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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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예배에 대한 소고

열린예배에 대한 소고
 
1.들어가면서
'퍼온 글'에 실린 고신대 이광호 교수의 "열린 예배를 선도하는 온누리 교회는 건전한 교회인가?"라는 글을 의미심장하게 읽었습니다.
현하 한국교계에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예배갱신의 일환으로 '열린예배'라는 이름의 다양한 예배패턴이 유행처럼 급물살을 타고 번져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때는 '찬양과 경배'라는 프로그램이 소위 찬양예배라는 이름으로 유행해 복음성가라는 새로운 장르를 도입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전 교회에 나름대로 정착해 이 시대의 보편적 전통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유의 신(新)사고적 발상과 시도의 근저에는 한결 같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무쌍하게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속적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유리 방황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 참여시켜 말씀에 접촉시킨다는 '복음적 명분'이 언제나 이런 다양한 기독교적 교회활동의 당위성을 정당화시켜 주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본래적 관점'은 항상 '현실'이라는 적용의 장벽에 부딪혀 양보와 절충과 타협을 거듭 해온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사실 교회역사 속에서 교회와 신앙의 세속화는 이런 방식으로 심화돼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은 항상 천상 지향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실현하는 것(마6:33)으로서 세속적 가치관과는 - 그의 본성이 사단적인 것으로 인해(요일2:15-16, 요12:31) - 불가피하게 긴장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창3:15).
이 뿐만이 아닙니다. 기존의 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도식화된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적 매너리즘에 빠져 복음적 생명력을 잃고 의무감에 이끌려 타성화 되다시피 한 습관적 신앙에 신선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갖고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해 일종의 시대적 사명감에 이끌려 이런 기독교적 전위(前衛)사역을 시도하기에 이른 줄 압니다. 이와 관련해 이광호 교수의 소신발언은 그의 지론이 성경에 근거한 흑백 논리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신학자로서의 학자적 양심과 일종의 선지자적 소명감에서 자신의 견해를 십이분 명백하게 밝힐 수 있었다는 데서 그 용기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2.펼치면서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가 100년 남짓의 한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에 가히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부흥이 중도에 국가의 고도경제성장 시책과 맞물려 주로 물량위주의 외향적이며 현세 지향적인 방향에로의 성장에 주력하다 보니 의외로 외유내빈의 특징적 성격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현하 대부분의 한국적 기독교회의 총체적 특성이 지극히 기복주의와 지성감천주의, 그리고 상급주의 등의 세속성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전체적인 성격이 우상 숭배적 신앙관을 낳게 되는 기형적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성공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을 도구화시키는 왜곡된 신앙관 말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근거한 말씀의 정당한 해석과 올바른 적용의 결핍과 부족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과도 같이 각종 매스컴을 통해 말씀은 홍수처럼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적 실질에 있어서는 허약하기 그지 없는 실정입니다. 신앙적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새롭고 자극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신앙의 방향성이 왜곡되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각종 이단과 신비주의를 부추길 뿐 아니라, 복음을 명분 삼아 다양한 세속주의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치장된 채 교회 안으로 당당하게 유입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복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계시적 안목이 결여돼 있는 일부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의기투합은 본질의 이해결여로 인해 자연히 지엽과 현상에만 치우쳐 복음의 선한 목적을 위해 정당하게 수단을 분별해 취사선택하는 일에는 무력하기만 할뿐입니다. 소위 '꿩 잡는 게 매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식의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로는 그것이 비록 다수를 교회로 인도하고 그들을 기독교적 문화와 복음의 단편적 지식에 접촉시키는 일에는 성공했을지라도 그들이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의 실질에는 결코 접촉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열매는 인간의 작위적인 방법과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내적 조명의 역사로 말미암는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를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21)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의 도리'에 대해 '전파'함에 있어서 별다른 인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도적으로 강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각종 작위적 전도기법을 도입함이 없이 순수히 말씀만을 전파했다는 지적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도리에 대한 '내용' 또한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방식이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이럴 때 택자를 부르시는 성령의 내적 음성으로 인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의 영혼이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믿음으로 응답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고전12:3, 행13:48, 16:14, 고전18:10, 요6:37, 44).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전파의 성격과 반응의 결과가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토록 '전도의 미련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였을까요? 성경은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증거하기 위해서'(고전2:4)라고 증언합니다. 당시는 헬라문명의 터 위에 세워진 로마문명의 전성기였습니다. 결코 원시적 미개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발상과 방식을 동원해 얼마든지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포장돼 전달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람의 지혜가 혹시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방해해 결과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가리울까 봐 여간 고심하지 않았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셀 수 없을 정도의 각종 전도 프로그램이 난무합니다. 