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넓은 길, 좁은 길
5. 넓은 길, 좁은 길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비성경적인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될 수 없다. 성경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지 않을까? (유 1:3).
불신자들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것같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어렵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아이마저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한 구절로 복음을 정의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다른 복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복음이 있다고 알려 준다 (갈 1:6). 참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주께서 하신 일을 믿는 믿음에 선다. 십자가의 보혈이 없으면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주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죄성 및 죄악된 행위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옥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주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이때 우리의 영은 다시 거듭나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된다.
교회사를 보면 복음의 간단한 메시지가 계속 왜곡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 신도들 중에는 자신들만은 믿음의 참된 수호자라고 장담하는 자들이 있지만 언제나 한가지만은 마음 속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개신교 신도들이던 카톨릭 신도들이던 상관없이 언제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들을 영적 기만에 빠뜨릴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반드시 점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말씀이 그러한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확인해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인간을 사로 잡는 사상은 처음에는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면 그 영향력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약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오래된 세계관은 새로운 세계관에 의해 신속하게 대치된다. 이때 오래된 세계관은 구닥다리가 된다. 한편 새로운 세계관은 어느새 길과 진리의 빛으로 환영을 받는다. 지금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세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방대하고 다양한 성경 외적인 (extra-biblical) 믿음들을 허용하면서 조직적으로 복음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은 왜 하는 것일까? 왜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연합의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일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연합과 형제 우애가 중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버리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종교 개혁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점검해 볼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여러 참조 내용들을 제공한다. 솔로몬은 말하길,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라고 하였다 (전 1:10).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약 500년 전 교회에 있었던 패러다임 전환을 재고해 보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개혁(reformation)이라는 단어마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에 복음을 회복하여 기독교의 노선을 바꾼 종교 혁명을 알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에 대한 폭넓은 견해를 접하기 위하여 여러 다양한 역사 책들을 읽어보는 것은 흥미롭다. 세속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의 기간을 혁명운동으로 보고 있는 반면, 로마 카톨릭은 종교 개혁을 우주적 교회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반란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개신교를 중세 로마 교회의 일치와 신학을 파괴한 이단 분파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틴 루터는 이단이었다. 한편,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을 성경이 말하는 본래 기독교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많은 피를 흘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바울 및 다른 성경 저자의 가르침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신학을 개발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의 꿈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교 개혁의 원인들
팍세의 이 세상의 기독교 순교자들 (Foxe’s Christian Martyrs of the World) 이라는 책에 의하면 초기의 개혁자들은 네가지 영역에서 로마 교회를 대항하여 섰다: 1) 그들은 성지 순례의 가치를 거절했다. 2) 성자들 숭배를 거절했다. 3)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그들은 성례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신체적인 몸이 된다고 믿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네 번째의 불복은 로마 카톨릭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개혁자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라일(R. C. Ryle)은 역사적인 이 사실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개혁자들이 왜 화형을 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이 교황에서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형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또는 영국 교회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다. 그러한 것들이 절대 아니다! 그들이 화형을 당하게 된 주된 이유는 그들이 로마 카톨릭의 특별한 교리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경우가 그 단 한가지의 교리에 의해서 죽음과 삶이 좌우되었다. 만일 그들이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사는 것이요, 거절하면 죽어야만 했다. 문제가 되는 그 교리는 바로 주님의 성찬에서 나누는 거룩한 빵과 포도주의 성분이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기 개혁자들은 면죄부 및 교황의 권위 등 다른 많은 관건들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중 화체설이라 불리는 교리에 대해서는 가장 크게 반대하였다.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이란 성체(the Eucharist) 속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제한다는 믿음이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은 따질 필요도 없이 거룩한 성체(the Holy Eucharist)이다. 보이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성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과 연합된다. 물론 일반 세상 사람들과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리는 카톨릭 믿음의 원천이요, 일치요, 최고봉이다. 카톨릭 교회는 성체 성사(the Holy Communion)를 받는 것이야 말로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토마스 페트리스코 박사(Dr. Thomas W. Petrisko) 및 교회사에 대한 카톨릭의 관점에 의하면 “14세기 내내 성체의 기적들과 성자들의 환상 및 환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하늘은 계속 믿는 자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기적과 기사들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이러한 성체의 기적들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러한 전례가 없다. 다음은 페트리스코 박사가 그의 책에서 말하는 14세기의 성체 기적에 대한 두 가지 예이다:
