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은사운동의 도전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은사운동의 도전들
리챠드 개핀 박사**)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578
이 논문은 1997년 10월 15일-23일까지 서울 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4차 국제개혁교회대회(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에서 발표된 것이다. 발표자 리챠드 개핀(Richard B. Gaffin, Jr)은 미국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대표로 참석했으며, 현재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주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번역 대본은,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1997 (Albert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7), pp. 162-183.
발표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은사 운동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특히 은사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생활과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 그렇기 때문에 도전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검토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 대회(conference)에서 새로운 안건은 아니다. 전에도 성령으로의 세례(Langley 1989, J. van Bruggen 교수)와 신약의 예언(Zwolle 1993, N. Wilson 교수)에 관한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ICRC Proceedings, 1989, Winnipeg, 1989, 186-205; ICRC Proceedings, 1993, Neerlandia, 1993, 116-135.
우리가 논의할 주제는 대체로 두 부분으로 집약된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2) 성령의 어떤 은사들의 중단에 관한 문제.
이 자리에서 두 영역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선택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개혁 교회들의 대회로 모인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여기에는 은사 운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개혁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들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본인은 이어지는 토론에서 이 발표의 불균형이 시정되기를 기대한다. 말을 명료히 하기 위해서, 본인은 “은사 운동”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즉 오순절주의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비(非) 오순절 은사주의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함을 밝힌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기독교인들
1.1 오순절은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신약의 모든 구절은 사실상 오순절을 지향하거나 회고한다. 따라서 그때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그 사건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1:5), “성령의 임함”(1:8), “성령의 부어 주심”(2:33), “성령의 선물”(2:38) 등이 다양하게 또한 서로 바꿔 쓸 수 있게 기록되었고, 본인도 그리하겠다.
하는 것은 크고도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바른 대답을 내는 것은 사실상,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는 한 가지 근본적 구분을 인식하고 그 구분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을 위해 ‘단번에 모두’(once-for-all) 성취된 구원과 죄인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구원을 구분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과 하나님의 백성이 지속적으로 그 은택을 받아 누리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바른 대답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적 구분을 여기에서 도입하면서, 본인은 또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 물론 그 구분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함을 밝힌다. 여기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중생과 회심과 칭의,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는 성화가 포함될 뿐 아니라, 신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는 성령의 은사와 힘주심도 구원의 서정에 포함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경험과 공동의(corporate) 경험을 모두 포함한다.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정당하고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에 위치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순절의 중요성은 일차적으로 구원 역사적이며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 두 측면을 양극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 이에 대해서는 후론할 것이다 -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의 요점은,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개인으로든 공동으로든성령을 특정하게 경험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1.2 “주”와 “영”[성령]의 관계의 중요성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주(Kurios)와 영(Pneuma)의 관계를 정당하게 알 때에야 비로소 바르게 될 수 있다”고 펠러마(W. V. Velema)는 주장했다. De leer van de Heilige Geest bij Abraham Kuyper ('s Gravenhage, 1957), 246: "Een gereformeerde pneumatologie zal alleen dan zuiver kunnen zijn, wanneer ze het verband tussen Kurios en Pueuman goed ziet." L. Floor (Hy wat met die Heilige Gees doop [Pretoria, 1979]의 표지 다음 면에서 재인용했음.
이 진술의 참됨, 추축(樞軸)과 같은 진실성은 더 이상 과장하기 어렵다. 이제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영[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관계를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진술은 특히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이 놓인 곳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그 관계가 적절히 인식되지 않고, 그에 따른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적절히 평가되지 않는다면,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한 지속적인 오해가 은사 운동의 독특한 강조점들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관한 유사한 오해들 혹은 적어도 비슷하게 부적절한 이해가 몇몇 개혁주의적 모임이나 장로교 모임을 포함한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다른 논의에 앞서서,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오순절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야 할 것이다.
1.3 고린도전서 15:45
신약 전체에서 이 관계에 대한 다소 난해한, 그러나 매우 놀랄만한 핵심적 선언은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확언은 바울의 기독론과 성령론에 핵심적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 오순절과 그 중요성에 대한 한 문장의 주석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한 주해가 필요하겠으나 그 방향의 노력은 각주에서 제시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다음의 몇몇 요점만 살펴보겠다.
1) 고린도전서 15:45의 영(Πνεύμα)은 한정적이며, 성령을 가리킨다. 바울은 성령 이외의 다른 “살려주는” 분을 알지 못한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다양한 교파의 주석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지만, 개혁주의 진영에서 이러한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H.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Grand Rapids, 1956), 387/Magnalia Dei (Kampen, 1931), 369; R.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Phillipsburg, NJ, 1987/1978), 78-92; J.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1959), 1:11;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1975), 88, 222-3, 225, 539/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 (Kampen, 1966), 90, 243, 247, 602; J. Versteeg, Christus en de Geest (Kampen, 1971), 특히 43-67; G. Vos, The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1930), 10, 168-69, 184, 312/『바울의 종말론』(엠마오, 1989), 25-26, 242-44, 263, 424.
고린도전서 15:45의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는 결론은 중복되면서 서로 강화하는 몇몇 고려에 근거한 것인데, 필자에게는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a) 45절의 영(πνεύμα)과 신령한(πνευματικόν, 44a, b, 46절)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와 형용사이다. 형용사 πνευματικόν은, 특히 본문처럼 육적(ψυχικόν, 혹은 “육의”)과 대립되는 쌍으로 쓰일 때, 다른 신약에서 한 번만 더 나오는 이 대립(고전 2:14-15)의 빛에 비취어볼 때, 성령의 사역과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을 가리킨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형용사를 일관되게 사용한 것에 의해서도 더 분명히 확정된다(예를 들면, 롬 1:11; 엡 1:3; 골 1:9). 그런데 에베소서 6:12는 유일한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전서 2:6-16에서는 성령의 활동, 즉 하나님의 계시된 지혜를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이고 독점적인 사역이 근접 문맥의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불신자(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 육에 속한 사람, 14절)에 대비하여, 신령한 자(ὁ πνευματικός, 15절)는 성령에 의해 내주(內住)와 조명과 동기 부여와 지도를 받는 신자이다(4-5절). 이 구절을 삼분법적 인간론의 근거로 삼으려는 오래된 노력은, 특히 여기에서 πνευματικός를 절정에 도달한 인간 영혼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J.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2 (Edinburgh, 1977) 23-33, 특히 23-9를 보라.
b) 45절 후반부의 분사 수식어도 동일한 결론을 가리킨다. 마지막 아담은 단지 “영”(πνεύμα)이 된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πνεύμα ζῳοποιούν)이 되었다. 살려준다는 이 동사에 대한 바울의 다른 용례는 결정적인데, 특히 고린도후서 3:6의 총괄적인 선언에서 그리하다: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영”(τὸ πνεύμα)은 3절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주석가는 거의 없다. 또한 로마서 8:11에서도 고린도전서 15장 구절과 비슷하게 진술하여, 신자의 몸을 일으키는 “살려주는” 사역을 성령에게 돌린다(참조. 요 6:63).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표준적인 영어 번역은 πνεύμα(성령)을 소문자 에스(s)로 시작하는 영(spirit)으로 번역하여 45절의 뜻을 적어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외로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Spirit”으로 정당하게 번역한 The Living Bible(이제 새로 바뀌어 The Living Translation으로 출간되었다)과 Today's English Version이 있을 뿐이다. 비록 샅샅이 조사한 것은 아니고 개략적으로 한 것이지만,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별되는 언어 - 화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어(Afrikaans),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 의 번역들에도 동일한 애매성이 노정된다. 본인이 찾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예외는 Die Bybel (Kaapstad: Verenigde Protestantse Uitgewers, 1959)였다.
2) “살려주는 영[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시간적 서술이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분으로 “되었다.” 이렇게 “됨”의 시점은 그의 부활, 혹은 좀더 넓게 그의 높아지심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논증의 흐름은 이점을 매우 명확히 드러낸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말하자면, 그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 때문에, 혹은 그의 부활을 제외한 다른 고려 때문에 “살려주는 분”이 되셨다면, 바울이 15장에서 하듯이 신자의 부활을 논증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거나 근본적이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기에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장에 나오는 핵심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부활-추수’의 “첫 열매”(20, 23절)로서 그는 “살려주는 영[성령]”(45절)이며, “살려주는 영[성령]”으로서 그는 “첫 열매”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마지막 아담은 승천하셨다. “둘째 사람”으로서 그는 이제 그의 승천 때문에 “하늘로부터” 나셨고(47절), 근접 문맥을 살펴보면 이 전치사구는 거의 확실하게 높아지심에 대한 서술어이지 기원에 관한 서술은, 즉 이전 존재로부터 성육신 하신 것에 대한 서술은 아닌 것이다. 하늘에서 나신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서(47, 48절), 그는 신자들(하늘에 속한 자들, 48절)이 그의 형상을 입을 자인 것이다. 신자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할 때 그의 형상을 완전히 입게 될 것이다(49절, 참고. 빌 3:20-21).
“하늘에 속한 자”(48절)이시다. 이 모든 것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된 마지막 아담은 바로 ‘승귀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다.
3) 근접 문맥에서(42-49절), “살려주는”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행동, 즉 그가 신자의 죽을 몸을 일으킬 것(22절)을 예기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현재’의 사역도 또한 여기에 암시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의 부활의 생명은 미래의 일일 뿐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예를 들면, 갈 2:20; 골 2:12-13; 3:1-4). 부활하신 자로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의 종말론적이고 부활시키시는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바로 여기에 오순절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고려가 놓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하겠다.
4) 그렇다면, 부활/승귀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중대하고도 획시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이 고려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극적으로 변화된 것과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양자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동일시, 혹은 하나됨의 결과를 가져왔다. 바빙크가 이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성령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property)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었으며,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동질화된 것이다 [...als het ware door Christus in zichzelven opgenomen].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었다” (Our Reasonable Faith, 387/Magnalia Dei, 369).
이것은 이전에도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함께 사역했음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 이전에도, 심지어 옛 언약 아래에서도 이미 전(前) 성육신의 그리스도(Christ preincarnate)와 성령이 공동으로 함께 하면서 사역하였다. 고린도전서 10:3-4는, 이 구절에 대한 주해가 어떻든지간에 그 사실을 가리킨다. 참조. 베드로전서 1:10에서는 구약 선지자들 안에서 포괄적으로 사역하였던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특별히 지칭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그들의 연합 활동에 안정되고 완성된 근거가 구속의 역사 안에서 부여되었다. 결국 그러한 사역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또한 명확하게 성취하신 사역에 영화로운 관을 씌우는 결과인 것이다. 이 완성된 관계를 포착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 살리는 영[성령]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하나됨 혹은 연합은, 비록 포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면에 제한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연합은 그들의 활동, 즉 부활의 (=종말론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에 관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연합은 “기능적”(functional) 혹은 과거의 신학적 범주를 사용하면, (“존재론적”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진정한 인간성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 의해 경험된 실제적인 변화/변형이 관련되기는 한다.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 즉 ‘영광스러운’ 인간성을 그는 이제 소유하게 되었다(참조. 고후 13:4).
것이 아니라) “경륜적”(economic)이고, 혹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삼위일체의 제2위와 제3위의 구분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바울의 논증의 범위와 구속 역사적 초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본질적-영원적, 본체론적-삼위일체적 관계는 여기에서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게)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이 ‘되었는가,’ 역사 안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도 특히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즉 그의 진정한 인간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역사 비평학의 전통이 오랫동안 특징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여기에서 “기능론적” 기독론을 찾으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다. “기능론적”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차이를 부인하고, 따라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과 어긋난다. (성부) 하나님, 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한) 영을 나란히 위격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 이것이 후대의 교리적 공식의 기초를 놓는 것인데 - 바울에게서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전 12:4-6; 고후 13:13; 엡 4:4-6). 특히 최근의 문헌에서는 G.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MA, 1994), 825-45, 특히 839-42를 참조할 것. 그는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훌륭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삼위일체론적 개념이 지금의 논점은 아니지만, 고린도전서 15:45의 해석에 대한 정당한 전제가 된다.
5)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은 고린도후서 3:17의 상반절에서 이어지는 바울의 진술과 밀접히 연결된다: “주는 영이시니.” 여기에서 “주”(ὁ κύριος)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시가 지지된다. 이것은 또한 각주 4에서 인용된 다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점점 더 많은 수의 주석가들이 17절 상반절의 “주”는 16절에 인용된 출애굽기 34:34을 성령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래서 17절 하반절에서 18절까지의 기독론적 언급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삭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 L. Belleville, Reflections of Glory (Sheffield, 1991), 256ff.; J. Dunn, "2 Corinthians III.17 - 'The Lord Is the Spiri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31/2 (Oct. 1970), 309-20; Fee, Empowering Presence, 311-14; S. Hafemann, Paul, Moses, and the History of Israel (Tübingen, 1995), 396-400; R.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 of Paul (New Haven, 1989), 143-4; N.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Edinburgh, 1991), 183-84. 그러나 17절 하반절은 이미 “주의 영”이라고 하면서 “영”과 “주”를 구분한다. 따라서 바로 이어지는 18절에 비취어 보면, “주”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다. 18절에서 “주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구분되는 성령의 영광은 확실히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보면서, 혹은 깊이 묵상하면서, 신자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감을 바울은 계속하여 가르치는데, 그 형상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계속되는 구절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말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가르치는 4:4은 그 결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또한 로마서 8:29와 고린도전서 15:49도 주목하라). 바울이 알았던 바, 신자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볼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영광은, 확실히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또한 그들 안에 전달된 “그리스도의 얼굴에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4:6)인 것이다.
