ὡς σαρκίνοις, ὡς νηπίοις ἐν Χριστῷ.
 
 
신령한 자는 성령에 관계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은사를 많이 받았으므로 신령한 자라고 착각한다. 진정한 영적인 자란 무엇인가? (은사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 삶 속에서) 성령을 따르는 자. 그들에게는 분쟁과 시기가 있으므로 영적인 자들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들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분쟁과 시기는 집단의 문제로서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며, 실상은 자기의 문제이다.
 
 
2장에서의 양자 대비:

3장에서는 프뉴마티코스와 사르키노스를 양자대비 했으나 그 전장에서는 프뉴마티코스와 프쉬키코스를 대비시켰다. 

프쉬키코스란 순수한 자연인이다. 즉 성령을 알지 못하고 비웃는 사람들.인간의 기본적 특성만 가진 사람들. 
 
 
사르키노스는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은 아닌데 자라지 못한 사람, 은사를 받았으나 드러내 놓고 자랑하여 은사가 자기 만족적이 된다. 전체적인 복음의 구원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 이미 배부르고 왕노릇 하는 사람. 
 
 
고린도 전서는 변혁이라는 주제로 모아진다. 내면이 바뀌는 변혁이다.

왜 Sarkinos가 많았는가? 그레코-로만 문화의 세계관은 영육 이원론이다. 영과 육의 세계는 상관이 없다. 육은 영의 감옥이다. 따라서 극단적 금욕과 육신을 방임하는 두가지 현상이 모두 나타남. 7장에 결혼을 하여도 성적 관계를 갖지 않는 경우. 

사도 바울의 가르침: 구속안에서 우리의 몸은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권리라 하더라도 복음을 위해 자신의 마땅한 권리까지도 희생한다. 지식도 덕을 세우기 위해 내려 놓는다. 거듭난 자는 언어만 바꿀 것이 아니라 언어배경에 놓여있는 세계관까지 바뀌어야 한다. 
 
 
 

* 신구약 상관관계
 
 
예수님께서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사용하셨다. 신약 증거의 핵심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의 빛이 없으면 바르게 해석될 수가 없다. 산상수훈(마5:17)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산상수훈의 6개 반제(Antithesis)
 
 
이것은 „…라고 말하지만 나는 말한다“라는 공통 패턴을 가지고 있다. 

1.살인

2.간음

3.이혼

4.맹세

5.동형보복(눈은 눈으로…)

6.용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근원적 의미에서 드러내시고 심화시키는 방법을 취하심.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관련시키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가 열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시는 자로 등장하심.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 주심. 산상수훈 전체를 읽을 때도 초점은 „나(예수님)“이다. 
 
 
 

구약 본문에서 이탈된 경우
 
 
마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미가 7:6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미가는 1,2절에서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며 재앙을 선포함. 5절에서는 이웃을 믿지 말라. 친구까지도 믿지 말라고 함. 신뢰가 파괴됨. 6절에서는 가정도 파괴됨. 이렇게 근원적 당위가 파괴됨으로 시회가 붕괴되는 징후를 나타낸다. 소망없는 상황.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면서 발생되는 사회붕괴 현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과 관련하여 인용하시어 자신이 오신 목적과 관련하여, 사람과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바뀌게 됨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해서 생각을 해야하며, 기존의 관계가 깨어져야 된다는 의미확대가 이루어짐. 
 
 
 

pecher방법 (This is that)

„이 말씀은 바로 이것과 연결된다.“라는 표현 방법.
 
 
1) 눅24:27 엠마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실물로 입증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그것들이 자신에 관한 것(죽음과 부활)임을 가르치심. 구체적인 구절 사용 언급이 없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사용하신 방법이 잘 드러남: 예를 들어 „사53은 나에 관한 말씀이다!“
 
 
2) 행2:15 오순절 성령강림 현상. 

베드로가 현상의 바른 의미를 알려줌. 15절에서 그들은 취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바로 요엘 선지자의 말이다. 