1345년 3월 15일, 화란 암스텔담에 사는 입스브란트 돔머(Ysbrant Dommer)라고 이름하는 매우 병든 사람이 자기 집에서 성체 성사를 받았다. 사제가 떠난 후에 입스브란트는 뱃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어 양동이에 담았다. 그곳에 있던 여자가 그것을 큰 난로에 던졌다. 그 다음 날 그 여자는 난로 속에서 빛이 나는 그리스도의 성체(the Host)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천에 싸서 가슴에 넣었다. 사제가 와서 그것을 가져다가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가져서 성합(Pyx)에 넣었다. 그 다음날 사제는 성합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의 성체는 그 여인의 품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있은 후 사제는 이 사건이 완전한 기적임을 확신하고 조사를 요청했으며 주교(Bishop)들은 이 사건을 놀라운 기적으로 인정하였다. 수 세기를 걸쳐 지금까지 매해 이 기적으로 인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
1412년 이태리 바그노 디 로마그나의 산타 마리아 아선타 교회의 사제는 자신의 믿음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미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성체에 예수님이 실제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다. 성결 예식을 마친 후 사제는 성찬배의 잔을 들여다 보았는데 포도주가 변하여 피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붉은 피가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 피를 토해 버리는 바람에 성체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피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사제는 그 엄청난 기적적인 성체 변화를 체험한 자들에게 침착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약 400년 후에, 파이어스 4세 교황은 조사 위원회를 소집한 후에 그 유물을 경배할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1912년, 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큰 축제가 열렸다. 1958년에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성체보에 남은 흔적은 진짜 피였음을 확인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체 성사의 기적들과 표적들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비평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체험’을 대항하고 일어섰다. 이미 말한바 대로 셀 수 없이 많은 개혁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대항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을 잃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토마스 페트리스코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라고 이름하는 옥스포드의 학자가 성경을 심각하게 연구하더니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러면서 위클리프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만이 믿음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가르쳤다. 번역된 성경은 급속도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화체설에 관한 위클리프의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존 허스(John Huss: 1369-1415)가 위클리프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당장 교회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무리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무르익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기간에 신비한 역사에 의해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이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교회 역사에 대한 개신교와 카톨릭의 관점에 대해 연구하면서 몇 가지 합리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성경을 통하여 카톨릭의 화체설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사람의 전통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화체설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작대기에 꽂아 화형시키는 것이 성경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만일 화체설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미래에 그러한 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도 하였다.
마틴 루터
종교 개혁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마틴루터라는 이름을 인식할 것이다. 그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에이스리벤(Eisleb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을 공부하기 원하였지만, 루터는 1505년 7월에 너무나 무서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에 놀란 이후 자신이 살아나게 되면 수도승이 되겠노라고 성 앤(St. Anne)에게 약속을 했다. 3주후에 루터는 에르프르트(Erfurt)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수도승으로 입문하였다. 1507년 그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첫째 미사를 집행하였다.
1510년과 1511년 겨울, 루터는 상위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의 계시”를 보게 된다. 즉, 로마 교회의 화려함과 부패를 보면서 큰 개혁이 일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1511년 루터는 독일 위텐버그(Wittenburg)로 옮겨졌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성경 교수가 되었으며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그의 사무실은 탑 안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독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로마서 1:17절을 읽으면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후로부터 믿음에 의한 칭의 및 오직 성경(성경만이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유일한 권위이다)이 그의 신학적 입장의 주요 핵심이 되었다.
