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주의해야할운동

찬양시 악기 사용에 대한 답변

찬양시 악기 사용에 대한 답변
 
종교개혁 당시 쯔빙글리는 오르간을 부순걸로 알고 있습니다.
칼빈인가? 또 다른 누군가는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바람 소리라고 까지 평했는데요.
하지만 지금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온갖 동원 가능한 악기는 다 동원하지 않습니까? 그 성경적 이유로 구약에 여러가지 타악기를 비롯해 각종 악기로 찬양했던걸 근거로요.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몰랐던 걸까요? 하지만 그렇게 볼수는 없을거 같은데요..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답변드립니다>
님께서는 찬양시 악기 사용 여부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목아래 온갖 종류의 악기들과 노래 기법이 동원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교회 현실에 대해 뜻 깊은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교회에서의 악기 사용 여부는 음률있는 찬양과 관련되어 있고
찬양은 곧 예배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
 우선 질문하신 내용 중에 몇 가지 오해가 될 만한 부분들에 대해 보충 설명을 드린 후에,
찬양시 악기 사용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 쯔빙글리가 오르간을 부쉈다?
 
루터(Luther), 칼빈(Calvin) 쯔빙글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분들이면서도
동시에 종교개혁 시대의 개신교 교회 음악의 세 가지 유형을 대표하는 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교회 음악을 전공하는 분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음악과 관련하여 루터는 개방적, 칼빈은 제한적,
 그리고 쯔빙글리는 배타적인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단편적으로 본다면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의 복잡 다양한 인과적 성격을 고려할 때, 지나친 단순 도식화는 오히려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쯔빙글리에 관한 예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기 이전까지만해도 인문주의에 매료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인문주의 운동은 성경을 위시한 고전 연구뿐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쯔빙글리는 음악에 대해 조예가 깊었습니다.
특히 그는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였다고 하는데, 전문 음악가 이상으로 잘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오르간(피아노?)을 자기 손으로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은 물론 교회에서 그 누구도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하였습니다.
혹자들은 그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주목하여 쯔빙글리는 음악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혹은 적대적이었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쯔빙글리라는 한 인물이 그 시대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갔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단편적인 억지에 불과한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가 살았던 시대는 부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중세기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진리의 어느 국면 하나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은 부분이 없었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인 면모가 암축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로 예배였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그야말로 가장 혐오스런 비성경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제대로된 말씀 선포는 고사하고 예배에서 부르는 성가 한 곡까지도 진리편에서 순전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배 양식은 복잡하고 화려해 보였지만 이방 종교의 외식적인 예배에 불과했습니다.
 예배시에 연주되는 음악과 악기 뿐만 아니라 성가까지도 교황의 허락없이는 가감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기만적인 예배 행위로부터 성경으로 개혁된 예배로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쯔빙글리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 종교개혁에 투신한 루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도적으로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에 매진하게 되는 과정에서 루터의 신학과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찬론과 교회 음악론인데요,
쯔빙글리는 교회 음악과 관련하여 루터의 입장,
즉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을 허용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신구약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제정한 것만을 인정하며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쯔빙글리 입장에서 볼 때,
루터의 견해는 세속적인 음악의 교회(특히 예배) 유입에 대해 매우 인간적인 미봉책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쯔빙글리의 탁월한 개혁적 신념을 엿보게 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삶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오르간을 부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거짓된 예배 음악과 루터주의의 중도적 교회 음악론의 위험성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허세와 품위로 위장한 예배 음악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는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한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사로잡힌 바 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그가 보여준 신앙의 행적은,
그가 남긴 엄청난 종교개혁의 열매와 도전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에게 입술의 신앙고백대로 하나님 앞에 정직과 진실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할 말도 많고, 또 실지로 많은 말을 하지만
내뱉은 말만큼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을 보기 힘든 때입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가장 어두웠던 역사속에서 수많은 거짓 선생들과 방해꾼들과 싸우면서도
자신이 누렸던 은혜대로의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교회 음악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그에 관한 전체적인 신학과 신앙의 객관적 조명아래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르간을 부순 일화하나로 쯔빙글리를 교회 음악을 도외시한 난봉꾼 정도로 단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이며, 음악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불순한 생각입니다.
쯔빙글리는 가장 좋아하는 것까지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택하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은혜로운 교훈이 아닐런지요?