여기에서 본질적이고 삼위일체적인 정체성과 관계성이 부인되거나 흐릿해지지는 않지만, 사실 그것은 바울의 고려 밖에 있다. 근접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특히 18절을 보라) 성령과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연합 활동이 바울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3:17의 “주는 영이시니”의 “이시니”(ἐστίν)는 고린도전서 15:45의 “되었다”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승귀는 성령과의 새롭고 전례가 없는 친밀한 (활동적) 관계를 낳았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여기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생명(the resurrection life)과 유사한 상관어인 (종말론적) “자유”(3:17 하반절)를 주는 사역에서 하나이다. 그 상관 관계는 특히 로마서 8:2의 표현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4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상관 관계
그리스도의 승귀에 근거한 이 동일시가 바울이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닌,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로마서 8:9-10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짧은 구절이지만, “너희가 영에 있고”(9a), “영이 ...... 너희 안에”(9b), “그리스도에 속한”(9d, 한글 개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번역되었음. 빈번히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실질상 동의어이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10a) 등이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경우의 조합인 셈인데, 이러한 표현들이 각기 다른 경험을 서술할 리는 없는 것이고, 동일한 실체의 여러 차원들을 모두 묘사한 것이다. 동시에 성령과의 교제가 아닌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소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이러한 일치는 소 자의적인 신적 합의(divine arrangement) 때문은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경험보다 진실로 ‘우선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경험 안에 있는 것 때문이다. 즉 성령이 이제 “그리스도의 영”(9c)이고, 그리스도가 이제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구별을 부인하고 절대적인 동일성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뒤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신자들 안에서의 성령의 중보 기도는(26-27절)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와(34절) 구별된다.
다른 곳에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는 것”이다(엡 3:16-17).
1.5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성령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의 교훈에서 볼 수 있는 강조점과 연결되고, 뿐만 아니라 강화한다. 요한복음 14:12 이하에서 예수님의 임박한 떠남과 승천은 -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12절. 참조. 20:17) - 승천하신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 성부 하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수반한다. 이 구절들에서 “너희”는 시간과 장소의 구별이 없이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예수]와 함께 있었던”(15:27)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지금” 그가 “아직도” 그들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감당치 못할” 자들이었다(16:12).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이루셨고(20:22), 그 보냄을 통하여 만대의 교회에 보내셨다.
(16절) 참조. 26절: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이러한 과정은 이미 앞의 7:39에서 암시되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성령의 임재 이전과 이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축으로 결정된다. 즉 전자는 후자의 함수(function)이다(참조. 7:39). 오순절은 “요한복음의 오순절”(20:22)과 사도행전 2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룰 수 없겠다. 본인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1979), 39-41/『성령은사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44-48를 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는 것은(14:16-17) 그와 함께 다른 약속을 수행한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기를(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문맥에서 이 말씀은, 지금 고려하는 성령의 오심은 그 자체로 예수의 친히 오심을 포함함을 분명히 의미하고 있다. 예수의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익”이다(16:7). 왜냐하면 이어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또한 예수께서 친히 다시 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육체적) 가심은 그의 (성령의 인격 안에서) 오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그 대신으로 그의 짧고 일시적인 부활 후의 나타남은 이 오심에 적합하지 못할 것이다. 근접 문맥에서(17-23절) 이 오심은 세상과 구별되어서 신자들 안에/에게/함께 하는 성령(과 아버지, 23절)의 내주/나타남/임재의 임박함(“조금 있으면” 19절)과 적어도 밀접히 연합되어 있다(비록 동일시는 아니지만).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성령”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의 안건은 없다.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16:13-14는 특별히 이 점을 지적한다). 성령은 실로 철저히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현존은 대리적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그러한 분으로서 우주적인 권위와 능력(ἐξουσία)이 “주어진” 즉 이러한 능력이 전에는 없었으나 부활의 결과로 이제 주어졌다는 것이다.
후, 잘 알려진 대위임령의 말씀에서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 선언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확언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오순절과 그 결과가 지속될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읽은 것이다. 또 다시,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즉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만일 오순절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높아지신 예수가 여기에, 즉 그의 교회와 영원히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유사한 강조점을 인식하는 것이 누가복음-사도행전을 바울 (혹은 요한) 신학으로 부적절하게 읽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복음서 끝 부분(24:44 이하)과 사도행전 처음 부분(1:3-11)이 중복되는 것은 승천 전의 40일 중간 기간 동안 부활하신 예수께서 구약을 가지고(눅 24:44-47) 사도들을 가르쳤음을(행 1:2)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즉 자신에 관한 최근의 사건이나 곧 일어날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획시대적이고 결정적인 국면임을(참조. 특히 행 1:3)을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가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는 것/성령으로의 세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한 절정의 사건이며,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적 구원 사역에 근본적인 것인 것이다.
베드로는 이 핵심을 - 사실상 주된 강조점인데 - (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의 오순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화하였다. 예수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특별히 부활에 초점을 맞춘 후(22-31절), 베드로는 사도행전 2:32-33에서 이러한 것들을 차례로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부활 - 승천 - 성령을 받음 이 받음은 누가가 앞에서 서술한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즉 예수는 이미 요단에서 성령을 받았고(눅 3:22) 심지어 수태될 때에도 받으셨다(1:35). 여기에서는 승천에서 (또한 그 반영으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서) 극적으로 실현된 단계의 원칙, 혹은 승귀의 원칙이 연관되어 있다.
- 성령을 부어주심. 마지막 사건인 오순절은 다른 사건들과 대등하게 놓여 있고, 특히 친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은 이 순서에서 정점에 있고 최종적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다른 사건들처럼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아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부활 - 승천 - 오순절’은 사건들이 연합된 하나의 복합체(a unified complex of events), 즉 ‘단번에 모두’의 구속 역사적 통일체를 구성하며, 그렇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것과 함께 주어졌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큰 원을 돌아 사실상 고린도전서 15:45에 다시 돌아왔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서술한 순서를 바울 사도는 압축하여 표현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
1.6 구원의 역사의 부분으로서의 오순절
오순절은 한 사건인데, 구원의 역사에서 한 필수적인 사건이며, 구원의 서정에서의 한 측면이 아니다. 따라서 오순절의 자리는 ‘단번에 모두’ 완전히 성취된 구속에 있으며, 그것의 계속적인 적용에 있지 않고, 또한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해야 할 패러다임은 아니다. 은사 운동이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예를 들면, J. Williams, Renewal Theology (Grand Rapids, 1990), 2: 177, 189, 특히 205-7을 보라.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을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들과 달리 경험하는 능력, 혹은 죄사함으로 이해된 구원 그 “이후” 경험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하게 부적절하다. 그러한 평가는 사실상 오순절을 너무 높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낮추는 것이다. 오순절에 관한 한 “두번째 순서” 혹은 “보충적인 것” 혹은 “부가된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오순절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마침표. 왜 그런가? 오순절이 증거하는 것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반복될 수 없는 결정적인 사역은 미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앞에 놓인 과업은 죄 사함을 획득하는 것뿐 아니고, 좀더 궁극적으로는 그의 구속 사역의 주요한 결과로서 또한 생명을(예를 들면, 요 10:10; 딤후 1:10),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 다른 말로 표현하여 성령 안에서의 삶을 바울이 성령을 “보증”(고후 1:22; 5:5; 엡 1:14)이나 “첫 열매”(롬 8:23)이라는 은유로 표현한 것은 특히 교회와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특성임을 강조한다.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 생명이 없이는 “구원”은 분명 끝이 잘려진 것일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오순절에 명백히 계시된 것은 다름이 아닌 그 생명, 그 완결된 구원이고, 그리스도가 그 생명의 수여자라는 세례 요한이 누가복음 3:16에서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순절에 능동적인 주체였다는 사실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이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최종성과 완전한 충족성을, 즉 그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였다. 오순절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획득한 죄사함과 종말론적인 생명에 대한 구원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영의 인침(the redemptive-historical Spirit-seal of Christ)이다(참조. 엡 1:13).
부활과 승천과 함께 오순절은 그리스도를 성령을 주기 위해(행 2:33) -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종한 결과와 그 상급으로서(참조. 빌 2:8-9) -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특징 지운다. 즉 오순절은 높아지신 예수가 메시야적인 성령 수납자와 수여자(the messianic receiver-giver of the Spirit)가 되심을 보여준다. 좀더 공식적 용어나 분명한 교리적인 용어를 쓴다면, 오순절의 구원론적 “새로움”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인간론적-개인적-경험적인 것이 아니고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선교학적이다. 오순절은 특히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성령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근거에서 이제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임재하신다. 그는 ‘종말론적’ 영이시다.
2) 성령은 이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모든 육체에 부어졌다”(행 2:17). 그는 ‘보편적인’ 영이시다. 필자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13-41/『성령은사론』, 13-48을 보라.
오순절이 만들어낸 차이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지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에 관한 한, 대조가 되는 상(像)이 떠오른다. 즉 구원의 역사의 시각에서는 밤과 낮, 거의 전부와 전무의 급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루신 구원의 성취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전무였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이후에는 전부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의 시각에서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 그 이전과 이후 (옛 언약과 새 언약에서) 성령을 경험하는 데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본인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경은 그 차이를 드러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깔끔하고 명료한 범주화를 거부하고, 단지 “더 좋은”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이 용어를 썼다 (예를 들면, 11:40).
혹은 “확대되어” “더 크게” “더 충만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서술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0장 1항)에서 사용한 비교급.
등의 용어로 느슨하게 포착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순절/은사 운동 저자들이 누가복음의 끝맺는 말(24:52-53)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매우 놀랄 정도로 없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누가가 다음 서신을 기대하게 하기 위해서 쓴 것이고, 데오빌로에게 제2부가 도착할 때까지 그러한 인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이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33절) 부활하시고 막 승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이제 그들의 마음이 뜨겁고(32절) 열려져서(45절) “큰 기쁨으로” 경배하고 “늘” 그리고 공적으로(“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인상적인데, 또한 오순절 ‘이후’의 그들의 (성령에 충만한) 경험과 완전한 연속성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또한 오순절의 일차적 요점이 - 중생 후이든 어떠하든 -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된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경험, 즉 오순절 날의 120명과 이후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사건의 복합체로 바르게 간주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험은 어떠한가? (행 8:14 이하; 10:44-48/11:15-18; 19:1-7)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는데, 특히 지금 은사 운동 안에서의 경향, 즉 사도행전의 이러한 경험들은 중생과 구별된, 혹은 중생 이후의 개인 신자들이 능력을 얻기 위해서 따라야 될 지속적이고 규범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실제적으로는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을 적절히 구별하는 일을 실패한 데서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32-33의 사건-복합체에서 한 사건(오순절)은 개개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위해 반복할 수 있는 모델로 간주하고 다른 세 사건(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받은 일)은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모두’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변칙적인 것이다. (너무도 빈번히 사도행전은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던 옛날의 좋은 시절”의 느슨한 삽화(揷話) 모음집 정도로 여겨져서 경험적 모델을 찾기 위해서 탐구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1:8) 누가가 충분하게 명백히 드러낸 것처럼, 사도행전은 사실상 ‘완결된’ 역사이고, 구원의 역사에서 독특한 시기였다. 즉 ‘사도적인’, ‘단번에 모두’의 복음 전파가 “땅 끝까지,” 이스라엘에서 이방까지 이루어진 역사적 시기이다. (8절은 모든 신자나 모든 세대의 교회에 차별이 없이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8절의 “너희”(ὺμάς)가 구체적으로 받는 것은 2절의 “사도들”(τοίς ἀποστόλοις)이다. 또한 이사야서 49:6의 “이방”과 “땅끝까지”의 병행구가 13:47에 인용된 것을 참조하라.) 골로새서 1:6, 23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의 이러한 세계적이고 ‘사도적인’ 팽창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한다(물론 완결된 팽창은 그 너머의 후기 사도적 미래에도 열려 있지만).
예를 들어, 오순절에 제자들이 능력을 입히운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회심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의 성격상 한 번만[한 세대만] 있을 수 있는, 교회의 그 세대의 독특한 경험, 표적과 기사로 확정을 받았던(참조. 히 2:3-4) 독특한 경험의 일부였기 때문에 회심 이후 이러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때의 참”(갈 4:4)이 시작된 그 시대, 즉 ‘단번에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그 결과 이것과 분리할 수 없게 교회에 성령을 보낸 그 시대에 살게 되었던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획시대적이며, 따라서 본질상 비(非) 유형적이며 비(非) 패러다임적이다.” S. Ferguson, The Holy Spirit, (Leicester, 1996), 80. 또한 Perspectives on Pentecost, 22-28/『성령은사론』, 24-32; R. Gaffin, Jr. in W. Grudem (ed.), Are Miraculous Gift for Today? (Grand Rapids, 1996), 37-41 등을 보라.
끝으로, 오순절이 절정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오순절은 “아버지의 약속”(행 1:4; 참조. 2:33; 눅 24:49)을 성취한다. 이 표현은 오순절에 대한 우리의 구원 역사적 조망에 그 완전한 외연(外延)을 제공한다. 오순절은 모든 옛 언약의 기대의 핵심에 있는 그 언약, 언약 역사의 그 이후의 과정과 그 결과를 형성했던 최초의 언약, 즉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얻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창 12:2-3)의 성취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3:14에서 오순절을 보았던 그 관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통하여 “성령의 약속”은 이방인에게 미친 “아브라함의 복”에 적어도 절대적인 부분이거나, 아마 바로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두 목적절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창세기 12:3의 언약의 약속이 갈라디아서 3:8에서 어떻게 인용되었는지를 주의해서 보라.
요약하면, 충만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오순절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들이 궁극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을 획시대적으로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충만함 가운데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규모로 임마누엘 원칙이 최초로 실현된 것, 즉 “첫 열매의”(참조. 롬 8:23) 실현을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1.7 성령의 경험
오순절이 구속 역사적으로 획시대적이며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으로의 세례가 어떠한 경험적 중요성이나 함축을 갖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특히 은사 운동 안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신자가 경험하는 다양하고 심오한 실체의 원천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몇몇 신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근원이시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아도, 생명력 있고 변혁적이고 따라서 능력 있는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전혀 성령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은사 운동 사이의 문제도, 혹은 개혁주의 진영 내의 문제도 아니며, 또 적어도 문제가 되어서도 안된다.
고린도전서 12:13은 개개의 신자가 오순절에 오신 성령에 참여함을 가리킨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제외하고 신약에서 단 한번 더 “성령으로의 세례(baptized with 여기에서 전치사 ἐν은 확실히 세례의 요소를 가리키는 “으로의(with)” 혹은 “안에(in)”의 의미를 지니며, 도구적 의미의 “으로(by)”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주의 주석가인 G.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1987), 605-6을 보라.
the Spirit)”가 언급된 이 구절은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구원의 역사) 결과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구원의 서정). 다음의 두 가지 요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1) “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신자. 참고. 12절)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았지 단지 몇몇 신자만 받은 것이 아니다. “다” 오순절의 은사에 참여하였다.