몇 가지 변화는 있다. 요엘은 „이 일 후에“ 즉 오픈된 상태를 말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상황 속에서 „말세에12)“로 시간을 규정했다. 또한 19절에서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인용을 하면서 „하늘에서는… 땅에서는…“의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세분화시켰다. 
 
 
3) 행13 사도 바울의 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16ff: 다윗왕까지 간략하게 역사를 소개하고 다윗왕에서 급속도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춤. 

30: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구약의 증거로서 33에서 시편 2를 인용함.

행13:33-34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시편 2는 원래 왕위 즉위식에 사용하는 시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이것을 인용함. 종종 이 시편은 다윗왕과 그의 후손들을 넘어서 메시아 왕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이것도 pecher방법이다. (바로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핵심은 30절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증거함. 
 
 
 

gezerah shawah 방식
 
 
계속해서 34절에는 사55:3이, 35절에서는 시16:10이 사용되었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ὅσια)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ὅσιόν)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여 한 단어로 연결시킨 바울의 구약사용의 기교를 볼 수 있다. 즉 거룩하다라는 말로 두 본문을 엮어나감. 여기에서 인용된 거룩하다는 말은 hagios가 아니고 hosios이다. 이러한 방법을 gezerah shawah 방식이라고 한다 (랍비들이 사용하는 방식)
 
 
또 다른 gezerah shawah 방식의 사용예로는 
 
 
롬4:3 (창15:6), 4:6(시32:1).

공통적인 단어는 여기다. 간주하다  logizomai 로기조마이 
 
 
히4:4(창2:2), 히4:6(시95:11). 

공통적인 단어는 안식  katapausis 카타파우시스 (하나는 동사, 다른 하나는 명사)

카타파우시스는 3가지 차원을 가진다.

1.원형적 모습: 창2:2. 하나님의 안식. 에덴의 안식.

2.모형적 모습: 시95.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출애굽 세대 사람). 안식의 약속이 주어짐. 천국의 원형적 안식을 모형적으로 계시해 주심.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안식일은 즉 천상의 안식에 대한 단순한 모형일 뿐이다. 

3.종말론적 모습: 영원한 안식의 모형의 역할을 한다.
 
 
 

* 대비와 칼 와호멜 용법.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οὐχ ὅτι ἀφ᾽ ἑαυτῶν ἱκανοί ἐσμεν λογίσασθαί τι ὡς ἐξ ἑαυτῶν, ἀλλ᾽ ἡ ἱκανότης ἡμῶν ἐκ τοῦ θεοῦ,

히카노스는 „능력이 있는, 자격이 있는“이라는 의미. 

영과 의문의 대비를 시킴. 새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 사람들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심. 이것이 영의 직분이다. 이것이 아니면 문자 차원이다. 마음이 없이 몸만 움직임. 죽은 믿음, 죽은 종교. 
 
 
 

고후3:7-10

여기에서도 대비의 방식을 취함. 하물며를 사용하여 긍정에서 더 큰 긍정으로 나감.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옛일을 섬기는 직분도 모세에게 영광중에 주어짐. 그러나 그가 섬긴 율법의 본질은 의문, 정죄 차원에 불과하며 또한 폐하여 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비해서 새 언약은 살리는 영의 직분이다. 정죄가 아니라 의롭게 만드는 직분. 그렇다면 이것을 선포하는 직분의 영광은 얼마나 더 크겠느냐? 우리의 섬김(더 큰 긍정)은 모세의 섬김(긍정)보다 훨씬 더 영광이 크다  칼 와호멜 용법

우리의 직분은 인간적 차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섬기는가? 하나님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신 언약.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사역 자체의 내용은 모세의 사역보다 더 크고 영광스럽다.  감격과 감사!
 
 
고후3:12 (폴레 파레시아)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2 Ἔχοντες οὖν τοιαύτην ἐλπίδα πολλῇ παρρησίᾳ χρώμεθα
 
 
담대히 말한다: 많은 파레시아를 가지고 말한다. 파레시아는 speech에 있어서 거침없음을 의미함. 즉 bold and free speech. 이것은 수사학적 용어이다. 악질 왕 앞에서 할 말을 담대히 말하는 것. 