1517년, 카톨릭 교회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은 다른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포하였다. 면죄부 자체로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죄사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루터는 매우 분노한 가운데 공적 대항을 하기로 결단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위텐버그의 교회 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였다.
그는 면죄부의 남용에 대해 대항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서 논쟁할 것을 도전하였다. 그의 원래 목표는 개혁이었지만, 1518년에서 1521년 사이에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할 필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개혁이 일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교회가 붙들고 있는 모든 이단적 가르침을 완전히 버리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반종교개혁 (the Counter Reformation)은 성공하였는가?
종교 개혁은 인간들이 기독교로 가장하여 만든 종교 시스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로 돌아서려는 시도였다. 결국 종교 개혁은 개신교라는 분리를 자아내었으며 이는 카톨릭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반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1545년에서 1645년까지의 100년 동안 발생한 변화들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반종교개혁은 카톨릭 교회가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너무나 큰 손실을 개신교에게 빼앗긴 이후에 로마 교회를 안정화 시키고 강화하기 위한 로마 카톨릭의 시도였다.
반종교개혁은 카톨릭 내부의 여러 잘못된 점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종교개혁의 거친 속성들을 보면 참된 회개가 전혀 없었다. 로마 카톨릭 제국의 명분 때문에 수없이 많은 피가 희생되었듯이 반종교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뿌려져야 했다.
오늘날 “통합 운동”을 주창하는 자들은 개신교가 통합을 위해 과거를 용서하고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카톨릭과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개신교와 카톨릭은 사실은 같은 믿음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일치되는 내용부터 서로 동의하면서 서로 다른 점은 제켜두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마틴 루터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개신교 신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화해란 결코 화해가 아니라고 믿는다. 참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붙들고 있는 기독교 단체와 연합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길 만일 다른 복음을 포용하게 되면 이는 사탄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요 교회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고후 11:3-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디모데에게 말하길 마지막 때에 매우 강력한 미혹들이 진행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살후 2:3).
개인적 간증
맥마혼 (T. A. McMahon)은 내 친구다. 그는 새 영성 및 기독교의 미혹 등 여러 책들을 나와 함께 저작하였다. 과거에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최근에 개신교 교회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매우 마음이 상하였다. 그에게는 여전히 그가 어렸을 때에 그를 가르쳤던 여러 카톨릭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는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가르침에 대해 매우 염려를 하고 있다:
사제들과 수녀들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군인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들은 내 삶 속에서 참으로 귀한 분들이었다. 나는 지난 25년간 이 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 삶에 참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나를 길러준 그들을 존경하면서 자라났다. 그 감정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내게 바뀐 것은 그들이 헌신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나의 믿음이 바뀌었다.
맥마혼은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개신교 교인들이 반드시 거듭난 신자라고 믿지는 않는다. 카톨릭 신자들도 뭔가를 진실로 믿는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도 뭔가를 진실로 믿지만 그럼에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 있다. 즉 카톨릭이나 개신교라는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이다.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현재 동향들에 관하여 맥마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카톨릭 대표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들어왔다. 카톨릭 지도자들이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카톨릭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과 대화를 들으면서 몇 가지 맘에 걸리는 것들을 주지할 수 있었다. 첫째, 카톨릭 변론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용어들이 주로 ‘복음주의적’이라는 점이었다. 즉,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카톨릭 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들이다. 카톨릭 변론자들은 성경 공부에 함께 참여하여 구원 받음에 대해, 거듭남에 대해, 성령의 가르침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자라날 때는 그러한 용어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의 입술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나오고 있다.
꿈에 부푼 여러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현재 진정한 개혁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맥마혼은 오히려 절대로 신나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복되는 말이긴 하지만,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무슬림이던, 힌두교도이던, 뉴에이지에 속한 사람이던, 나아가 카톨릭 사람이던 참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믿음을 소유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적 내용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개념을 따라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맥마혼은 이렇게 진술한다:
전략적으로 카톨릭 대표자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에게는 그 용어들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 부분을 그들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동기는 자신들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간교하다. 예를 들어, ‘은혜에 의한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위가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카톨릭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혜란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여러 공적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톨릭이 표현하는 ‘은혜에 의한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이 의미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의미에 있어서만의 차이가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차이이다.