2) 그 경험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때 (즉 회심할 때) 발생했지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오순절주의 주석가들도 회심 후의 분명한 경험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이 구절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점점 더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Fee의 명쾌한 주석을 보라. First Corinthians, 603-6; Empowering Presence, 178-82.
이 은사에 참여한 것에서 흘러나오는 포괄적인 경험의 일부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명령에 특히 잘 포착되었다. 그리이스어에서 현재형으로 표현된 이 명령은 이러한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임재가 모든 신자의 계속적이고 항상 반복되는 관심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5:19-6:9) 본문의 구성에서, 19-21절의 네 분사 구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18절)을 확대한 것이고, 5:22-6:9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는 네 번째 분사 구문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밝히듯이, 신자마다 다르고 굴곡이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이 충만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의 -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인간 관계, 혼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의 영역에서의 - 태도와 행동을 변혁시키는 능력, 즉 모든 것을 조정하는 원동력이며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신자는 교회의 건덕과 선교를 위해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다양하고 잘 배분된 은사를 구할 것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예를 들면, 롬 12:3-8; 고전 12:1-11, 28-31; 엡 4:7-13).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신자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엡 4:30)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는 권고를 받는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하는 것이 진정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은 여기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발전될 수 있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위의 이야기가 적어도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와 기독론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으로 강조하는 것과 모순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험에 대한 오순절의 중요성을 생각함에 있어서, 오순절을 성령의 활동의 다른 면과 구별되는 어떤 특정한 면(들)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사역에 근거하고 그 사역의 절정의 열매로서, 오순절은 성령을 교회 안의 - 신자들 안의 - 모든 활동 영역으로 이끈다.
1.8 오순절은 단 한번의 유일한 사건
이 점에서, 우리는 최근 몇몇 개혁주의적 저자들이 오순절은 우리의 구속을 ‘단번에 모두’ 성취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실제에 있어, 그들의 거부는 매우 강하다. 1989년의 본 대회에서 읽은 논문의 중요한 결론의 하나로, 판 브럭헌(van Bruggen) 교수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은 ‘단번에 모두’의 사건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그 앞부분에서는 단일성이란 “불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ICRC Proceedings, 1989, 205, 참조. 195, 199.
마틴 로이드 죤스 박사는 이에 대해서 좀더 강하고 좀더 혹독한 말로 반대하였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에 대해서 매우 느슨하고 위험한 이야기와 글들이 요즈음에 많이 생겼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은 ‘단번에 모두’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반복될 수 없다는 설명을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Revival [Westchester, IL, 1982], 15). 동일한 논조의 반대가 차영배 교수의 논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본인은 들었다. 그의『한국 개혁 신학의 미래』참조. 또한 J. Byun, The Holy Spirit Was Not Yet (Kampen, 1992), 105-6을 보라. (한역,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126-128. 여기에서 변종길 교수는 개핀 교수의 once-for-all이란 용어가 “모호하게 보이며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128)고 비판한다. 그러나 변 교수는 이 용어에서 “모두”를 빼고 “영단번(永單番)”이라 번역함으로써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를 강조한 개핀 교수의 생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역주)
본인이 이상의 저자들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그들의 반대는 어느 정도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의 구분을 분명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오해에 근거해 있다고 여겨진다.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위협되거나 부정된다고 그들이 여기는 것에서 그 오해를 엿볼 수 있다. 판 브럭헌에게 있어서,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한 실체” 그리고 “그의 신자들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지속적인 실체”가 바로 오순절(“성령이 부어지고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ICRC Proceedings, 1989, 200, 204.
로이드 죤스도 만일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었다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는 매우 놀라운 (본인의 생각에는, 매우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Revival, 15.
왜 이러한 분열이 생겼는가? 그들은 ‘단번에 모두’라는 표현이 의도한 것에 대해서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단번에 모두’는 ‘단번(once)’라는 말의 강세 동의어는 아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로서 현재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도 갖지 못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의 세례에서 진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살펴본 대로(행 2:32-33) 오순절과 함께 단일한 사건의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도 - 오순절은 특히 승천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에 놓인다. 즉 과거에 명백히 그리고 반복할 수 없게 일어난 것이 모든 시간이나 장소를 지나서 계속되는 실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최종성과 지속되는 효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약에서 ἅπαξ와 ἐφάπαξ를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뿐 아니라 그의 승천에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이다 (롬 6:10; 히 7:;27; 9:12, 26, 28; 10:10; 벧전 3:18; 참조. 유 4).
사실상 교회와 모든 신자 안에 성령이 ‘영구히’ 임재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의 성격 때문이다(또한 참조. 고후 1:22; 5:5; 엡 1:3-14). 오순절의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에 대한 이해가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의 19장에 특히 강조되어서 잘 나타났다. 19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가 성부의 우편으로 오르신 다음에 처음 한 일은 성령을 보내는 것이었다”(386).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이 주장을 더 다듬어서 성령 보내심의 최종성과 한정된 성격을 강조하였다. 또한 특히 Ferguson, The Holy Spirit, 79-92를 보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언약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의 세례는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신약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기를 추구하라고 명령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오히려 그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전제되어 있고(고전 12:13 Van Bruggen에 따르면, 이 세례는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여하는 성령의 활동이다(Proceedings, 1989, 201).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럽 보인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전체로 보면, 통일성과 다양성이, 즉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이 동등한 관심사임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12절의 생각을 이어 받는 13절에서는 분명히 강조점이 다양성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에 놓인다 (예를 들어, 13절에서 “한”이 세 겹으로 사용되었고 “다[모두]”가 두 번 강조되었으나 다양성에 상응하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음에 주목하라.)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의 성령의 세례 주는 활동은 이미 현존하는 실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실체(그 “한 몸”) “안으로”(into) 들어오게 된 성령의 행동을, 즉 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 행동(참조. 12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치사 εἰς의 힘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상태의 “in”과 동의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이 있는데, 13절 상반절의 세례는,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유익들 중의 하나이고 물세례로 인침을 받은 것이지만, 물세례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변종길 교수는 Holy Spirit, 107-108/『성령과 구속사』129-130에서 그렇다고 추정하였지만] 적어도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본인의 견해가 바울에게 부과된 “집합적 인간”(corporate personality)이라는 낯선 개념과 무관하다.)
), 그들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선물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성령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활동하도록 신자들에게 권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된다.
1.9 결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후기-사도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는 또한 진정으로 오순절적인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로서, 스킬더(Schilder)가 오래 전에 상기시킨 것처럼, “Niet terug naar Pinksteren!,” Om woord en kerk (C. Veenhof [ed.]; Goes, 1949) 41-43 (1920년대의 논문 시리즈에서).
교회는 (구속 역사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오순절로 돌아가자”는 향수에 젖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신 그 구호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순절로부터 전진한다......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살려주는 성령의 힘 안에서.”
2. 중단의 문제
개혁의 전통과 은사 운동을 대체로 나누고 있는 쟁점은 독특한 은사적 영성에 필수적인 성령의 어떤 은사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계속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논쟁은 예언과 방언에 집중되어 있고,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서는 좀더 덜한 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갈 것은, 논쟁점은 모든 성령적 은사가 정지되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모든 성령적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쟁점은 계시적 성격을 지닌 언어의 은사들이 계속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의 중단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창조계나 신자 안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을 부인하는 계몽주의나 이신론적 사고 방식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도 논점이 아니다 (물론 일부 중단주의자의 경우에게는 사실이겠지만). 성령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 즉 다름 아닌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 5)를 오늘날 다시 살리시는 일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인상적이며 더 기적적이고 더 철저히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자기 반성적인, 직관적-신비적인 (혹은 다른 방식으로) 능력 등, 인간의 어떤 능력을 넘어서서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롬 6:11)로 만드신다. 또한 의학으로는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참조. 약 5:14 이하) 오늘날도 고치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논점은 아니다. 논점은 병고침의 은사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게 어떤 일부의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주어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의 복잡성과 주어진 시간의 제한을 고려하여서, 오늘날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불일치, 즉 사도들이 교회의 삶에서 떠난 후에도 이 은사들, 특히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부터 믿을 만하게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일치에 한정하여 검토하겠다.
2.1 중단에 대한 반대들
상당수의 개혁주의적 저술가들이 성경에서 중단에 대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비록 정도는 다르지만, 하나나 혹은 여러 가지의 이러한 은사들이 종종 오늘날도 주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 할 수 있으면 기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예를 들면, L. Floor, Heilige Gees/Die doop met die Heilige Geest (Kampen, 1982), 179-85; W. Jonker, Die Gees van Christus (Pretoria, 1981), 228-36, 242-45; J. Maris, Geloof en Ervaring - van Wesley tot de Pinksterbeweging (Leiden, 1992), 243-50; 참조. J. Versteeg, Het gebed volgens het Nieuwe Testament (Amsterdam, 1976), 58-61.
뿐만 아니라, 좀더 주목할 만한 일은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th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가 1991년 총회에서 예언은 오늘날도 계속되며 따라서 기대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취했고, 이후 그 견해를 옹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 총회가 택한 “목회 지침서”와 그 기초를 이루는 보고서 (“말씀과 성령”)는 개혁교회 대회(Reformed Ecumenical Council)에서 발간한 Theological Forum, vol. XX/2&3 (1992년 9월), 2-48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청을 받아 그 합권된 잡지에 응답 보고서를 기고했다(49-56).
중단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일반적인 재반론은 “그것이 명백하게도 현상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 매우 기계적인 개념이다”는 것이다. “Dit is egter klaarblyklik ’n té eenvoudige ’n té meganiese voorstelling van sake” (Jonker, Die Gees, 243. 그는 또한 중단주의자의 논증은 비교적 “필사적 혹은 발작적”이다[krampagtig, 244]고 주장한다.)
그러한 “경향 신학”(streep-theologie)은 - 이러한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 사도적 교회와 후기 사도적 교회 사이에 신약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불연속성과 단절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비판되었다. 좀더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의 예언의 계속성이 정경의 충족성과 온전성을 허물게 될 것이라는 대부분의 중단주의자의 견해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반대가 제기된 점이다. 비중단주의자들은, 신약의 예언은 현존하는 성경이나 사도적 가르침과 동등하지 않고 더 낮은 (구속력이 없고, 혹시 오류의 가능성도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중단주의자들이 거짓되고 전적으로 불필요한 딜레마를 만든 잘못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반대들에 대해 본인은 역순으로 응답하겠다.
2.2 신약 예언에 관한 낮은 견해
예언이 더 낮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열거하는 수준에서 비판하겠다. Floor를 제외하고서는, 각주 40에 인용된 저자들은 이 견해를 논증하기보다는 (다소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특히 W. Grudem의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Westchester, IL, 1988)과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1994), 1049-61(참조. 1031-43)에 나타난 그의 포괄적인 논증에 대해서 응답을 하겠다. Grudem의 논증은 Floor와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의 보고서와 중복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D. Carson, Showing the Spirit (Grand Rapids, 1987), 91-100; R. Clements, Word and Spirit. The Bible and the Gift of Prophecy Today (Leicester, 1986). Norris Wilson이 1993년 본 대회에서 읽은 논문에서 (Proceedings, 116-135) Grudem의 견해에 가한 광범위한 비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개진하는 필자의 반대는 근본적으로 그의 주장과 동일하다. 최근의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반론으로 특히 다음을 보라. G. Knight, III,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Dallas, 1988), O. Robertson, The Final Word (Edinburgh, 1993), 그리고 R. S. Ward, Bles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 (Melbourne, 1997), 60-67, 81-87.
만일 예언이 설교에 상당하는 것이라면, 예언이 오늘날도 계속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이렇게 주장되는 예언에 대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2-14장과 에베소서 4장의 구절들에서 신약의 (계시적) 은사로 고려되지 않고 있음이 매우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말하는데, 예언이 설교라면, 오늘날 종종 예언이라고 불리는 것, 즉 교회의 현재적 필요와 상황에 관해서 성경적 진리를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무의식적이고, 다소간 생각할 필요 없이 성령의 충동에 의해 얻게 된 통찰력에 대해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예언에 관한 낮은 견해는 사도 바울이 포괄적인 전망 아래서(엡 2:11 이하) 서술하고 있는 에베소서 2:20과 3:5을 적절히 해석하지 못한다. 이 구절들에서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그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 승귀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지는 (하나의) 교회-건물의 기초로 묘사되고 있다. 2:20과 3:5에서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라 신약의 선지자를 고려하고 있으며, 사도들에게와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는 구속 역사의 실현된 종말론적 종착점의 관점에서 고려한 것이다. 2:11 이하의 근접 문맥의 관심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통일성/계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새로운 것, 즉 이방인이 유대인과 함께 교회에 들어온 것에 있다. 이 견해는 해석학적으로 심각한 질문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면, Grudem, Gift of Prophecy, 89-92, 필자의 책, Perspectives on Pentecost, 93/『성령은사론』, 108, 그리고 최근의 주석가들과 단행본의 거의 실제적인 합의의 대표로서 A.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2 (Dallas, 1990), 153을 보라. 필자의 판단으로는, J. Roberts, Die opbou van die kerk (Groningen, 1963), 122-129의 반대 논증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Grudem은 여기에서 “선지자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라고 길게 논증하였다 (“사도-선지자들,” “동시에 선지자인 사도들,” Gift of Prophecy, pp. 45-63).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것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특히 D. Wallace, "The Semantic Range of the Article-Noun-Kai-Noun Plural Construction in the New Testament," Grace Theological Journal, 4.1 (1983), 59-84를 보라. 또한 이것은 문맥에서도 그렇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교회를 세우는 관심의) 관련된 문맥에서 다음 번으로 선지자를 언급하는 곳이 4:11인데, 여기에서 그는 선지자를 사도와 명백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4:11; 참조. 고전 12:26).