이 표현은 사도행전에 많이 사용됨.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파레시아를 보고.
 
 
그들은 기탄없이 말함. 수사학에 있어서 아마츄어가 거침없이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에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거침없이 말을 할 수가 없다. 돌아와서 하나님 말씀을 담대하게 말하도록 기도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기셨으므로 우리가 기탄없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고후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telos: 종말, 목적)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καὶ οὐ καθάπερ Μωϋσῆς ἐτίθει κάλυμμα ἐπὶ τὸ πρόσωπον αὐτοῦ πρὸς τὸ μὴ ἀτενίσαι τοὺς υἱοὺς Ἰσραὴλ εἰς τὸ τέλος τοῦ καταργουμένου.

NIV: We are not like Moses, who would put a veil over his face to keep the Israelites from gazing at it while the radiance was fading away.

KJV: And not as Moses, which put a vail over his face,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stedfastly look to the end of that which is abolished

출34: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을 하기 위해 문장을 나누어 보면:

1.우리는 모세가 수건을 자기 얼굴을 가린 것처럼 하지 않는다: 12절에서 우리는 복음의 영광을 담대하게 말하고 드러낸다고 하였다. 

2.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가린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차 없어질 것의 종말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의미: 이 장차 없어질 것의 종말은 시내산 언약의 종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이 율법언약의 종말을 보면 안된다. 그들은 먼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새내산의 율법의 광채이다. 율법의 광채가 언젠가는 사라지듯이 모세의 광채도 곧 그의 얼굴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세가 그의 얼굴을 덮은 이유는 그의 광채가, 즉 모세 율법이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바라보고 구속사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출34: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애굽기 말씀에서와 같이 모세가 하나님께 나갔는데 얼굴에 광채가 났다. 이 사건에 바울이 첨가하여 우리에게는 수건으로 가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함. 바울이 계시의 완성의 시점에서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함.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 모세보다 훨씬 더 큰 광채(그리스도) 앞에서 원래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어야 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더 잘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율법의 텔로스(종말, 목적)가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은혜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옛언약과 새언약의 대비 ]
 
 
바울은 출 34:34을 아주 유사하게 사용함. 주어가 바뀜. 동사 형태가 약간 바뀜. 출애굽기에서의 주어는 모세. 그가 벗었다. 고후에서의 주어는 누구든지, 술어는 벗겨진다. 

이스라엘을 모세의 빛나는 얼굴도 감당을 못해서 모세가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러나 주님의 광채를 보게되면 오히려 수건이 벗겨진다.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다: Kyrios = Pneuma. 이러한 말이 다른 곳에서 사용된 곳이 없다. 기독론으로 „예수님이 영이시다“라는 말은 무리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이 16절에서 출 34:35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모세가 만났던 야훼 주님은 우리에게는 성령이시다. 이렇게 성령론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 성령을 대면하면서 만나는 위치에 있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절은 출34:35과 연결된다. 모세의 특권. 모세 외에는 하나님을 대면할 특권이 없다. 우리 모두는 이 특권을 누린다  종말론적 완성의 시대. 그러나 이것은 아직 거울 반영 형태이다.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완전히 대면한다. 청동거울은 희미하다. 그래도 우리는 주의 영광을 바라 본다.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모한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τὴν αὐτὴν εἰκόνα μεταμορφούμεθα: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메타모르페오는 마17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되셨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이다. 우리도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점진적으로 변모됨. 

이것이 이루어지는 근본적 동인은 새 언약의 사역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 파레시아를 가지고 선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바울이 구약을 사용하는 미세한 기교를 배워야 한다. 신약이 구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구약을 잘 따라가며 이해를 해야 한다. 특히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이 필수이다. 
 
 
 

렘33:19-26
 
 
20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1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 그에게 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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