고도로 기획된 인위적 전도기법이 획일적으로 가르쳐지고 적용됩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특정인이 전도 왕으로 추대돼 전국 각 교회를 돌며 간증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고무돼 일시적이나마 자기열심에 근거해 전도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내 열정은 식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례적인 교회 행사로 전도기간을 설정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작위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다만 이 일에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복음전파에 기꺼이 헌신하는 것을 통해 성령께서는 이들을 복음의 증인과 도구로 선용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전파는 강요된 책임과 의무가 아닙니다. 영생하는 천상적 생명력의 발휘가 동기로 작용해 나타나는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참 된 구원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입니다. 생명에는 자체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출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베드로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습니다(요1:40-41). 주께서 빌립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했습니다(요1:43-45). 사마리아 지역 수가성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했습니다(요4:28-29). 이 일의 배후에서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고전12:3). 때문에 자의적인 입술의 고백과 지적동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생명과는 무관할 뿐입니다. 이 시대의 전도방식의 문제점은 이 부분을 예사롭게 여긴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한국적 기독교회의 세속화는 이런 잣대로 구원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그런 결과 천만 이상이라는 소위 자칭 '기독교인'을 양산하는데는 적잖이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성도'를 찾아보기란 가뭄에 콩 나듯 해,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한낱 천박한 종교집단으로 전락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했을 뿐입니다.
예배 또한 동일한 원리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만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의 경배행위입니다. 때문에 불신자들에게는 예배의 특권과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이 예배의 성격을 '신령과 진정'(요4:24)으로 제한시키고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4:23)고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신령과 진정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예배를 드려야 되는지에 관한 구속의 도리를 성경을 통해 정당하게 깨닫고 신앙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감사와 감격과 경외의 마음을 발휘해 참 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실의 전제와 이로 인한 신앙 고백적 감동과 기쁨이 선행되지 않는 한에는 어떤 종교적 기교와 치장과 동기부여적 상황연출을 시도한다 해도, 예배 참석자의 감정을 자극해 종교적 감흥과 종교적 삼매경에는 빠지게 할 망정 결코 예배의 본질로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및 알현, 그리고 경배'(히12:22-23)의 경지까지는 결코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배자'가 돼야지 결코 손님과 관객으로서 '참관자'가 돼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드리는 행위'이지 '보는 행위'가 아닙니다.
일찍이 이런 예배의 본질과 성격을 성경을 통해 익히 깨달았던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예배자의 전 인격이 오직 영으로 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에만 집중케 하기 위해 일체의 카톨릭적 형상숭배와 강단치장 및 제의착용, 심지어 악기조차도 엄격히 선별해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필요 이상 자극할 수 있는 제반 요소들을 과감하게 예배의식에서 제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만 감사함으로 찬양과 기도와 헌물을 봉헌해 드렸으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의 보증으로 '말씀의 순수한 선포'를 통해 풍성한 은혜를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시종일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위해 집중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존귀히 드러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성경적 예배에서는 예배의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어떤 형태의 작위적 연출도 허락될 수 없었던 것이 역사적 개혁교회의 예배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연출은 사람을 의식한, 사람 중심의 예배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불신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면 저들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미쳐 깨닫지 못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드리는 신성한 예배를 단순히 연극을 관람하듯이, 음악회나 뮤지컬을 감상하듯이, 그러나 다소 종교적인 거룩한 감정을 작위적으로 부추기는 심정으로 참석하게 될 뿐입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행위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전위(前衛)행위일 뿐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성과 진리성이 철저히 보장돼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하나님을 향해 우러나오는 내적 경건과, 구속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복음적 지식의 체계 말입니다. 때문에 다양한 예배양식의 도입은 그것이 제아무리 종교적 거룩성으로 치장한다 해도 시청각적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해 영적 예배의 본질을 구현해 내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배의 본질을 왜곡시킬 위험성에 노출될 뿐입니다.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표현 속에 이미 하나님 중심의 영적 예배의 본질적 성격인 거룩성과 진리성이 약화돼 있을 뿐 아니라, 지극히 사람 중심의 볼거리 예배로 전락된 성향이 강력히 암시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신앙행위입니다. 