사도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를 놓은 (한시적인) 시대에 속해 있지 그 이후의 상부 구조의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기초적인 역할은 사도들과 함께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기초적이고 ‘단번에 모두’인 구원에 대한 기초적이고 ‘단번에 모두’인 계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참조. 고전 3:11). 엡 2:20은 종국적으로 나타날 완성된 신약 정경의 계시적 모형(母型, revelatory matrix)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둘째, 신약에 나타난 두 군데의 명백한 비(非) 사도적 예언의 경우는 - 사도행전 11:28과 21:10-11의 아가보의 예언들 - 그것이 구속력이 없고/없거나 오류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한 예로, Grudem은 아가보가 나중의 경우에는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작은) 실수를 한 것을 들어 고발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Gift of Prophecy, 96-102; Systematic Theology 1052-53; 또한 Carson, Showing the Spirit, 97-98을 보라.) 대체로 이 시도는 아가보에게 부과된 현학적인 엄밀함의 요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해서 J. Hiller가 적절히 지적하였다, “만일 어떤 판단이 충분히 엄밀하다면, 구약 예언에서도 유사한 ‘오류들’을 찾아낼 수 있다” ("Diversity of OT Prophetic Phenomena and NT Prophec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6 [1994], 256). 여기에서 필자는 사도행전 21:11-14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뿐 아니라 비유대인도 포함하는 복음의 세계적이고 근본적이고 사도적인 전파라는 누가의 전반적인 서술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한 가지만을 덧붙이겠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가보의 예언을 포함해서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일은 전에 두로에서 바울에게 말하여지고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된 병행 구절을 - 4절.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기를 권한 것을 - 좀더 상세히 서술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견해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응답으로는 Perspectives on Pentecost, 65-67/『성령은사론』, 75-78을 보라.
두 경우 모두 바울 자신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사역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면서 포괄적으로 진술한 진리를 차례로 밝혀 준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3). 두 경우에서 모두 제자들이 - 아마 아가보 자신과 다른 예언한 사람들 - 바울을 단념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이 결코 예언된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무오한 진리라는 것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설혹 아가보가 실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누가에게는 명백히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누가가 이 사건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로 전파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의 포괄적인 목적에 맞는 것으로 기록했지 그 이외의 것으로서 기록했다는 암시는 없다. 아가보가 말한 것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한 것”이다(참조. 예를 들면, 계 2:7).
반대로 아가보가 하나님의 영감(靈感)된 말씀 이외의 다른 것을 말했다는 암시가 이 구절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상, 예언에 관한 낮은 권위의 견해는 그것을 지지하는 예를 신약에서 하나도 제시할 수 없다.
셋째, (비사도적) 예언이 낮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증거로 종종 인용되는 몇몇 구절에 대해서 간략한 평을 하겠다.
고린도전서 14:29는 낮은 권위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데, 여기에서 예언을 지칭하는 동사(διακρίνω)는 매우 넓은 의미론의 영역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특정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평가하다,” “시험하다,” “판단하다,” “무게를 달다”). 예언된 것이 “분변[시험]”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에 오류가 있거나 혹은 낮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할 만한 용례를 바울에게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베뢰아 사람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시험]하므로” 그들이 칭찬을 받은 것에 주목하라(행 17:11). 그 시험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 완전하고 무오한 사도적 권위를 갖지 못함을 의미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언을 시험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영감된 권위보다도 낮고 덜한 권위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사도행전 17:11의 “상고[시험]하다”(ἀνακρίνω)라는 동사와 같은 어원의 “분변[시험]하다”(διακρίνω)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의미론적 중복, 즉 그 용례의 모든 영역에서 중복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21의 “헤아려[시험하여]”(δοκιμάζω)의 용례도 포함하는 그 중복은 J. Louw와 E.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1988), 331-32, 363-64 (특히 항목 27.44-45, 30.108-09)의 의미론 영역 분석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36 상반절이 예언의 낮은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는 바울의 질문은 특별히 선지자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의 교회에 관계하여(33절 하반절) 고린도에 있는 교회 전체에게 던져진 질문임이 거의 확실하다. 36절 하반절과 함께 이것은 “신랄한 수사학”이다. Fee, First Corinthians, 710.
이것은 “진리가 너희에게서 시작되고 너희에게서 끝났느냐?” “너희가 복음에서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복음의 함축도 가지고 있느냐?” 고 반문하는 의취를 가지고 있다.
37-38절의 바울의 선지자들에 대한 엄격한 명령도 그들의 낮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11-14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날카롭게 책망을 했다고 해서 베드로가 그의 사도직을 정당하게 행사할 때 완전하고 무오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 구절을 둘러싼) 논쟁점은 예언의 ‘내용’과 그 상대적 권위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예언을 하는 자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0(“예언을 멸시치 말고”)는, 단지 고린도후서 10:10에서 바울이 같은 동사를 그의 대적자들의 ‘바울의’ 설교를 “경멸할 가치도 없는”(New English Bible. “말이 시원치 않다.” 한글 개역) 이라고 악평을 할 때 사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그 자체로서는 큰 무게를 갖지 못한다. 이 단어가 그의 편지와 구별되어 그의 말하는 형식적인 측면(그의 스타일)에 적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에서 또한 ‘내용’에 대한 경멸적 생각을 따로 떼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넷째, 고린도전서 12:28은 예언에 대한 낮은 권위의 관점을 엄청난 어려움과 함께 제시한다. 여기에서 순서가 표현되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이 순서는 가치 혹은 유용성과 관련된다는 것은 대체로 일치된 해석이다. 예를 들면, Fee, Empowering Presence, 190; Grudem, Gift of Prophecy, 69.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낮은 권위의 견해는 다음의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즉 교회에서, 항상 유오하다는 평가를 받고 따라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예언이 하나님의 명백하고 권위가 있고 무오한 말씀에 기초한 가르침보다 더 유용하고 더 잘 세울 수 있는가! 예언이 그러한 가르침보다 우위를 차지하는가! 이것은 그들이 명백히 원하지 않았고 받아들이기 원치 않았던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서 어떻게 이 결론을 피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낮은 권위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날 일어나거나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예언은 항상 성경에 복속되며 성경으로 시험되어서, 그것의 손상되지 않은 충족성과 권위가 위협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시험이 시행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신약에서의 예언(예를 들면, 아가보), 그리고 오늘날 일어난다고 예상되는 예언은 종종 구체적이어서 현재의 성경으로 쉽게 평가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꿈에서 본 것을 토대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정한 행동을 강요하였을 경우, 이것은 그 제시된 행동이 성경의 계명을 어기는 것인가를 제외하고는 성경으로 판단될 수 없다. 그 이외의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렌지”로 “사과”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이다. 꿈에 구체적이고 독특한 (그리고 열심히 추구하였던) “계시적” 중요성과 매력을 부여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서 성경은 그 본질상 침묵을 지킨다. 더 나아가서, 해석하는 것 이외에도 항상 질문할 수도 있고 질문에 열려져 있는 성경(과 일반 계시)와 달리, 이러한 견해에서는 근본적 계시에 접근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어떤 예언하는 사람의 유오한 이야기/“해석”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비효율적”인 방법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처럼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는가? 만일 필자가 놓치지 않았다면, 이 질문은 이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제기하지 않은 질문이다.
아무리 주의 깊게 규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견해는 특히 실제적이고 절박한 삶의 문제에서 우리의 주의를 성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2.3 계시의 유기적 성격
중단주의자의 견해가 “매우 기계적”이기는커녕, 본인의 생각에는, 오늘날도 예언이 계속되거나 적어도 원칙상 계속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약 정경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서, 따라서 신약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 매우 추상적이고 매우 비(非)유기적(inorganic) 개념을 갖고 있다. 이 견해는 신약에 서술된 예언 활동이 일의 성격상 (우리의 27권의 정경에 관하여서는) “열려진 정경”(open canon)의 상황에서, 다른 말로 하면, 신약의 문서들이 아직 기록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기초적이고 사도적인 시대에서 교회를 위한 “정경”(=하나님의 말씀이 발견되는 곳)은 유동적이고 전개되는 실체였으며,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완결된 구약;
2) 기록이 되어서 그 당시 돌려 읽히다가 종국적으로 신약으로 남겨진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다른 영감된 문서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5:9의 “전에 쓴 편지[너희에게 쓴 것. 한글 개역]”);
3)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음성.
도전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는, ‘형식적’ 원칙으로서,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헌신하지 못하였고, 할 수도 없었다. 그 교회는 계시와 권위에 있어서 “성경 더하기”(Scripture plus) 원칙으로 살았다.
요즈음의 예언을 성경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와 분명한 소원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비중단주의자의 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시대착오적으로 고대 교회의 열린 정경의 상황으로 데리고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사도권의 통제나 고린도전서 12:10에 언급된 동반하는 은사, 즉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무오하게 분별하는 기능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한 그 은사의 통제 없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는, 본인으로서는 다르게 보기가 매우 힘든데, 오늘날 교회의 생활에서 (성경에 기록된) 특별/구속 계시도 일반 계시도 아닌 다른 계시에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들에 의해 확언된 것은 두 계시를 넘어서는 제3의 계시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미 계시된 진리를 오늘날을 위해 조명한다는 의미에서의 “계시”를 넘어선 것이고, 그러면 여기에서의 논점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을 “계시”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신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인가?
성령에 의해 촉발되어 현대의 상황이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빛에 비취어 사색하며 기도로 씨름하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특히 성령의 인도에 관한 한, 성경을 넘어서서 기능하는 부가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그들은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피할 수 없이 그 대가로 어느 정도의 성경의 불충족성을 함축하게 되었다. 필자의 관심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입장은 로마서 8:14와 베드로후서 1:21의 진리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흐리게 만든다. 즉 로마서 8:14에서의 성신의 “인도”는 단지 일부의 신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특권이지만, 베드로후서 1:21에서의 ‘감동’은 오래 전에 종식된 일부 신자의 특별한, 계시적, 구원-역사적 역할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들에게서는 이 차이가 흐릿해졌다. 성경을 우리 자신과 다른 피조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안경으로 비유한 칼빈의 고전적인 예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예컨대,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1960], 1:6:1 [vol. 1, 70]; 1:14:1 [160]), 이 견해에서는 예언이 시야를 더 선명하게 해주는 부가적인 렌즈이다. 이 렌즈는 성경-렌즈를 잠시 동안 더 명확하게 해주기도 하고, 혹은 때에 따라서 대체하기도 한다. 오늘날 예언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비취어 보면, 이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견해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듯이, 두 가지 궤도로,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해서 공적이고 정경적이고 무오하며 완결된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개인들과 개인적인 모임을 위해서 사적이고 유오하며 계속되는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이 사실을 단언하는 수준에서 이야기하지만, 언약-역사의 기록으로서의 성경의 구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특히 금세기에 우리는 성경이 조직신학 교과서나 윤리학의 지침이 아니라(적어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주되는 경향성이 오래 지속되었지만), 구속-역사적 혹은 언약-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 성경은 “교의학 교과서가 아니라 극적(dramatic) 관심이 가득한 역사책이다.” G.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1948), 26/『성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34; “계시의 전(全) 계통은 학교가 아니라 ‘언약’이다” (17/『성경신학』, 25).
그러나 또한 지금까지 되어졌던 것보다 훨씬 더 다음의 사실, 즉 구속-역사적 원칙이 계시의 ‘내용’뿐 아니라 계시를 ‘주는 것’에도 적용되어야 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또한번 ‘구원의 역사-구원의 서정’의 구분이 중요함이 드러난다. 계시의 말씀은 그것의 지속적인 적용에서가 아니라 ‘단번에 모두’ 성취라는 의미에서 구속의 행위에 매여 있다. 특히 Vos, Biblical Theology, 14-17/『성경신학』, 21-25의 논평을 보라. “계시는 구속과 긴밀히 교직(交織)되어 있어서 후자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면 공중에 매달린 것이 될 것이다” (24/『성경신학』, 31).
후자(구속)의 완성과 더불어서 전자(계시)도 종식되었다.
2.4 성령의 사역
끝으로, 성령에 대한 건전한 신학이라면 어떤 여지, 설명되지 않은 여백, 신비의 영역이 있을 것임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다. 적어도 본인이 주장하고 변호하려는 중단주의 입장은 모든 것을 매끈하고 귀여운 조그마한 상자에 집어넣으려는 합리주의적인 충동에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3:8 상반절의 진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바람과 같아서 궁극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 이것은 우리 시대에서 점점 큰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 “성령의 변덕”과 같은 종류의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즉 성령께서 지금 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서, 기대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통상적이지 않은 것에 몰두해서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주권 가운데서 성령은 대체로 성경에 나타난 유형에 따라서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고 오늘날 하시는 일을 구성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필요가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유형들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성령의 활동에서 진정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대로, 즉 ‘기대하지 않고,’ 좀더 중요하게도, ‘추구하지 않게’ 남아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대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만큼 예견할 수 없는 것이 되지 못한다.
신약은 오늘날도 예언을 열려 있고 살아 있는 가능성, 그러나 단지 선택적인 가능성으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요점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언에 대한 어떠한 선택적인 것도 혹은 단지 가능한 것도 신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언은 교회의 ‘질서’와 생활에서 정상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위해서 모일 때 거기에 예언의 발생과 관련된 비일상적인 것은 없었다. 즉 예언은 그들의 예배에서 기대되는 요소였다(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14).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도, 예언은 필수적인 것이어서 추구해야 할 것이든지(고전 14:39), 아니면 중단되었든지 할 것이다. 아마 좀더 “온건한” 다른 선택을 허용하는 것은 단지 교회를 혼잡하게 할 뿐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불건전한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중단주의의 관점은 “성령을 상자에 가두려고” 노력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이전까지의 현 시기 동안에는 성령이 성경에 따라서 주권적으로 자신을 “상자 안에 두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상자”의 차원들을 우리는 최소화해서는 안된다. 그 차원들은 광범위하고 자유케 하며, 실로 경외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차원들은 고정되었다. 이것은 특히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불가피하게 두 전선으로 나가게, 즉 한편으로는 로마의 전통의 원칙과 다른 편으로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급진 종교개혁과 맞닿뜨리게 하였다. 두 전선에서 종교개혁은 위협당한다고 간주되던 것, 즉 말씀과 성령의 불가분리성(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 Spiritus cum verbo), 성령의 사역과 정경화된 말씀 사이의 나눌 수 없는 관계를 선언하였다.
그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종교개혁의 힘을 무너뜨릴 잠재력을 갖고 있다. 성령의 이름으로, 어떤 이들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실질적으로 동등하게 놓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성경을 떠난 새로운 계시와 인도를 주장한다. 어떠한 것도 성경과 ‘동등’이 되거나 성경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은 여전히 중대한 문제이다. 이것에 대해서 자신과 은사 운동에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개혁교회들(Reformed Churches)이
리챠드 개핀 박사**)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3578
이 논문은 1997년 10월 15일-23일까지 서울 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4차 국제개혁교회대회(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에서 발표된 것이다. 발표자 리챠드 개핀(Richard B. Gaffin, Jr)은 미국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대표로 참석했으며, 현재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주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번역 대본은,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1997 (Albert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7), pp. 162-183.
