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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대부분 가짜

방언 대부분 가짜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1169
 
제 6장/ 성령님의 은사 - 방언(1) - 고린도전서 12장 6-11절, 28-31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4절).
오순절 날, 성령 강림과 아울러 나타난 현상은 새로운 영적인 능력과 새로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러 나라에서 온 무리들이 제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소동하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며 깊이 감동을 받았다.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그 후에 가이사랴와 에베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역시 일어났다. 이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일반적으로 오순절 운동(Penticostal movement)이라고 불리우는 큰 역사가 벌어졌다. 오순절 교회의 대다수의 신자들이 방언은 성령의 세례와 임재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 운동은 지난 반세기 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이 오순절파가 모든 교파 중에서 가장 급성장하였다. 이것만으로도 그 주장과 성경의 근거에 대한 연구를 자극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축복을 놓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운동이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그 강조점 중에 어떤 것이 잘못 알려져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오순절파는 복음적인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지 않으므로 이단이 아니다. 참으로, 그들은 이 믿음을 열심히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우리가 오순절파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부분을 잘못 알고 있지만,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경건하고 대단히 진지하다. 오순절파를, 전혀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 볼 때에, 그것은 영적인 열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열광은 좀처럼 냉정하고 논리적인 논쟁으로 이겨낼 수가 없다. 감정적이고 이 교훈에 거의 열광적인 사람들에게 삼단 논법의 이론으로 접근한다면 그 이론이 적절한 성경 31절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할찌라도 그들은 전혀 냉담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많은 복음주의 교회의 냉냉하고 불만스러운 교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그들이 즐기고 시는 것을 포기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굶주린 그리스도인들과 새로운 개종자들은 그들이 우리 교회에서 보는 기독교 신앙의 유형보다 더 생동적이고 더 만족스럽고 더 활력있는 어떤 것에 대한 약속을 오순절파가 제시하고 있으므로 오순절파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 가지 않겠는가? 그들이 초대 교회의 열심과 열정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를 비교해 볼 때에, 그들은 초대 교회의 능력을 반복해서 약속하고 있는 오순절파를 따를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와 관련된 우리의 가르침이 부적절하거나 결함이 있었는가? 세계 각국에서 국내 사역과 국외 선교에 있어서 힘찬 오순절 운동을 보고 우리가 도전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순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위로부터 능력을 받는 것이었으며 그 두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눅 24:49). 능력을 받은 증거는 전도에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대하여 해석해 볼 때 그는 성령이 그들에게 오신 결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증거하는 능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능력을 받을 때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뒤따른 것은 사실이다(행 2:4), 그러나 이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은사 자체나 심지어는 그 가장 중요한 증거는 아니었다.
다른 방언과 알지 못하는 말
이 주장에 맞서려면, 몇 가지 전제적인 질문에 해답해야만 한다. 오순절의 "다른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알지 못하는 말"은 같은 것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과 관련해서 사용된 "알지 못하는"이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는 없다. A. S. V.(미국 표준역)은 간단히 "방언"이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방언은 오직 한 번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46절과 19장 6절에서도 단지 "방언으로"라고 번역했으며, 119장 6절에 "예언도 하니"를 덧붙인 것은 황홀경 가운데 말하는 것과 보통으로 말하며 가르치는 것을 구별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에이치 플럼프터(E. H Plumptre)는 그의 주석에서 오순절 날은 별도로 하고, 방언은 "보통 교육의 방법으로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 아니고, 황홀한 지경에서 황홀한 가운데 하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많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다.
오순절에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였다(행 2:4). 고린도의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전 12:30).
오순절에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행 2:6). 고린도에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전 14:2, 9).
오순절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행 2:11, 17). 고린도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말씀드렸다(고전 14:2).
오순절에는 통역자가 필요없었다(행 2:6). 고린도에서는 동역자가 없이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전 14:23, 28).
오순절의 방언은 믿는 자들에게 주신 표적 또는 신임장이었다(행 11:15). 고린도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표적이었다(고전 14:22).
오순절의 방언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가져 왔다(행 2:41). 고린도의 방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웠다(고전 14:4).
오순절에는 이방인들이 와서 두려워하며 놀랐다(행 2:7, 8).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면 이방인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말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고전 14:23).