결코 보고 즐기는 인간적 오락행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드리는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의 차이는 제물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드리는 방식과 방법의 차이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대한 신앙 고백적 믿음의 본질 여부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빛 안에서 이를 해명하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히1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불완전하나마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를 나름대로 깨닫고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을 통해 감사와 경배의 심정으로 드린 예배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때 아벨이 드린 제사의 성격이 신약적 배경 하에서 본질상 신령과 진정의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드린 제사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분명한 구원의 도리에 접촉된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락한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을 부추기는 데서 나와진 자의적 종교행위였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적한 신앙고백이 결여돼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의 행위에 대한 신약기자들의 평가가 한결 같이 '악한 자'(요일3:12)로서, 그리고 불법과 불의함을 대변하는 '가인의 길'(유1:11, 참고: 여로보암의 길)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된 예배는 드리는 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심정으로 드려지는가에 따라 열납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이는 합당한 예배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지식의 체계와 거룩의 원리를 통해 드려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원리와 기준은 '신령과 진정'으로란 전제 속에 함축돼 있습니다. 이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방식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 어떤 인간적이고 작위적인 거룩한 종교적 연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결코 드릴 수 없게 됨을 시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이는 율법에 근거한 신앙의 본질과 진실성이 실종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복음의 궁극적 목적과 예배의 본질은 이에 합당한 성경적 방편이 동원될 때만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거룩한 목적은 거룩한 수단을 요구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작위적 방편이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 합당하게 선용될 수 없음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3.맺으면서
사람들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발맞춰서 나름대로 걸맞는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항변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으로 인해 메시아적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시사하시면서 이런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마9:17).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의 복음(눅22:19-20) 안에서 구약적 그림자와 신약적 실체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의 지적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율법과 복음으로 특징지어지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점진적 계시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단절과 배격이 아닌 갱신과 승화와 완성의 관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새 부대에 담은 술이 부대로 말미암아 오히려 부패되거나 변질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철저히 검증해야하며, 만일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면 그 부대는 더 이상 사용하지 말거나 필히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대가 술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술이 부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검증은 이미 역사적 개혁교회가 지난 역사 속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결코 새로운 시도나 제안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제2의 성경적 규범들로 간직하고 있는 각종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이 바로 이상의 가능한 위험성을 성경적으로 검증한 결과 정당하게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개혁교회에서는 이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성경에 이은 제2의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삼아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난 역사를 냉철히 반추하며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 같은 유의 과오를 답습하고 반복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오직 본질을 더욱 본질 되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의 총체적 본의(本意)를 회복시키는 일이며 이를 가감(加減) 없이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제반 수단은 복음의 본질과 목적을 본의적으로 정당화시킬 때만 그 진정성과 진리성이 보증될 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삶의 총화를 일정한 격식과 순서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적 행위입니다. 이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를 좇아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 이를 결정적으로 대변하는 증거본문과 사건이 레위기10:1-2에 기록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드린 여호와가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 분향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 방식을 좇아 '다른 불'로 분향함으로써 즉시로 죽임을 당합니다. 물론 이때 '다른 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지정하신 불을 사용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자의적으로 편의를 좇아 임의로 분향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 발상과 편의적 행동은 자기 열심을 의미하는 바, 이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결정적으로 가리우는 패역한 행위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기자가 이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그렇습니다. 예배를 위시한 일체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행위는 근본과 본질에 있어서 계시 의존적일 때 한해서만 정당하게 열납될 뿐입니다. 반면에 자의적 숭배신앙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상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처음부터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 오직 신령과 진정의 원리에 부합될 경우에만 합당한 예배로 간주되며 받으실 만한 예배로 성립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지적입니다(요4:23-24). 이런 의미에서 열린 예배는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 요소로 치장됐다 하더라도 본질적 속성상 자의적이고 작위적인 것으로 인해 사람의 종교성을 부추기는 데는 기여할 지 몰라도 성경적 예배로서 수납하기에는 신중한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http://cafe.daum.net/remnant7000/1VdB/12?docid=Kodm|1VdB|12|20030124161801&q=%B0%B3%C7%F5%C1%D6%C0%C7%20%B9%E6%BE%F0&srchid=CCBKodm|1VdB|12|2003012416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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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주의해야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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