발표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은사 운동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특히 은사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생활과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 그렇기 때문에 도전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검토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 대회(conference)에서 새로운 안건은 아니다. 전에도 성령으로의 세례(Langley 1989, J. van Bruggen 교수)와 신약의 예언(Zwolle 1993, N. Wilson 교수)에 관한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ICRC Proceedings, 1989, Winnipeg, 1989, 186-205; ICRC Proceedings, 1993, Neerlandia, 1993, 116-135.
우리가 논의할 주제는 대체로 두 부분으로 집약된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2) 성령의 어떤 은사들의 중단에 관한 문제.
이 자리에서 두 영역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선택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개혁 교회들의 대회로 모인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여기에는 은사 운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개혁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들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본인은 이어지는 토론에서 이 발표의 불균형이 시정되기를 기대한다. 말을 명료히 하기 위해서, 본인은 “은사 운동”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즉 오순절주의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비(非) 오순절 은사주의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함을 밝힌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기독교인들
1.1 오순절은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신약의 모든 구절은 사실상 오순절을 지향하거나 회고한다. 따라서 그때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그 사건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1:5), “성령의 임함”(1:8), “성령의 부어 주심”(2:33), “성령의 선물”(2:38) 등이 다양하게 또한 서로 바꿔 쓸 수 있게 기록되었고, 본인도 그리하겠다.
하는 것은 크고도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바른 대답을 내는 것은 사실상,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는 한 가지 근본적 구분을 인식하고 그 구분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을 위해 ‘단번에 모두’(once-for-all) 성취된 구원과 죄인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구원을 구분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과 하나님의 백성이 지속적으로 그 은택을 받아 누리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바른 대답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적 구분을 여기에서 도입하면서, 본인은 또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 물론 그 구분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함을 밝힌다. 여기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중생과 회심과 칭의,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는 성화가 포함될 뿐 아니라, 신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는 성령의 은사와 힘주심도 구원의 서정에 포함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경험과 공동의(corporate) 경험을 모두 포함한다.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정당하고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에 위치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순절의 중요성은 일차적으로 구원 역사적이며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 두 측면을 양극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 이에 대해서는 후론할 것이다 -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의 요점은,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개인으로든 공동으로든성령을 특정하게 경험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1.2 “주”와 “영”[성령]의 관계의 중요성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주(Kurios)와 영(Pneuma)의 관계를 정당하게 알 때에야 비로소 바르게 될 수 있다”고 펠러마(W. V. Velema)는 주장했다. De leer van de Heilige Geest bij Abraham Kuyper ('s Gravenhage, 1957), 246: "Een gereformeerde pneumatologie zal alleen dan zuiver kunnen zijn, wanneer ze het verband tussen Kurios en Pueuman goed ziet." L. Floor (Hy wat met die Heilige Gees doop [Pretoria, 1979]의 표지 다음 면에서 재인용했음.
이 진술의 참됨, 추축(樞軸)과 같은 진실성은 더 이상 과장하기 어렵다. 이제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영[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관계를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진술은 특히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이 놓인 곳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그 관계가 적절히 인식되지 않고, 그에 따른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적절히 평가되지 않는다면,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한 지속적인 오해가 은사 운동의 독특한 강조점들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관한 유사한 오해들 혹은 적어도 비슷하게 부적절한 이해가 몇몇 개혁주의적 모임이나 장로교 모임을 포함한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다른 논의에 앞서서,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오순절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야 할 것이다.
1.3 고린도전서 15:45
신약 전체에서 이 관계에 대한 다소 난해한, 그러나 매우 놀랄만한 핵심적 선언은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확언은 바울의 기독론과 성령론에 핵심적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 오순절과 그 중요성에 대한 한 문장의 주석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한 주해가 필요하겠으나 그 방향의 노력은 각주에서 제시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다음의 몇몇 요점만 살펴보겠다.
1) 고린도전서 15:45의 영(Πνεύμα)은 한정적이며, 성령을 가리킨다. 바울은 성령 이외의 다른 “살려주는” 분을 알지 못한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다양한 교파의 주석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지만, 개혁주의 진영에서 이러한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H.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Grand Rapids, 1956), 387/Magnalia Dei (Kampen, 1931), 369; R.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Phillipsburg, NJ, 1987/1978), 78-92; J.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1959), 1:11;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1975), 88, 222-3, 225, 539/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 (Kampen, 1966), 90, 243, 247, 602; J. Versteeg, Christus en de Geest (Kampen, 1971), 특히 43-67; G. Vos, The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1930), 10, 168-69, 184, 312/『바울의 종말론』(엠마오, 1989), 25-26, 242-44, 263, 424.
고린도전서 15:45의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는 결론은 중복되면서 서로 강화하는 몇몇 고려에 근거한 것인데, 필자에게는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a) 45절의 영(πνεύμα)과 신령한(πνευματικόν, 44a, b, 46절)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와 형용사이다. 형용사 πνευματικόν은, 특히 본문처럼 육적(ψυχικόν, 혹은 “육의”)과 대립되는 쌍으로 쓰일 때, 다른 신약에서 한 번만 더 나오는 이 대립(고전 2:14-15)의 빛에 비취어볼 때, 성령의 사역과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을 가리킨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형용사를 일관되게 사용한 것에 의해서도 더 분명히 확정된다(예를 들면, 롬 1:11; 엡 1:3; 골 1:9). 그런데 에베소서 6:12는 유일한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전서 2:6-16에서는 성령의 활동, 즉 하나님의 계시된 지혜를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이고 독점적인 사역이 근접 문맥의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불신자(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 육에 속한 사람, 14절)에 대비하여, 신령한 자(ὁ πνευματικός, 15절)는 성령에 의해 내주(內住)와 조명과 동기 부여와 지도를 받는 신자이다(4-5절). 이 구절을 삼분법적 인간론의 근거로 삼으려는 오래된 노력은, 특히 여기에서 πνευματικός를 절정에 도달한 인간 영혼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J.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2 (Edinburgh, 1977) 23-33, 특히 23-9를 보라.
b) 45절 후반부의 분사 수식어도 동일한 결론을 가리킨다. 마지막 아담은 단지 “영”(πνεύμα)이 된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πνεύμα ζῳοποιούν)이 되었다. 살려준다는 이 동사에 대한 바울의 다른 용례는 결정적인데, 특히 고린도후서 3:6의 총괄적인 선언에서 그리하다: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영”(τὸ πνεύμα)은 3절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주석가는 거의 없다. 또한 로마서 8:11에서도 고린도전서 15장 구절과 비슷하게 진술하여, 신자의 몸을 일으키는 “살려주는” 사역을 성령에게 돌린다(참조. 요 6:63).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표준적인 영어 번역은 πνεύμα(성령)을 소문자 에스(s)로 시작하는 영(spirit)으로 번역하여 45절의 뜻을 적어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외로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Spirit”으로 정당하게 번역한 The Living Bible(이제 새로 바뀌어 The Living Translation으로 출간되었다)과 Today's English Version이 있을 뿐이다. 비록 샅샅이 조사한 것은 아니고 개략적으로 한 것이지만,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별되는 언어 - 화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어(Afrikaans),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 의 번역들에도 동일한 애매성이 노정된다. 본인이 찾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예외는 Die Bybel (Kaapstad: Verenigde Protestantse Uitgewers, 1959)였다.
2) “살려주는 영[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시간적 서술이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분으로 “되었다.” 이렇게 “됨”의 시점은 그의 부활, 혹은 좀더 넓게 그의 높아지심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논증의 흐름은 이점을 매우 명확히 드러낸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말하자면, 그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 때문에, 혹은 그의 부활을 제외한 다른 고려 때문에 “살려주는 분”이 되셨다면, 바울이 15장에서 하듯이 신자의 부활을 논증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거나 근본적이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기에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장에 나오는 핵심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부활-추수’의 “첫 열매”(20, 23절)로서 그는 “살려주는 영[성령]”(45절)이며, “살려주는 영[성령]”으로서 그는 “첫 열매”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마지막 아담은 승천하셨다. “둘째 사람”으로서 그는 이제 그의 승천 때문에 “하늘로부터” 나셨고(47절), 근접 문맥을 살펴보면 이 전치사구는 거의 확실하게 높아지심에 대한 서술어이지 기원에 관한 서술은, 즉 이전 존재로부터 성육신 하신 것에 대한 서술은 아닌 것이다. 하늘에서 나신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서(47, 48절), 그는 신자들(하늘에 속한 자들, 48절)이 그의 형상을 입을 자인 것이다. 신자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할 때 그의 형상을 완전히 입게 될 것이다(49절, 참고. 빌 3:20-21).
“하늘에 속한 자”(48절)이시다. 이 모든 것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된 마지막 아담은 바로 ‘승귀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다.
3) 근접 문맥에서(42-49절), “살려주는”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행동, 즉 그가 신자의 죽을 몸을 일으킬 것(22절)을 예기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현재’의 사역도 또한 여기에 암시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의 부활의 생명은 미래의 일일 뿐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예를 들면, 갈 2:20; 골 2:12-13; 3:1-4). 부활하신 자로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의 종말론적이고 부활시키시는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바로 여기에 오순절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고려가 놓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하겠다.
4) 그렇다면, 부활/승귀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중대하고도 획시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이 고려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극적으로 변화된 것과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양자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동일시, 혹은 하나됨의 결과를 가져왔다. 바빙크가 이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성령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property)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었으며,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동질화된 것이다 [...als het ware door Christus in zichzelven opgenomen].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었다” (Our Reasonable Faith, 387/Magnalia Dei, 369).
이것은 이전에도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함께 사역했음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 이전에도, 심지어 옛 언약 아래에서도 이미 전(前) 성육신의 그리스도(Christ preincarnate)와 성령이 공동으로 함께 하면서 사역하였다. 고린도전서 10:3-4는, 이 구절에 대한 주해가 어떻든지간에 그 사실을 가리킨다. 참조. 베드로전서 1:10에서는 구약 선지자들 안에서 포괄적으로 사역하였던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특별히 지칭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그들의 연합 활동에 안정되고 완성된 근거가 구속의 역사 안에서 부여되었다. 결국 그러한 사역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또한 명확하게 성취하신 사역에 영화로운 관을 씌우는 결과인 것이다. 이 완성된 관계를 포착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 살리는 영[성령]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하나됨 혹은 연합은, 비록 포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면에 제한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연합은 그들의 활동, 즉 부활의 (=종말론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에 관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연합은 “기능적”(functional) 혹은 과거의 신학적 범주를 사용하면, (“존재론적”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진정한 인간성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 의해 경험된 실제적인 변화/변형이 관련되기는 한다.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 즉 ‘영광스러운’ 인간성을 그는 이제 소유하게 되었다(참조. 고후 13:4).
것이 아니라) “경륜적”(economic)이고, 혹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삼위일체의 제2위와 제3위의 구분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바울의 논증의 범위와 구속 역사적 초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본질적-영원적, 본체론적-삼위일체적 관계는 여기에서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게)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이 ‘되었는가,’ 역사 안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도 특히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즉 그의 진정한 인간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역사 비평학의 전통이 오랫동안 특징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여기에서 “기능론적” 기독론을 찾으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다. “기능론적”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차이를 부인하고, 따라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과 어긋난다. (성부) 하나님, 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한) 영을 나란히 위격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 이것이 후대의 교리적 공식의 기초를 놓는 것인데 - 바울에게서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전 12:4-6; 고후 13:13; 엡 4:4-6). 특히 최근의 문헌에서는 G.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MA, 1994), 825-45, 특히 839-42를 참조할 것. 그는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훌륭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삼위일체론적 개념이 지금의 논점은 아니지만, 고린도전서 15:45의 해석에 대한 정당한 전제가 된다.
5)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은 고린도후서 3:17의 상반절에서 이어지는 바울의 진술과 밀접히 연결된다: “주는 영이시니.” 여기에서 “주”(ὁ κύριος)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시가 지지된다. 이것은 또한 각주 4에서 인용된 다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점점 더 많은 수의 주석가들이 17절 상반절의 “주”는 16절에 인용된 출애굽기 34:34을 성령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래서 17절 하반절에서 18절까지의 기독론적 언급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삭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 L. Belleville, Reflections of Glory (Sheffield, 1991), 256ff.; J. Dunn, "2 Corinthians III.17 - 'The Lord Is the Spiri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31/2 (Oct. 1970), 309-20; Fee, Empowering Presence, 311-14; S. Hafemann, Paul, Moses, and the History of Israel (Tübingen, 1995), 396-400; R.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 of Paul (New Haven, 1989), 143-4; N.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Edinburgh, 1991), 183-84. 그러나 17절 하반절은 이미 “주의 영”이라고 하면서 “영”과 “주”를 구분한다. 따라서 바로 이어지는 18절에 비취어 보면, “주”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다. 18절에서 “주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구분되는 성령의 영광은 확실히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보면서, 혹은 깊이 묵상하면서, 신자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감을 바울은 계속하여 가르치는데, 그 형상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계속되는 구절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말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가르치는 4:4은 그 결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또한 로마서 8:29와 고린도전서 15:49도 주목하라). 바울이 알았던 바, 신자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볼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영광은, 확실히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또한 그들 안에 전달된 “그리스도의 얼굴에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4:6)인 것이다.
여기에서 본질적이고 삼위일체적인 정체성과 관계성이 부인되거나 흐릿해지지는 않지만, 사실 그것은 바울의 고려 밖에 있다. 근접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특히 18절을 보라) 성령과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연합 활동이 바울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3:17의 “주는 영이시니”의 “이시니”(ἐστίν)는 고린도전서 15:45의 “되었다”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승귀는 성령과의 새롭고 전례가 없는 친밀한 (활동적) 관계를 낳았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여기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생명(the resurrection life)과 유사한 상관어인 (종말론적) “자유”(3:17 하반절)를 주는 사역에서 하나이다. 그 상관 관계는 특히 로마서 8:2의 표현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4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상관 관계
그리스도의 승귀에 근거한 이 동일시가 바울이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닌,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로마서 8:9-10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짧은 구절이지만, “너희가 영에 있고”(9a), “영이 ...... 너희 안에”(9b), “그리스도에 속한”(9d, 한글 개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번역되었음. 빈번히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실질상 동의어이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10a) 등이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경우의 조합인 셈인데, 이러한 표현들이 각기 다른 경험을 서술할 리는 없는 것이고, 동일한 실체의 여러 차원들을 모두 묘사한 것이다. 동시에 성령과의 교제가 아닌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소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이러한 일치는 소 자의적인 신적 합의(divine arrangement) 때문은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경험보다 진실로 ‘우선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경험 안에 있는 것 때문이다. 즉 성령이 이제 “그리스도의 영”(9c)이고, 그리스도가 이제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구별을 부인하고 절대적인 동일성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뒤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신자들 안에서의 성령의 중보 기도는(26-27절)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와(34절) 구별된다.