오순절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었다(행 2:1). 고린도에서는 혼란이 있었다.(고전 14:33).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 이 둘 사이에는 이와 같이 현저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 두 사건을 동일시하는 교리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오순절 날의 "방언"은 그들의 모국어와 다른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이 배우지 아니한 말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똑똑히 이해할 수 있는 실제 언어였다. 그것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열광적인 종교적인 감정에서 입을 통하여 나오는 황홀경의 언어로, 통역의 은사가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설명은 14장 전체의 가르침과 들어 맞을 것이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이 현상은 초대 교회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이 황홀지경에 들어가서 그런 상태에서 억제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 통역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초대 교회에서 이것은 매우 갈망되던 은사였다. 그것은 위험한 은사였다.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드물고 매우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영적인 교만을 갖기가 대단히 쉬웠다. 다른 이유는 이 은사를 받으려는 열망이 적어도 어떤 이들에게는 잘못되고 거짓되며 인위적인 방언을 일으키는 일종의 자기 최면 내지는 히스테리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유의 황홀경의 언어가 오순절파의 전매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한 현상은 이슬람교, 힌두교, 몰몬교, 강신술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 세례(침례)나 능력을 받은 유일하고 필수적인 증거라는 주장을 삼가게 할 것이다. 한 저자가 주장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열정이 점차 바뀌면 광신이 되고, 그럴 때에 이와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진리의 영의 역사일 수도 있으나 거짓 영의 역사일 수도 있다.
오늘날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번째 관점은 로버트 앤더슨(Ro-bdrt Anderson)경의 그의 특색있는 신념을 이야기하는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다. 오순절 은사와 증거가 되는 기적들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역사적으로 사도행전이 쓰여지던 시대에 기록된 서신서들의 가르침에서는 두드러지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후에 기록된 서신서에서는 그것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한 기적과 은사들이 끝난 것을 자연히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옥중 서신은 이 추측이 옳다는 것을 잘 입증해 준다."같은 관점을 지지하면서 지 캠벨 모르간(G. Campbell Morgan)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러한 표적들이 초기의 것이며 불완전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궁극적인 결과를 생산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필요했다. 그것들은 신령하며 직접적이고 능동적이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더 이상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결코 되풀이 되지 않았다."
비록 결정적인 것은 아닐찌라도, 이 견해를 지지해 주는 이치에 맞는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영적 은사들의 목록과 14장의 이 은사들을 가치있게 사용하는 데 대한 교훈을 갈라 놓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오순절 은사와 증거가 되는 이적들이 이제는 지나갔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은 궁극적인 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적 은사에 대한 마지막 목록을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는 에베소서 4장 8-16절에는 이적의 은사들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언급되어 있는 은사 중에서 두 가지 - 사도들과 예언자 - 가 지금은 없어졌다. 장성한 것과 완전한 것이 오면서 3가지 특별한 은사 - 지식과 예언, 방언은 지나가고 그쳤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오직 계시가 불완전할 때에만 필요했다(히 2:3, 4을 보라). 이러한 은사들은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했을 때에 있었던 것들이고, 바울은 이에 대하여,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논쟁이 계속된다. 논쟁은 어떤 명확한 성경 귀절을 제시할 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게 일련의 것들을 제(除)할 때에 그치게 된다. 저자는 오순절파가 매혹되어 있는 견해를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여 논박했었으나 전혀 성공하지 못했었다. 논쟁이 그치도록 제시할 수 있는 단언적인 성경 귀절은 없다. 반대로, 몇 가지 이에 반대되는 명백한 귀절들을 제시할수 있다.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고전 14:18).
"이러한 명확한 귀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모든 방언이 "단지 알 수 없는 말과 병적 흥분"으로 모두 가짜로 보는 것은 다소 성급하며, 성령의 음성인 바울의 영감된 서신을 읽는 신자들에게 거의 확신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방언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과 병적 흥분이라는 것은 부인되지 않는다. 대개는 그 열매가 성령의 열매인 것이 입증되지 않았다. 통역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흔히 미숙하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더해 주지 않는다.
 이 방언 운동의 초기 발전을 깊이 연구한 알 에이 토레이(R. A. Torrey)박사는 이 점에 대해 쓰면서, 그 대부분이 가짜라고 믿으면서도 오늘날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운동이 여세를 모으고 있었을 때에, 믿을 만한 성경 해석가인 죠지 더불류 솔타우(George W. Soltau)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면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없다는 것인가? 진실로, 있다...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우리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참 축복은 은밀히, 종종 기대하거나 구하지도 않았는데 주어지며, 그 축복은 구령(救靈)이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와 찬양을 위해서 주어진다. 그러한 은사가 공중 집회에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온유, 겸손, 절제, 사랑의 영과 함께 주어진다."저자는, 은사가 구하지 않았는데 은밀히 주어졌을 때 예배와 찬양으로 끝난 것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몇 번 그런 일이 일어났다가 중단되어 결코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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