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해야할운동

이머징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려고 함

이머징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려고 함
 

3. 21세기의 믿음




아마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의 교회가 된다는 뜻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하며 또한 더 중요하게는 21세기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고려해야 한다. - 덕 패이짙

재발상(Reimagining)의 과정

 

이머전트 교회 지도자들은 종종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다시 고안하는 작업에 관련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간증을 한다. 재발상 교회(Church Re-Imagined)라는 책에서 덕 패이짙은 어떻게 그리고 왜 그의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언급하고 있다:



교회를 새우려는 시도는 2000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교회는 린덴 힐스(Linden Hills)라고 불리는 미네아폴리스의 최신식 작은 마을의 이층집 공간이었다. 교회는 사실 훨씬 전에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새로운 기능을 가진 교회와 따라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공동체에 소속하길 원했다. 이때 나는 말하길,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 경우에 있어서 나의 현재 삶의 모습은 기존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목사로서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간다면 나는 다음 50년간 그리스도인으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패지트는 왜 그가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교회가 필요한가를 설명한다:



전형적인 감각에서 볼 때, 위기는 아니다. 나는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의 믿음을 결코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깊은 느낌이 있다. 사실 그 느낌은 더욱 깊어간다. 그 느낌은 과거 시대로부터의 것을 재구성하는 표현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 더 잘 맞는 그러한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패지트는 그가 사는 세상에 더 잘 맞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더 깊은 생각을 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글로벌 사회의 한 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적 모습이 필요하다. 서방 교회의 믿는 바들과 종교 행위들은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의 타당하고 올바른 믿음의 표현들과 동등하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믿음의 글로벌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역사에 활짝 개방하고 우리 자신의 문화적 버전에 따른 기독교의 모습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의 글로벌 사회(Global community of faith)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믿음의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패지트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나 체험들을 허용하는 통합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의 믿음의 표현들은 성경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계획은 완전한 성경과 함께 갈 수 없다. 이머징 교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새로운 종류의 믿음에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믿음을 자비로운 정통(generous orthodoxy)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한 정통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그 어떤 사상이라도 다 허락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성경에 일치하지 않는 사상들을 허용할 수 없기에 거절할 수 밖에 없다.

 

패지트는 새로운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잘 맞는 대처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유일한 대처라고 보고 있다. 패지트의 말을 들어보자:



내게는 후-산업시대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100년 전만해도 이러한 질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질문이다. 우리의 답변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의 방법을 재발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1세기의 교회가 된다는 뜻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하며 또한 더 중요하게는 21세기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고려해야 한다.

나는 집회에서 여러 다양한 교회로부터 온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지난 수년 동안 그들이 다니는 교회들이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사님은 더 이상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대신 일요일 아침 예배 때에 짧은 연극이나 연속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제 금기 책이 된 것 같다. 성경을 여전히 가르치는 목사가 있다면 그들은 법칙에서 벗어나는 예외가 되고 있다.

 

이머전트 지도자들은 종종 우리가 이 시대에 관련이 되려면 메시지는 같으나  방법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의 성공 기준은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 하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가 하는 것은 관심도 없다. 덕 패지트가 그의 교회에서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의 행각에서의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사람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끄집어내는 것이 주된 것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면을 볼 때 설교란 강의나 동기 부여를 하는 연설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 가운데 어떤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그들에게 말씀들을 던져두는 시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의 설교는 어떤 믿음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그러한 교훈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각자의 소망과 생각들과 참여를 환영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패지트가 서술하고 있는 것은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이다. 즉, 신학이나 진리를 재는 잣대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경을 빚을 수 있도록 하라는 신학이다. 이것이 바로 패지트가 말하는 자신들의 경험 가운데 말씀을 두는 던져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이 개발되면서 이머징 지지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 대화식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 방법은 한 사람이 진리를 선포하고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성경이 뭐라고 말했을 것이라는 여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에 대하여 패지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에 대한 소극적인 접근을 초월하여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려고 시도하여 왔다. 이 공동체는 마치 사람들이 각자 한가지씩 음식들을 준비하여 와서 한 자리에 놓는 포트러크(Potluck) 같은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먹고 나누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통하여 또한 역사를 통하여 전개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소망, 꿈, 생각, 이해를 나눌 때 세워진다.