다른 곳에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는 것”이다(엡 3:16-17).
1.5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성령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의 교훈에서 볼 수 있는 강조점과 연결되고, 뿐만 아니라 강화한다. 요한복음 14:12 이하에서 예수님의 임박한 떠남과 승천은 -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12절. 참조. 20:17) - 승천하신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 성부 하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수반한다. 이 구절들에서 “너희”는 시간과 장소의 구별이 없이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예수]와 함께 있었던”(15:27)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지금” 그가 “아직도” 그들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감당치 못할” 자들이었다(16:12).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이루셨고(20:22), 그 보냄을 통하여 만대의 교회에 보내셨다.
(16절) 참조. 26절: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이러한 과정은 이미 앞의 7:39에서 암시되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성령의 임재 이전과 이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축으로 결정된다. 즉 전자는 후자의 함수(function)이다(참조. 7:39). 오순절은 “요한복음의 오순절”(20:22)과 사도행전 2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룰 수 없겠다. 본인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1979), 39-41/『성령은사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44-48를 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는 것은(14:16-17) 그와 함께 다른 약속을 수행한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기를(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문맥에서 이 말씀은, 지금 고려하는 성령의 오심은 그 자체로 예수의 친히 오심을 포함함을 분명히 의미하고 있다. 예수의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익”이다(16:7). 왜냐하면 이어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또한 예수께서 친히 다시 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육체적) 가심은 그의 (성령의 인격 안에서) 오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그 대신으로 그의 짧고 일시적인 부활 후의 나타남은 이 오심에 적합하지 못할 것이다. 근접 문맥에서(17-23절) 이 오심은 세상과 구별되어서 신자들 안에/에게/함께 하는 성령(과 아버지, 23절)의 내주/나타남/임재의 임박함(“조금 있으면” 19절)과 적어도 밀접히 연합되어 있다(비록 동일시는 아니지만).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성령”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의 안건은 없다.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16:13-14는 특별히 이 점을 지적한다). 성령은 실로 철저히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현존은 대리적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그러한 분으로서 우주적인 권위와 능력(ἐξουσία)이 “주어진” 즉 이러한 능력이 전에는 없었으나 부활의 결과로 이제 주어졌다는 것이다.
후, 잘 알려진 대위임령의 말씀에서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 선언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확언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오순절과 그 결과가 지속될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읽은 것이다. 또 다시,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즉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만일 오순절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높아지신 예수가 여기에, 즉 그의 교회와 영원히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유사한 강조점을 인식하는 것이 누가복음-사도행전을 바울 (혹은 요한) 신학으로 부적절하게 읽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복음서 끝 부분(24:44 이하)과 사도행전 처음 부분(1:3-11)이 중복되는 것은 승천 전의 40일 중간 기간 동안 부활하신 예수께서 구약을 가지고(눅 24:44-47) 사도들을 가르쳤음을(행 1:2)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즉 자신에 관한 최근의 사건이나 곧 일어날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획시대적이고 결정적인 국면임을(참조. 특히 행 1:3)을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가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는 것/성령으로의 세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한 절정의 사건이며,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적 구원 사역에 근본적인 것인 것이다.
베드로는 이 핵심을 - 사실상 주된 강조점인데 - (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의 오순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화하였다. 예수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특별히 부활에 초점을 맞춘 후(22-31절), 베드로는 사도행전 2:32-33에서 이러한 것들을 차례로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부활 - 승천 - 성령을 받음 이 받음은 누가가 앞에서 서술한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즉 예수는 이미 요단에서 성령을 받았고(눅 3:22) 심지어 수태될 때에도 받으셨다(1:35). 여기에서는 승천에서 (또한 그 반영으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서) 극적으로 실현된 단계의 원칙, 혹은 승귀의 원칙이 연관되어 있다.
- 성령을 부어주심. 마지막 사건인 오순절은 다른 사건들과 대등하게 놓여 있고, 특히 친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은 이 순서에서 정점에 있고 최종적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다른 사건들처럼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아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부활 - 승천 - 오순절’은 사건들이 연합된 하나의 복합체(a unified complex of events), 즉 ‘단번에 모두’의 구속 역사적 통일체를 구성하며, 그렇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것과 함께 주어졌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큰 원을 돌아 사실상 고린도전서 15:45에 다시 돌아왔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서술한 순서를 바울 사도는 압축하여 표현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
1.6 구원의 역사의 부분으로서의 오순절
오순절은 한 사건인데, 구원의 역사에서 한 필수적인 사건이며, 구원의 서정에서의 한 측면이 아니다. 따라서 오순절의 자리는 ‘단번에 모두’ 완전히 성취된 구속에 있으며, 그것의 계속적인 적용에 있지 않고, 또한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해야 할 패러다임은 아니다. 은사 운동이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예를 들면, J. Williams, Renewal Theology (Grand Rapids, 1990), 2: 177, 189, 특히 205-7을 보라.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을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들과 달리 경험하는 능력, 혹은 죄사함으로 이해된 구원 그 “이후” 경험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하게 부적절하다. 그러한 평가는 사실상 오순절을 너무 높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낮추는 것이다. 오순절에 관한 한 “두번째 순서” 혹은 “보충적인 것” 혹은 “부가된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오순절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마침표. 왜 그런가? 오순절이 증거하는 것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반복될 수 없는 결정적인 사역은 미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앞에 놓인 과업은 죄 사함을 획득하는 것뿐 아니고, 좀더 궁극적으로는 그의 구속 사역의 주요한 결과로서 또한 생명을(예를 들면, 요 10:10; 딤후 1:10),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 다른 말로 표현하여 성령 안에서의 삶을 바울이 성령을 “보증”(고후 1:22; 5:5; 엡 1:14)이나 “첫 열매”(롬 8:23)이라는 은유로 표현한 것은 특히 교회와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특성임을 강조한다.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 생명이 없이는 “구원”은 분명 끝이 잘려진 것일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오순절에 명백히 계시된 것은 다름이 아닌 그 생명, 그 완결된 구원이고, 그리스도가 그 생명의 수여자라는 세례 요한이 누가복음 3:16에서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순절에 능동적인 주체였다는 사실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이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최종성과 완전한 충족성을, 즉 그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였다. 오순절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획득한 죄사함과 종말론적인 생명에 대한 구원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영의 인침(the redemptive-historical Spirit-seal of Christ)이다(참조. 엡 1:13).
부활과 승천과 함께 오순절은 그리스도를 성령을 주기 위해(행 2:33) -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종한 결과와 그 상급으로서(참조. 빌 2:8-9) -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특징 지운다. 즉 오순절은 높아지신 예수가 메시야적인 성령 수납자와 수여자(the messianic receiver-giver of the Spirit)가 되심을 보여준다. 좀더 공식적 용어나 분명한 교리적인 용어를 쓴다면, 오순절의 구원론적 “새로움”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인간론적-개인적-경험적인 것이 아니고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선교학적이다. 오순절은 특히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성령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근거에서 이제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임재하신다. 그는 ‘종말론적’ 영이시다.
2) 성령은 이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모든 육체에 부어졌다”(행 2:17). 그는 ‘보편적인’ 영이시다. 필자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13-41/『성령은사론』, 13-48을 보라.
오순절이 만들어낸 차이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지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에 관한 한, 대조가 되는 상(像)이 떠오른다. 즉 구원의 역사의 시각에서는 밤과 낮, 거의 전부와 전무의 급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루신 구원의 성취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전무였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이후에는 전부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의 시각에서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 그 이전과 이후 (옛 언약과 새 언약에서) 성령을 경험하는 데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본인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경은 그 차이를 드러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깔끔하고 명료한 범주화를 거부하고, 단지 “더 좋은”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이 용어를 썼다 (예를 들면, 11:40).
혹은 “확대되어” “더 크게” “더 충만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서술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0장 1항)에서 사용한 비교급.
등의 용어로 느슨하게 포착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순절/은사 운동 저자들이 누가복음의 끝맺는 말(24:52-53)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매우 놀랄 정도로 없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누가가 다음 서신을 기대하게 하기 위해서 쓴 것이고, 데오빌로에게 제2부가 도착할 때까지 그러한 인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이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33절) 부활하시고 막 승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이제 그들의 마음이 뜨겁고(32절) 열려져서(45절) “큰 기쁨으로” 경배하고 “늘” 그리고 공적으로(“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인상적인데, 또한 오순절 ‘이후’의 그들의 (성령에 충만한) 경험과 완전한 연속성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또한 오순절의 일차적 요점이 - 중생 후이든 어떠하든 -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된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경험, 즉 오순절 날의 120명과 이후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사건의 복합체로 바르게 간주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험은 어떠한가? (행 8:14 이하; 10:44-48/11:15-18; 19:1-7)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는데, 특히 지금 은사 운동 안에서의 경향, 즉 사도행전의 이러한 경험들은 중생과 구별된, 혹은 중생 이후의 개인 신자들이 능력을 얻기 위해서 따라야 될 지속적이고 규범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실제적으로는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을 적절히 구별하는 일을 실패한 데서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32-33의 사건-복합체에서 한 사건(오순절)은 개개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위해 반복할 수 있는 모델로 간주하고 다른 세 사건(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받은 일)은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모두’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변칙적인 것이다. (너무도 빈번히 사도행전은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던 옛날의 좋은 시절”의 느슨한 삽화(揷話) 모음집 정도로 여겨져서 경험적 모델을 찾기 위해서 탐구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1:8) 누가가 충분하게 명백히 드러낸 것처럼, 사도행전은 사실상 ‘완결된’ 역사이고, 구원의 역사에서 독특한 시기였다. 즉 ‘사도적인’, ‘단번에 모두’의 복음 전파가 “땅 끝까지,” 이스라엘에서 이방까지 이루어진 역사적 시기이다. (8절은 모든 신자나 모든 세대의 교회에 차별이 없이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8절의 “너희”(ὺμάς)가 구체적으로 받는 것은 2절의 “사도들”(τοίς ἀποστόλοις)이다. 또한 이사야서 49:6의 “이방”과 “땅끝까지”의 병행구가 13:47에 인용된 것을 참조하라.) 골로새서 1:6, 23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의 이러한 세계적이고 ‘사도적인’ 팽창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한다(물론 완결된 팽창은 그 너머의 후기 사도적 미래에도 열려 있지만).
예를 들어, 오순절에 제자들이 능력을 입히운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회심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의 성격상 한 번만[한 세대만] 있을 수 있는, 교회의 그 세대의 독특한 경험, 표적과 기사로 확정을 받았던(참조. 히 2:3-4) 독특한 경험의 일부였기 때문에 회심 이후 이러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때의 참”(갈 4:4)이 시작된 그 시대, 즉 ‘단번에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그 결과 이것과 분리할 수 없게 교회에 성령을 보낸 그 시대에 살게 되었던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획시대적이며, 따라서 본질상 비(非) 유형적이며 비(非) 패러다임적이다.” S. Ferguson, The Holy Spirit, (Leicester, 1996), 80. 또한 Perspectives on Pentecost, 22-28/『성령은사론』, 24-32; R. Gaffin, Jr. in W. Grudem (ed.), Are Miraculous Gift for Today? (Grand Rapids, 1996), 37-41 등을 보라.
끝으로, 오순절이 절정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오순절은 “아버지의 약속”(행 1:4; 참조. 2:33; 눅 24:49)을 성취한다. 이 표현은 오순절에 대한 우리의 구원 역사적 조망에 그 완전한 외연(外延)을 제공한다. 오순절은 모든 옛 언약의 기대의 핵심에 있는 그 언약, 언약 역사의 그 이후의 과정과 그 결과를 형성했던 최초의 언약, 즉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얻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창 12:2-3)의 성취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3:14에서 오순절을 보았던 그 관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통하여 “성령의 약속”은 이방인에게 미친 “아브라함의 복”에 적어도 절대적인 부분이거나, 아마 바로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두 목적절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창세기 12:3의 언약의 약속이 갈라디아서 3:8에서 어떻게 인용되었는지를 주의해서 보라.
요약하면, 충만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오순절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들이 궁극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을 획시대적으로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충만함 가운데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규모로 임마누엘 원칙이 최초로 실현된 것, 즉 “첫 열매의”(참조. 롬 8:23) 실현을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1.7 성령의 경험
오순절이 구속 역사적으로 획시대적이며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으로의 세례가 어떠한 경험적 중요성이나 함축을 갖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특히 은사 운동 안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신자가 경험하는 다양하고 심오한 실체의 원천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몇몇 신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근원이시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아도, 생명력 있고 변혁적이고 따라서 능력 있는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전혀 성령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은사 운동 사이의 문제도, 혹은 개혁주의 진영 내의 문제도 아니며, 또 적어도 문제가 되어서도 안된다.
고린도전서 12:13은 개개의 신자가 오순절에 오신 성령에 참여함을 가리킨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제외하고 신약에서 단 한번 더 “성령으로의 세례(baptized with 여기에서 전치사 ἐν은 확실히 세례의 요소를 가리키는 “으로의(with)” 혹은 “안에(in)”의 의미를 지니며, 도구적 의미의 “으로(by)”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주의 주석가인 G.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1987), 605-6을 보라.
the Spirit)”가 언급된 이 구절은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구원의 역사) 결과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구원의 서정). 다음의 두 가지 요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1) “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신자. 참고. 12절)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았지 단지 몇몇 신자만 받은 것이 아니다. “다” 오순절의 은사에 참여하였다.
2) 그 경험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때 (즉 회심할 때) 발생했지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오순절주의 주석가들도 회심 후의 분명한 경험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이 구절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점점 더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Fee의 명쾌한 주석을 보라. First Corinthians, 603-6; Empowering Presence, 178-82.