 
2. 칼빈은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파람 소리라고 까지 말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칼빈이 직접 이런 표현을 직접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칼빈이라면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도 남았을 법하다고 생각됩니다.
칼빈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거짓된 예배 현장에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울려퍼지는 오르간 소리라면 이 정도의 표현은 약과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칼빈의 수많은 저작물 중에서 이와 같은 표현을 찾는 일은 그리 핵심적인 사안이 못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표현들이 어떤 신학적 함의와 주장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칼빈이 오르간 소리를 두고 사탄의 휘파람 소리라고 했대’라는 말을 되뇌이는 이들의
 좋지 못한 저의(底意)를 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칼빈이 교회 음악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우회적인 비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칼빈주의를 추구하는 성도들에게도 혼란과 부담을 주려는 의도가 섞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위 표현이 칼빈이 한 말이든,
그렇지 않던 중요한 것은 칼빈의 표현의 적절성이 어떤 상황(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선 칼빈의 음악관에 대해 생각할 때, 두 가지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일반 음악(성도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취향으로 여길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둘째, 교회 음악(예배를 중심으로 한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어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칼빈의 입장은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칼빈은 음악을 포함하여 일반 예술의 기능과 가능성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합니다.
심지어 칼빈은 성경과 관련된 회화나 형상(조각)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삶의 질을 더욱 풍성하고 부요롭게 하는 일반은총적 수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예술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완고하며 배타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억측입니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술을 도외시하며,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주장 역시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사상이 이런 칼빈주의의 예술관의 적극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는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예술을 대해야 하며,
 예술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예술과 관련된 내용들이 그 기능과 영역을 넘어서
신앙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을 ‘예술의 악용’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회화나 형상은 그 자체로서는 악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그것들이 예배의 수단과 형식으로 사용되게 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봅니다(참조, 기독교강요 1.11.6-12).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 안에서 활용되는 예술(특히 교회 음악)은 보다 엄밀한 성격을 갖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예배 시에 부를 수 있는 찬양의 범주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시편 찬송과 사도신경송, 주기도문송과 십계명송 등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는 찬양을 부를 것을 권면합니다.
 그중에서도 시편 찬송의 부활은 교회 개혁의 핵심 사항으로 칼빈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였던 부분입니다.
칼빈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찬양의 적합한 기준으로 곡조도 중요하지만 가사의 영적 의미가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아타나시우시스나 어거스틴의 예를 본받아 교회 안에서 적당한 정도를 가지고 노래를 보르는 것은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독교강요 3.30.32).
 전통적인 개혁교회는 이러한 칼빈의 교회 음악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는 칼빈이라는 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견해가 성경적 음악관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3. 예배 시에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도 괜찮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칼빈은 찬양을 부름에 있어서 가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찬양의 운율과 멜로디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는 운율과 멜로디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운율과 멜로디는 자연스럽게 악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음악(특히 예배에 있어서)과 관련해서 악기 사용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 악기 사용을 전면 부정한다.
둘째, 악기 사용을 전면 허용한다.
셋째, 악기 사용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견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중 두 번째 견해는 개혁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입장입니다.
어떤 형태의 악기를 막론하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루터주의를 모태로 하는
 일반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입니다.
교회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악기 종류에 대해 뚜렷한 근거나 기준이 없다는 것은
곧 음률이나 멜로디의 구별에도 관심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CCM들은 이미 통속적인 세상 음악과의 경계선마저 허물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개혁의 시작과 끝의 성격으로서
 예배 개혁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CCM이나 현대 교회 음악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견해는 무엇인가하는 것인데요,
 첫 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 답입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표면적인 이유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혁교회를 추구하는 분들이
두 가지 견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견해의 차이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음악에 있어서 악기 사용을 전명 부정하는 입장은 악기 사용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전 예배의 의식법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구약의 악기 사용은 전예배를 위한 의식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구약 성전 의식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의식법과 함께
 악기 연주도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분들은 예배 찬양을 무반주로 형태로 부릅니다.
 칼빈을 위시하여 많은 개혁자들(특히 스코틀랜드 장로교주의 개혁자들)이 이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약의 의식법의 완성과 단절을 인정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이 악기 연주조차 부정하였던 것은
중세 시대의 잘못된 종교 음악의 남용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경건을 도모하는데 적절한 음악적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오르간이나 피아노 정도에 한하여 예배 음악을 위한 악기로서 받아들입니다.
전통적인 유럽 개혁교회과 청교도들은 이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입장에 관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니다만
종교개혁 정신이 훼손되거나 대립될만큼 치명적인 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차이는 동질의 신학과 신앙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이 신앙적 양심에 위배됨이 없는 범위에서 내린
자유로운 신앙적 판단과 결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 개혁과 개혁된 예배를 소원하는 성도라면
자신이 처한 신앙적 환경과 고백에 따라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이라도 자유롭게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만 더 짚고 마치겠습니다.
혹자들은 그렇다면 오르간이나 피아노는 되고, 전자 기타나 드럼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따집니다.
 물론 악기 자체가 선과 악을 표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악기의 음색(톤)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며, 신앙의 정서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점에서 악기가 탄생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 기타나 드럼이 발명되게 된 동기는 지극히 세속적입니다.
사악한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이런 류의 악기들로 전달되는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가 세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르간과 피아노의 탄생은 교회의 영적 활동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악기들은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교회 음악을 표출하는 가장 전형적인 도구로 사용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이 도구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오르간과 피아노 자체가 어떤 인격적인 영성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오르간과 피아노만 있으면 우리가 영적으로 만족스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르간과 피아노로도 더 적극적으로 충분하게 세속적인 발상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질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바른 신학과 신앙 고백 가운데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수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반주 찬양이든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활용하여 드리는 찬양이든
예배자로 선 성도로서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하는데
우리의 모든 뜻과 의지와 열정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찬양시 악기 사용에 대한 답변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12

이 글 공유하기

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주의해야할운동
https://esesang91.com/b/kkkexchan3/701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