상황 신학(Contextual Theology)

 

당신은 아마 이 용어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상황 신학은 이머징 교회로부터 뚜렷하게 나타나는 메시지이다. 스티븐 비. 베반스(Stephen B. Bevans)는 그의 책 상황 신학의 모델들 (Models of Contextual Theology)에서 상황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상황신학은 다음과 같은 면들을 고려하는 신학이다. 영과 복음의 메시지, 기독교인들의 전통, 신학이 대하는 문화, 문화 속에서의 사회 변화, 공의, 자유, 평등과 같은 것들이 서부 기술의 변화에 따른 결과들인지 근본적인 문제들인지에 대한 고려 등등.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스스로 자유롭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 곧 문화, 인종, 역사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성경의 메시지는 그러한 것에 맞게끔 조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저자가 상황 신학은 신학을 인본주의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라고 요약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첫째, 성경을 상황에 맞추다 보면 진리를 곡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게 되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둘째는, 성경을 상황에 맞추지 않으면 성경은 비효과적인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하여 나는 네 라고 답할 것이다. 둘째에 대한 질문은 분명히 아니다 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창조주의 영감된 작품으로서 인간의 그 어떠한 책보다 훨씬 더 높고 완전한 작품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 즉 가난하던 부요하던, 남자던 여자던, 똑똑하던 무지하던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되면 복음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선교사들의 지칠 줄 모르는 성경 번역 사업에 의하여 오늘날 대부분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딘 플레밍(Dean Flemming)은 독일의 유럽 나사렛 대학의 신약 교수이며 신약에서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in the New Testament)의 저자이다. 그의 책에는 그는 상황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모든 특별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모든 교회는 청중의 깊은 곳까지 와 닿는 메시지의 신학을 배워야 한다. 사실 오늘날 상황 신학에 대한 가장 유망한 대화는 서부 쪽의 교회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들이 이를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서부 쪽의 교회들은 새로 등장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맞는 복음을 구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고 있었다.

플레밍이 가장 유망한 것으로 고려한 서부 쪽의 교회들은 다름 아닌 이머징 교회들이다. 플레밍은 베반스의 신학 모델에 동의하지만 자신은 이머징 교회의 딜레마에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플레밍의 말을 들어보자: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상황 신학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타협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의심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배경 속에서 어떻게 신학을 하여야 하는지 신약을 보아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상황 신학에 대하여 의심을 하는 마땅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플레밍이 그 해답을 신약에서 찾자고 제안하기 때문에 해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물론 플레밍은 신약에서 교리나 신학을 찾자는 말이 아니라 어떤 모범이나 패턴을 신약에서 찾자는 말이다. 그는 신약 신학은 언제나 변화를 위하여 개방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변화를 개발하는 방법을 알려면 신약의 이야기들과 사람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플레밍이 성경을 상황화 시키기 위하여 내 세우는 전제는 문화와 사회가 항상 바뀌기 때문에 말씀도 그러한 변화에 맞게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전제에 도전하고 싶다. 성경은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적이고 힘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12:4).

 

만일 말씀이 활력이 있다면 또한 영원하며 안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위엄 가운데 성경의 저자이시다. 하나님은 시간과 문화와 사회를 초월하신다. 상황화는 사람과 문화가 바뀐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성경에 맞게 바뀔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하여진다. 만일 우리가 성경은 실수가 있고, 영감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상황화시키는 것은 당연하겠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패지트가 제안한 것처럼) 시적으로 쓰여진 부분도 있다. 실제로 성경은 아름답게 쓰여진 걸작품이다. 성경은 전혀 바뀔 수 없는 그러한 유기체적 구조로 되어 있다. 성경은 독자의 마음과 삶을 바꾸도록 되어 있다. 성경은 이머전트들이 제시하는 사람들의 경험 주변에 말씀들을 던져 넣는 것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언제나 옳다고 말한다. 자주 틀리는 쪽은 사람이다. 우리가 사람의 여론을 의지할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길은 영적인 삶의 개발에 있어서 위험한 길이다. 결과적으로 무서운 미혹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머징 교회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은 메시지를 제시하는 방법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들이 변화시키려는 것은 메시지 자체이다:



혁신적인 이머징 목사들이 우리는 메시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매체만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주 멋지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 새로운 교회에서 우리는 매체와 메시지가 서로 엮여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매체를 바꿀 때 전달되는 메시지도 아무리 작더라도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천진함을 넘어서야 하며 이 점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물가의 여인

 

만일 당신이 이머전트의 대화를 충분히 듣고 있으면 계속되는 주제를 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를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다. 대신 우리는 설교하려는 욕망이나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나누려는 욕망을 밀쳐내고 먼저 관계와 우정을 돈독히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은 사람을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고 대신 주님은 언제나 그들 모습 그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한 예로 단 킴발의 2007년 책, 그들은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 않는다(They Like Jesus but Not the Church) 을 보자. 그 책의 교회는 교만하게 다른 모든 종교는 틀렸다고 말한다 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킴발은 제자들은 근처 마을로 갔고 예수님 혼자 우물가에 앉아있던 사건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신다. 킴발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바꾼다:



예수님은 멈춰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질문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모두 틀렸다라고 급작스럽게 말씀하지 않았다.

이 글 공유하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