이 은사에 참여한 것에서 흘러나오는 포괄적인 경험의 일부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명령에 특히 잘 포착되었다. 그리이스어에서 현재형으로 표현된 이 명령은 이러한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임재가 모든 신자의 계속적이고 항상 반복되는 관심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5:19-6:9) 본문의 구성에서, 19-21절의 네 분사 구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18절)을 확대한 것이고, 5:22-6:9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는 네 번째 분사 구문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밝히듯이, 신자마다 다르고 굴곡이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이 충만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의 -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인간 관계, 혼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의 영역에서의 - 태도와 행동을 변혁시키는 능력, 즉 모든 것을 조정하는 원동력이며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신자는 교회의 건덕과 선교를 위해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다양하고 잘 배분된 은사를 구할 것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예를 들면, 롬 12:3-8; 고전 12:1-11, 28-31; 엡 4:7-13).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신자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엡 4:30)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는 권고를 받는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하는 것이 진정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은 여기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발전될 수 있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위의 이야기가 적어도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와 기독론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으로 강조하는 것과 모순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험에 대한 오순절의 중요성을 생각함에 있어서, 오순절을 성령의 활동의 다른 면과 구별되는 어떤 특정한 면(들)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사역에 근거하고 그 사역의 절정의 열매로서, 오순절은 성령을 교회 안의 - 신자들 안의 - 모든 활동 영역으로 이끈다.
1.8 오순절은 단 한번의 유일한 사건
이 점에서, 우리는 최근 몇몇 개혁주의적 저자들이 오순절은 우리의 구속을 ‘단번에 모두’ 성취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실제에 있어, 그들의 거부는 매우 강하다. 1989년의 본 대회에서 읽은 논문의 중요한 결론의 하나로, 판 브럭헌(van Bruggen) 교수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은 ‘단번에 모두’의 사건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그 앞부분에서는 단일성이란 “불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ICRC Proceedings, 1989, 205, 참조. 195, 199.
마틴 로이드 죤스 박사는 이에 대해서 좀더 강하고 좀더 혹독한 말로 반대하였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에 대해서 매우 느슨하고 위험한 이야기와 글들이 요즈음에 많이 생겼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은 ‘단번에 모두’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반복될 수 없다는 설명을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Revival [Westchester, IL, 1982], 15). 동일한 논조의 반대가 차영배 교수의 논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본인은 들었다. 그의『한국 개혁 신학의 미래』참조. 또한 J. Byun, The Holy Spirit Was Not Yet (Kampen, 1992), 105-6을 보라. (한역,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126-128. 여기에서 변종길 교수는 개핀 교수의 once-for-all이란 용어가 “모호하게 보이며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128)고 비판한다. 그러나 변 교수는 이 용어에서 “모두”를 빼고 “영단번(永單番)”이라 번역함으로써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를 강조한 개핀 교수의 생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역주)
본인이 이상의 저자들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그들의 반대는 어느 정도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의 구분을 분명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오해에 근거해 있다고 여겨진다.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위협되거나 부정된다고 그들이 여기는 것에서 그 오해를 엿볼 수 있다. 판 브럭헌에게 있어서,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한 실체” 그리고 “그의 신자들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지속적인 실체”가 바로 오순절(“성령이 부어지고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ICRC Proceedings, 1989, 200, 204.
로이드 죤스도 만일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었다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는 매우 놀라운 (본인의 생각에는, 매우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Revival, 15.
왜 이러한 분열이 생겼는가? 그들은 ‘단번에 모두’라는 표현이 의도한 것에 대해서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단번에 모두’는 ‘단번(once)’라는 말의 강세 동의어는 아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로서 현재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도 갖지 못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의 세례에서 진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살펴본 대로(행 2:32-33) 오순절과 함께 단일한 사건의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도 - 오순절은 특히 승천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에 놓인다. 즉 과거에 명백히 그리고 반복할 수 없게 일어난 것이 모든 시간이나 장소를 지나서 계속되는 실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최종성과 지속되는 효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약에서 ἅπαξ와 ἐφάπαξ를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뿐 아니라 그의 승천에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이다 (롬 6:10; 히 7:;27; 9:12, 26, 28; 10:10; 벧전 3:18; 참조. 유 4).
사실상 교회와 모든 신자 안에 성령이 ‘영구히’ 임재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의 성격 때문이다(또한 참조. 고후 1:22; 5:5; 엡 1:3-14). 오순절의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에 대한 이해가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의 19장에 특히 강조되어서 잘 나타났다. 19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가 성부의 우편으로 오르신 다음에 처음 한 일은 성령을 보내는 것이었다”(386).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이 주장을 더 다듬어서 성령 보내심의 최종성과 한정된 성격을 강조하였다. 또한 특히 Ferguson, The Holy Spirit, 79-92를 보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언약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의 세례는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신약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기를 추구하라고 명령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오히려 그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전제되어 있고(고전 12:13 Van Bruggen에 따르면, 이 세례는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여하는 성령의 활동이다(Proceedings, 1989, 201).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럽 보인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전체로 보면, 통일성과 다양성이, 즉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이 동등한 관심사임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12절의 생각을 이어 받는 13절에서는 분명히 강조점이 다양성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에 놓인다 (예를 들어, 13절에서 “한”이 세 겹으로 사용되었고 “다[모두]”가 두 번 강조되었으나 다양성에 상응하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음에 주목하라.)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의 성령의 세례 주는 활동은 이미 현존하는 실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실체(그 “한 몸”) “안으로”(into) 들어오게 된 성령의 행동을, 즉 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 행동(참조. 12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치사 εἰς의 힘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상태의 “in”과 동의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이 있는데, 13절 상반절의 세례는,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유익들 중의 하나이고 물세례로 인침을 받은 것이지만, 물세례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변종길 교수는 Holy Spirit, 107-108/『성령과 구속사』129-130에서 그렇다고 추정하였지만] 적어도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본인의 견해가 바울에게 부과된 “집합적 인간”(corporate personality)이라는 낯선 개념과 무관하다.)
), 그들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선물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성령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활동하도록 신자들에게 권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된다.
1.9 결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후기-사도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는 또한 진정으로 오순절적인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로서, 스킬더(Schilder)가 오래 전에 상기시킨 것처럼, “Niet terug naar Pinksteren!,” Om woord en kerk (C. Veenhof [ed.]; Goes, 1949) 41-43 (1920년대의 논문 시리즈에서).
교회는 (구속 역사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오순절로 돌아가자”는 향수에 젖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신 그 구호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순절로부터 전진한다......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살려주는 성령의 힘 안에서.”
2. 중단의 문제
개혁의 전통과 은사 운동을 대체로 나누고 있는 쟁점은 독특한 은사적 영성에 필수적인 성령의 어떤 은사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계속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논쟁은 예언과 방언에 집중되어 있고,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서는 좀더 덜한 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갈 것은, 논쟁점은 모든 성령적 은사가 정지되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모든 성령적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쟁점은 계시적 성격을 지닌 언어의 은사들이 계속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의 중단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창조계나 신자 안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을 부인하는 계몽주의나 이신론적 사고 방식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도 논점이 아니다 (물론 일부 중단주의자의 경우에게는 사실이겠지만). 성령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 즉 다름 아닌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 5)를 오늘날 다시 살리시는 일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인상적이며 더 기적적이고 더 철저히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자기 반성적인, 직관적-신비적인 (혹은 다른 방식으로) 능력 등, 인간의 어떤 능력을 넘어서서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롬 6:11)로 만드신다. 또한 의학으로는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참조. 약 5:14 이하) 오늘날도 고치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논점은 아니다. 논점은 병고침의 은사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게 어떤 일부의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주어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의 복잡성과 주어진 시간의 제한을 고려하여서, 오늘날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불일치, 즉 사도들이 교회의 삶에서 떠난 후에도 이 은사들, 특히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부터 믿을 만하게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일치에 한정하여 검토하겠다.
2.1 중단에 대한 반대들
상당수의 개혁주의적 저술가들이 성경에서 중단에 대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비록 정도는 다르지만, 하나나 혹은 여러 가지의 이러한 은사들이 종종 오늘날도 주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심지어 할 수 있으면 기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예를 들면, L. Floor, Heilige Gees/Die doop met die Heilige Geest (Kampen, 1982), 179-85; W. Jonker, Die Gees van Christus (Pretoria, 1981), 228-36, 242-45; J. Maris, Geloof en Ervaring - van Wesley tot de Pinksterbeweging (Leiden, 1992), 243-50; 참조. J. Versteeg, Het gebed volgens het Nieuwe Testament (Amsterdam, 1976), 58-61.
뿐만 아니라, 좀더 주목할 만한 일은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th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가 1991년 총회에서 예언은 오늘날도 계속되며 따라서 기대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취했고, 이후 그 견해를 옹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 총회가 택한 “목회 지침서”와 그 기초를 이루는 보고서 (“말씀과 성령”)는 개혁교회 대회(Reformed Ecumenical Council)에서 발간한 Theological Forum, vol. XX/2&3 (1992년 9월), 2-48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청을 받아 그 합권된 잡지에 응답 보고서를 기고했다(49-56).
중단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일반적인 재반론은 “그것이 명백하게도 현상에 대한 매우 단순하고 매우 기계적인 개념이다”는 것이다. “Dit is egter klaarblyklik ’n té eenvoudige ’n té meganiese voorstelling van sake” (Jonker, Die Gees, 243. 그는 또한 중단주의자의 논증은 비교적 “필사적 혹은 발작적”이다[krampagtig, 244]고 주장한다.)
그러한 “경향 신학”(streep-theologie)은 - 이러한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 사도적 교회와 후기 사도적 교회 사이에 신약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불연속성과 단절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비판되었다. 좀더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의 예언의 계속성이 정경의 충족성과 온전성을 허물게 될 것이라는 대부분의 중단주의자의 견해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반대가 제기된 점이다. 비중단주의자들은, 신약의 예언은 현존하는 성경이나 사도적 가르침과 동등하지 않고 더 낮은 (구속력이 없고, 혹시 오류의 가능성도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중단주의자들이 거짓되고 전적으로 불필요한 딜레마를 만든 잘못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반대들에 대해 본인은 역순으로 응답하겠다.
2.2 신약 예언에 관한 낮은 견해
예언이 더 낮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열거하는 수준에서 비판하겠다. Floor를 제외하고서는, 각주 40에 인용된 저자들은 이 견해를 논증하기보다는 (다소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특히 W. Grudem의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Westchester, IL, 1988)과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1994), 1049-61(참조. 1031-43)에 나타난 그의 포괄적인 논증에 대해서 응답을 하겠다. Grudem의 논증은 Floor와 오스트레일리아 개혁 교회의 보고서와 중복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D. Carson, Showing the Spirit (Grand Rapids, 1987), 91-100; R. Clements, Word and Spirit. The Bible and the Gift of Prophecy Today (Leicester, 1986). Norris Wilson이 1993년 본 대회에서 읽은 논문에서 (Proceedings, 116-135) Grudem의 견해에 가한 광범위한 비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개진하는 필자의 반대는 근본적으로 그의 주장과 동일하다. 최근의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반론으로 특히 다음을 보라. G. Knight, III,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Dallas, 1988), O. Robertson, The Final Word (Edinburgh, 1993), 그리고 R. S. Ward, Blessed by the Power of the Spirit (Melbourne, 1997), 60-67, 81-87.
만일 예언이 설교에 상당하는 것이라면, 예언이 오늘날도 계속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종 이렇게 주장되는 예언에 대한 관점은 고린도전서 12-14장과 에베소서 4장의 구절들에서 신약의 (계시적) 은사로 고려되지 않고 있음이 매우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말하는데, 예언이 설교라면, 오늘날 종종 예언이라고 불리는 것, 즉 교회의 현재적 필요와 상황에 관해서 성경적 진리를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무의식적이고, 다소간 생각할 필요 없이 성령의 충동에 의해 얻게 된 통찰력에 대해서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예언에 관한 낮은 견해는 사도 바울이 포괄적인 전망 아래서(엡 2:11 이하) 서술하고 있는 에베소서 2:20과 3:5을 적절히 해석하지 못한다. 이 구절들에서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그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 승귀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지는 (하나의) 교회-건물의 기초로 묘사되고 있다. 2:20과 3:5에서는 구약의 선지자가 아니라 신약의 선지자를 고려하고 있으며, 사도들에게와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는 구속 역사의 실현된 종말론적 종착점의 관점에서 고려한 것이다. 2:11 이하의 근접 문맥의 관심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통일성/계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새로운 것, 즉 이방인이 유대인과 함께 교회에 들어온 것에 있다. 이 견해는 해석학적으로 심각한 질문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면, Grudem, Gift of Prophecy, 89-92, 필자의 책, Perspectives on Pentecost, 93/『성령은사론』, 108, 그리고 최근의 주석가들과 단행본의 거의 실제적인 합의의 대표로서 A.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2 (Dallas, 1990), 153을 보라. 필자의 판단으로는, J. Roberts, Die opbou van die kerk (Groningen, 1963), 122-129의 반대 논증은 거의 설득력이 없다.
Grudem은 여기에서 “선지자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라고 길게 논증하였다 (“사도-선지자들,” “동시에 선지자인 사도들,” Gift of Prophecy, pp. 45-63).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것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특히 D. Wallace, "The Semantic Range of the Article-Noun-Kai-Noun Plural Construction in the New Testament," Grace Theological Journal, 4.1 (1983), 59-84를 보라. 또한 이것은 문맥에서도 그렇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교회를 세우는 관심의) 관련된 문맥에서 다음 번으로 선지자를 언급하는 곳이 4:11인데, 여기에서 그는 선지자를 사도와 명백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4:11; 참조. 고전 12:26).
