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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4.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자료출처http://blog.daum.net/kkho1105/3321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신조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신조, 복음, 믿음에 대한 고찰을 생략하기를 원하는 분은 7장<159쪽>으로 넘어가십시오.)

분석
1.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 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고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이를 위해 제안된다.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리마에서의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니케아 신조]에 근거하여 자기 교회의 신앙 고백적 입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다른 교회들의 가르침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되고 이해되었던 정죄들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Towards Visible Unity, p. 43).

2.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리마 보고서는 1세기 신조들의 언어가 “그 시대의 문화와 필요와 상황에 의존했다”고 주장하면서, “[니케아] 신조도 그 언어와 그 개념들과 그 사상 형식들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진술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34).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고대 헬라-로마의 사상과 언어의 형식들에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40).

3.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함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솔직하게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한다. 1981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소련 오뎃사에서의 회의 보고서는 “어떤 이들은 [니케아] 신조가 단지 낡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잘못된 기초적 존재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진술한다(Apostolic Faith Today, p. 250). 그 보고서는 또한 “그 신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경적 신앙에 대한 부적절한(inadequate) 신조로 생각된다”라고 말한다(p. 251). 그 보고서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그들에게 그 신조는 일방적인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성육신의 교리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4.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신비의 요소가 [니케아] 신조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믿는 유대적 신앙으로부터의 이탈, 즉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비판 없이 인정한다(p. 252). 구체적 한 예로,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말하기를, “신조가 생명으로 취급될 때, 그것의 내용은 모든 정의를 초월한다. . . .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누가 표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위험을 무릅씀이 없이 그 정의할 수 없는 분을 정의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86).

비평
1.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를 축소하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적 내용을 축소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조가 무엇인가? 제임스 배너만은 신조의 기능을 ① 연합의 기초로서 성경의 진리를 붙듬, ②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침, ③ 세상의 오류나 불신앙을 대항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함이라고 요약한다(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296-302). 신조의 세번째 기능이 본 논의에 특히 중요하다. 죤 머리도 신조들은 오류의 침입에 대항하여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John Murray, “The Creedal Basis of Union in the Church,”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281). 그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할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 . 가장 기초적 불신앙의 모순들이 확고한 성경 교리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Ibid.). 그러므로 이상적 신조는 모든 진리들을 선언하고 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오류들을 반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신조의 이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니케아 신조는 오늘날 교회의 교제의 기초적 신조로서 여러 점들에서 부족하다. 예를 들면, 니케아 신조에는 펠라기우스적 오류를 반박할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진술들이 들어 있지 않다. 또한 그 신조에는 교황 무오(無誤), 마리아 숭배, 미사, 연옥과 같은 천주교회의 오류들을 반박하는 아무런 진술들도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신조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 그리스도의 속상적(贖償的), 유화적(宥和的) 속죄, 인간들의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그리고 성경의 무오(無誤) 등의 중요한 진리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들도 없다. 오늘날 교회들은 현대적 오류들이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진리들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보다 더 자세한 신조를 필요로 한다.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 이후 자신들의 신조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신조들은 니케아 신조보다 더 자세하다. 오늘날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서의 신조는 이러한 신조들의 본질적 내용들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들이 그들의 확장된 신조들을 깍아내리고 보다 더 간략해진 신조로 돌아가려는 것은 후퇴이며 오류이다. 죤 머리가 표현하듯이, 그들의 현재의 신조들을 부정하는 것은 퇴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펼치시는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계시된 뜻을 더 충만히 이해하도록 교회를 깨우쳐 오셨던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다(Ibid., p. 284). 그러므로, 교회 일치를 위해 필요한 신조적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제한시키려는 어떤 지도자들의 생각은, 신조의 기능을 고려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2.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 계시들을 구체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셨고 정통적 신조들도 그런 상황들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특정한 문화들로 옷입었다고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이 주어진 문화적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와 뜻을 전달하시는 적절한 수단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이러한 성격은 인간의 진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왜 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강조하는가? 만일 이 강조가 신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객관적, 영원적 진리들을 적절히 전달하기에 부족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의 근본적 성격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적 상황을 그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면, 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작성된 신조가 영원한 진리를 적절히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더욱이, 만일 누가 신조는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즉시 회의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의 모든 진술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주장도 시대적 제한성을 가지는가?”고 정당히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조적 진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직접 전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신조들의 역사적, 문화적 옷들--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뿐만 아니라, 또한 신조들이 선언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자체에 대한 순전한 거부이다.
사실, 신조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정확히 반영할 때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왜냐하면 진리와 교리는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며, 신조란 기본적 기독교 진리들과 교리들의 진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이 기독교 진리들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이므로, 모든 신조들은 성경에 일치해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조가 성경적 진리들을 바르게 나타내는 한, 즉 그것이 성경적인 한, 그것은 또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또한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아치볼드 앨릭잔더가 진술했듯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공식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Archibald Alexander, “Creed,”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 clopaedia, I, 741).

3.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부적절하다’(inadequate)는 말이 양적인 불충분성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니케아 신조는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한 기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그 부적절함이 질적인 불충분성 혹은 부당성(impropriety)을 의미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그 신조는 그것의 기본적 철학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므로, 그들이 의미하는 부적절함이란 부당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신조의 권위와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회들을 포함하는 모든 기독교 세계가 공식적으로 성경적 신조로 수납해 왔던 신조이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는 “니케아 신조는 철저히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진술한다(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II, 492). 루터교회의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도 니케아 신조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의 일치적 찬동이요 정통적 참 교회의 고백이다”고 말한다(Ibid., pp. 94, 95). 에이 에이 하지는 니케아 신조를 모든 기독교회의 신조라고 표현하였다(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 5).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의 권위와 정확성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회의 정통적 전통 혹은 전통적 정통에 반대되는 이단적 개념이다.

4. 진리의 언어적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유행했던 신정통주의적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적, 명제적(命題的, pro- positional)이지 않고, 인격적, 경험적임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상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 즉 객관적(客觀的) 계시의 부정이며, 나아가서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하나의 신비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만들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들은 언어적, 명제적이며, 여기에서 사람의 언어의 지식적 기능(cognitive function)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언어적 표현, 명제적 진술을 반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기본적 성격을 반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적 개념들을 단호히 거절해야 하며, 건전한 옛 신조들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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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주의해야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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