사도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를 놓은 (한시적인) 시대에 속해 있지 그 이후의 상부 구조의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기초적인 역할은 사도들과 함께 “모퉁이 돌”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기초적이고 ‘단번에 모두’인 구원에 대한 기초적이고 ‘단번에 모두’인 계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참조. 고전 3:11). 엡 2:20은 종국적으로 나타날 완성된 신약 정경의 계시적 모형(母型, revelatory matrix)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둘째, 신약에 나타난 두 군데의 명백한 비(非) 사도적 예언의 경우는 - 사도행전 11:28과 21:10-11의 아가보의 예언들 - 그것이 구속력이 없고/없거나 오류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한 예로, Grudem은 아가보가 나중의 경우에는 (좋은 의도를 가졌지만 작은) 실수를 한 것을 들어 고발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Gift of Prophecy, 96-102; Systematic Theology 1052-53; 또한 Carson, Showing the Spirit, 97-98을 보라.) 대체로 이 시도는 아가보에게 부과된 현학적인 엄밀함의 요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해서 J. Hiller가 적절히 지적하였다, “만일 어떤 판단이 충분히 엄밀하다면, 구약 예언에서도 유사한 ‘오류들’을 찾아낼 수 있다” ("Diversity of OT Prophetic Phenomena and NT Prophec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6 [1994], 256). 여기에서 필자는 사도행전 21:11-14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뿐 아니라 비유대인도 포함하는 복음의 세계적이고 근본적이고 사도적인 전파라는 누가의 전반적인 서술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한 가지만을 덧붙이겠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가보의 예언을 포함해서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일은 전에 두로에서 바울에게 말하여지고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된 병행 구절을 - 4절.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기를 권한 것을 - 좀더 상세히 서술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견해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응답으로는 Perspectives on Pentecost, 65-67/『성령은사론』, 75-78을 보라.
두 경우 모두 바울 자신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독특한 사역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면서 포괄적으로 진술한 진리를 차례로 밝혀 준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3). 두 경우에서 모두 제자들이 - 아마 아가보 자신과 다른 예언한 사람들 - 바울을 단념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이 결코 예언된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무오한 진리라는 것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설혹 아가보가 실수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누가에게는 명백히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누가가 이 사건을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로 전파되는 것을 나타내는 그의 포괄적인 목적에 맞는 것으로 기록했지 그 이외의 것으로서 기록했다는 암시는 없다. 아가보가 말한 것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한 것”이다(참조. 예를 들면, 계 2:7).
반대로 아가보가 하나님의 영감(靈感)된 말씀 이외의 다른 것을 말했다는 암시가 이 구절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상, 예언에 관한 낮은 권위의 견해는 그것을 지지하는 예를 신약에서 하나도 제시할 수 없다.
셋째, (비사도적) 예언이 낮은 권위를 갖고 있다는 증거로 종종 인용되는 몇몇 구절에 대해서 간략한 평을 하겠다.
고린도전서 14:29는 낮은 권위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데, 여기에서 예언을 지칭하는 동사(διακρίνω)는 매우 넓은 의미론의 영역을 갖고 있다. 이 단어는 특정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평가하다,” “시험하다,” “판단하다,” “무게를 달다”). 예언된 것이 “분변[시험]”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에 오류가 있거나 혹은 낮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할 만한 용례를 바울에게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베뢰아 사람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시험]하므로” 그들이 칭찬을 받은 것에 주목하라(행 17:11). 그 시험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이 완전하고 무오한 사도적 권위를 갖지 못함을 의미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언을 시험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히 영감된 권위보다도 낮고 덜한 권위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사도행전 17:11의 “상고[시험]하다”(ἀνακρίνω)라는 동사와 같은 어원의 “분변[시험]하다”(διακρίνω)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의미론적 중복, 즉 그 용례의 모든 영역에서 중복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21의 “헤아려[시험하여]”(δοκιμάζω)의 용례도 포함하는 그 중복은 J. Louw와 E.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1988), 331-32, 363-64 (특히 항목 27.44-45, 30.108-09)의 의미론 영역 분석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36 상반절이 예언의 낮은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는 바울의 질문은 특별히 선지자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의 교회에 관계하여(33절 하반절) 고린도에 있는 교회 전체에게 던져진 질문임이 거의 확실하다. 36절 하반절과 함께 이것은 “신랄한 수사학”이다. Fee, First Corinthians, 710.
이것은 “진리가 너희에게서 시작되고 너희에게서 끝났느냐?” “너희가 복음에서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복음의 함축도 가지고 있느냐?” 고 반문하는 의취를 가지고 있다.
37-38절의 바울의 선지자들에 대한 엄격한 명령도 그들의 낮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11-14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날카롭게 책망을 했다고 해서 베드로가 그의 사도직을 정당하게 행사할 때 완전하고 무오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 구절을 둘러싼) 논쟁점은 예언의 ‘내용’과 그 상대적 권위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예언을 하는 자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0(“예언을 멸시치 말고”)는, 단지 고린도후서 10:10에서 바울이 같은 동사를 그의 대적자들의 ‘바울의’ 설교를 “경멸할 가치도 없는”(New English Bible. “말이 시원치 않다.” 한글 개역) 이라고 악평을 할 때 사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그 자체로서는 큰 무게를 갖지 못한다. 이 단어가 그의 편지와 구별되어 그의 말하는 형식적인 측면(그의 스타일)에 적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절에서 또한 ‘내용’에 대한 경멸적 생각을 따로 떼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넷째, 고린도전서 12:28은 예언에 대한 낮은 권위의 관점을 엄청난 어려움과 함께 제시한다. 여기에서 순서가 표현되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이 순서는 가치 혹은 유용성과 관련된다는 것은 대체로 일치된 해석이다. 예를 들면, Fee, Empowering Presence, 190; Grudem, Gift of Prophecy, 69.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낮은 권위의 견해는 다음의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즉 교회에서, 항상 유오하다는 평가를 받고 따라서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예언이 하나님의 명백하고 권위가 있고 무오한 말씀에 기초한 가르침보다 더 유용하고 더 잘 세울 수 있는가! 예언이 그러한 가르침보다 우위를 차지하는가! 이것은 그들이 명백히 원하지 않았고 받아들이기 원치 않았던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서 어떻게 이 결론을 피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낮은 권위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날 일어나거나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예언은 항상 성경에 복속되며 성경으로 시험되어서, 그것의 손상되지 않은 충족성과 권위가 위협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시험이 시행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신약에서의 예언(예를 들면, 아가보), 그리고 오늘날 일어난다고 예상되는 예언은 종종 구체적이어서 현재의 성경으로 쉽게 평가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꿈에서 본 것을 토대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정한 행동을 강요하였을 경우, 이것은 그 제시된 행동이 성경의 계명을 어기는 것인가를 제외하고는 성경으로 판단될 수 없다. 그 이외의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렌지”로 “사과”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이다. 꿈에 구체적이고 독특한 (그리고 열심히 추구하였던) “계시적” 중요성과 매력을 부여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서 성경은 그 본질상 침묵을 지킨다. 더 나아가서, 해석하는 것 이외에도 항상 질문할 수도 있고 질문에 열려져 있는 성경(과 일반 계시)와 달리, 이러한 견해에서는 근본적 계시에 접근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어떤 예언하는 사람의 유오한 이야기/“해석”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비효율적”인 방법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처럼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는가? 만일 필자가 놓치지 않았다면, 이 질문은 이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제기하지 않은 질문이다.
아무리 주의 깊게 규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견해는 특히 실제적이고 절박한 삶의 문제에서 우리의 주의를 성경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이다.
2.3 계시의 유기적 성격
중단주의자의 견해가 “매우 기계적”이기는커녕, 본인의 생각에는, 오늘날도 예언이 계속되거나 적어도 원칙상 계속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약 정경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서, 따라서 신약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 매우 추상적이고 매우 비(非)유기적(inorganic) 개념을 갖고 있다. 이 견해는 신약에 서술된 예언 활동이 일의 성격상 (우리의 27권의 정경에 관하여서는) “열려진 정경”(open canon)의 상황에서, 다른 말로 하면, 신약의 문서들이 아직 기록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기초적이고 사도적인 시대에서 교회를 위한 “정경”(=하나님의 말씀이 발견되는 곳)은 유동적이고 전개되는 실체였으며,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완결된 구약;
2) 기록이 되어서 그 당시 돌려 읽히다가 종국적으로 신약으로 남겨진 것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다른 영감된 문서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5:9의 “전에 쓴 편지[너희에게 쓴 것. 한글 개역]”);
3)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음성.
도전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는, ‘형식적’ 원칙으로서,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헌신하지 못하였고, 할 수도 없었다. 그 교회는 계시와 권위에 있어서 “성경 더하기”(Scripture plus) 원칙으로 살았다.
요즈음의 예언을 성경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와 분명한 소원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비중단주의자의 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시대착오적으로 고대 교회의 열린 정경의 상황으로 데리고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사도권의 통제나 고린도전서 12:10에 언급된 동반하는 은사, 즉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무오하게 분별하는 기능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한 그 은사의 통제 없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는, 본인으로서는 다르게 보기가 매우 힘든데, 오늘날 교회의 생활에서 (성경에 기록된) 특별/구속 계시도 일반 계시도 아닌 다른 계시에로 문을 여는 것이다. 그들에 의해 확언된 것은 두 계시를 넘어서는 제3의 계시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미 계시된 진리를 오늘날을 위해 조명한다는 의미에서의 “계시”를 넘어선 것이고, 그러면 여기에서의 논점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을 “계시”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신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인가?
성령에 의해 촉발되어 현대의 상황이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빛에 비취어 사색하며 기도로 씨름하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특히 성령의 인도에 관한 한, 성경을 넘어서서 기능하는 부가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그들은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피할 수 없이 그 대가로 어느 정도의 성경의 불충족성을 함축하게 되었다. 필자의 관심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입장은 로마서 8:14와 베드로후서 1:21의 진리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흐리게 만든다. 즉 로마서 8:14에서의 성신의 “인도”는 단지 일부의 신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특권이지만, 베드로후서 1:21에서의 ‘감동’은 오래 전에 종식된 일부 신자의 특별한, 계시적, 구원-역사적 역할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들에게서는 이 차이가 흐릿해졌다. 성경을 우리 자신과 다른 피조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안경으로 비유한 칼빈의 고전적인 예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예컨대,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1960], 1:6:1 [vol. 1, 70]; 1:14:1 [160]), 이 견해에서는 예언이 시야를 더 선명하게 해주는 부가적인 렌즈이다. 이 렌즈는 성경-렌즈를 잠시 동안 더 명확하게 해주기도 하고, 혹은 때에 따라서 대체하기도 한다. 오늘날 예언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비취어 보면, 이것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견해가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듯이, 두 가지 궤도로,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해서 공적이고 정경적이고 무오하며 완결된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개인들과 개인적인 모임을 위해서 사적이고 유오하며 계속되는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하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이 사실을 단언하는 수준에서 이야기하지만, 언약-역사의 기록으로서의 성경의 구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특히 금세기에 우리는 성경이 조직신학 교과서나 윤리학의 지침이 아니라(적어도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주되는 경향성이 오래 지속되었지만), 구속-역사적 혹은 언약-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 성경은 “교의학 교과서가 아니라 극적(dramatic) 관심이 가득한 역사책이다.” G.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1948), 26/『성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34; “계시의 전(全) 계통은 학교가 아니라 ‘언약’이다” (17/『성경신학』, 25).
그러나 또한 지금까지 되어졌던 것보다 훨씬 더 다음의 사실, 즉 구속-역사적 원칙이 계시의 ‘내용’뿐 아니라 계시를 ‘주는 것’에도 적용되어야 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또한번 ‘구원의 역사-구원의 서정’의 구분이 중요함이 드러난다. 계시의 말씀은 그것의 지속적인 적용에서가 아니라 ‘단번에 모두’ 성취라는 의미에서 구속의 행위에 매여 있다. 특히 Vos, Biblical Theology, 14-17/『성경신학』, 21-25의 논평을 보라. “계시는 구속과 긴밀히 교직(交織)되어 있어서 후자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면 공중에 매달린 것이 될 것이다” (24/『성경신학』, 31).
후자(구속)의 완성과 더불어서 전자(계시)도 종식되었다.
2.4 성령의 사역
끝으로, 성령에 대한 건전한 신학이라면 어떤 여지, 설명되지 않은 여백, 신비의 영역이 있을 것임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한다. 적어도 본인이 주장하고 변호하려는 중단주의 입장은 모든 것을 매끈하고 귀여운 조그마한 상자에 집어넣으려는 합리주의적인 충동에 가장 적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3:8 상반절의 진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바람과 같아서 궁극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 이것은 우리 시대에서 점점 큰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는데 - “성령의 변덕”과 같은 종류의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즉 성령께서 지금 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서, 기대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통상적이지 않은 것에 몰두해서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주권 가운데서 성령은 대체로 성경에 나타난 유형에 따라서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고 오늘날 하시는 일을 구성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필요가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유형들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성령의 활동에서 진정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대로, 즉 ‘기대하지 않고,’ 좀더 중요하게도, ‘추구하지 않게’ 남아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기대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만큼 예견할 수 없는 것이 되지 못한다.
신약은 오늘날도 예언을 열려 있고 살아 있는 가능성, 그러나 단지 선택적인 가능성으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요점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언에 대한 어떠한 선택적인 것도 혹은 단지 가능한 것도 신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언은 교회의 ‘질서’와 생활에서 정상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를 위해서 모일 때 거기에 예언의 발생과 관련된 비일상적인 것은 없었다. 즉 예언은 그들의 예배에서 기대되는 요소였다(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14).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서도, 예언은 필수적인 것이어서 추구해야 할 것이든지(고전 14:39), 아니면 중단되었든지 할 것이다. 아마 좀더 “온건한” 다른 선택을 허용하는 것은 단지 교회를 혼잡하게 할 뿐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불건전한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중단주의의 관점은 “성령을 상자에 가두려고” 노력한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이전까지의 현 시기 동안에는 성령이 성경에 따라서 주권적으로 자신을 “상자 안에 두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상자”의 차원들을 우리는 최소화해서는 안된다. 그 차원들은 광범위하고 자유케 하며, 실로 경외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차원들은 고정되었다. 이것은 특히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불가피하게 두 전선으로 나가게, 즉 한편으로는 로마의 전통의 원칙과 다른 편으로는 성경 이외의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급진 종교개혁과 맞닿뜨리게 하였다. 두 전선에서 종교개혁은 위협당한다고 간주되던 것, 즉 말씀과 성령의 불가분리성(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 Spiritus cum verbo), 성령의 사역과 정경화된 말씀 사이의 나눌 수 없는 관계를 선언하였다.
그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종교개혁의 힘을 무너뜨릴 잠재력을 갖고 있다. 성령의 이름으로, 어떤 이들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실질적으로 동등하게 놓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성경을 떠난 새로운 계시와 인도를 주장한다. 어떠한 것도 성경과 ‘동등’이 되거나 성경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은 여전히 중대한 문제이다. 이것에 대해서 자신과 은사 운동에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개혁교회들(Reformed Churches)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