마지막으로, 맥마혼은 평신도 변증론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 변증론자들은 카톨릭 교회를 위해서 변론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 어떠한 것도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다. 통합 운동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카톨릭 변증론자들의 의견을 (공식적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마치 카톨릭 교회가 믿는 내용인 것처럼 개신교 신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카톨릭 변증론자들의 말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들릴지라도 그들의 변론은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 교리 및 예식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맥마혼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미혹하는 속임수가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준다:
예를 들어, 카톨릭 변증자는 주장하길, 복음주의 학자들과 카톨릭 학자들과 함께 점검한 결과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듯 마리아에게 기도하거나 예배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우 나는 마리아를 예배하면서 자라났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훨씬 더 많이 간절하게 기도하며 자라났다. 나의 카톨릭 친구들과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어떤 우상 숭배가 아니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예배하도록 교회에서 배우며 자라났다. 마라아에게 156개의 기도를 드리는 묵주(Rosary) 기도는 우리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마리아에게 드려지는 수백 수천의 호칭기도가 있으며 성자들에게 드리는 셀 수 없는 호칭기도가 있다. 이러한 기도들 때문에 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드릴 시간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것으로서 나만이 아니라 모든 카톨릭 교인들이 매일 겪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 움직임이 왜 잘못인가?
그렇다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기독교를 향한 미혹’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몇 명의 정신 나간 점쟁이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현재 진행 중인 위대한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카톨릭 교회가 정말로 새롭게 변하였다면 왜 바벨론 포도나무와 분명히 연결된 여러 관습들과 믿음들을 제거하지 않는가? 교회 내에 이방 믿음이 들어옴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왜곡되던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와 바벨론 종교의 조합이 잘못되었노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그러한 교황의 선언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사건들이 발생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1986년,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바티칸은 평화를 위한 특별 기도의 날을 정하고 세계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따라서 불교, 힌두교, 정령 숭배자들, 여러 교단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로마 교황의 초청을 받고 한 자리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과 여신들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이 모임을 주관하였던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이루길 원하는 평화에 복음이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억만명의 카톨릭 신도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예식과 규례와 전통에 충성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복음을 알고 자신들의 양 떼들을 위한다고 하는 카톨릭 변증론자들은 왜 카톨릭 신도들이 이방종교 및 풍습을 따르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까? 맥마혼이 언급한 것처럼 “대신, 그들의 노력은 세계적인 제국을 세우기 위해 바티칸의 최대의 위협인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미혹하는 것이다.”
어떻게 넓은 길이 좁은 길이 될 수 있을까?
사탄이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 중에 하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복음이 타당하지 않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또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복음을 혼미케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오해하게 하거나 복음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분별력을 키우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가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훈련이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데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훈련을 시도해보면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실습해 보기 위해 마태복음 7장을 의도적으로 엉터리로 인용해 보자.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니 그리로 들어가는 가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넓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고 들어간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 중에 복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용이 거짓임을 즉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거짓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내용임을 확신할 것이다.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매우 좁다. 넓은 문은 속이는 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간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주님만이 “그 길”이요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 (요 14:6).
이러한 근본적인 성경적 진리를 인식하는 가운데 현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배교의 동향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한때 진리의 길은 좁다고 믿던 사람들이 이제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넓다고 믿는 것 같다. 점점 기독교는 모든 종류의 믿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너무 배타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믿음은 타락한 것이다.
나는 복음은 좁은 길이라고 믿는다. 또한 복음만이 하늘 아버지와 영원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 좁은 길이 넓혀지거나 타협된다면 그 길은 더 이상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이다. 그리고 넓은 길의 종착역은 영원한 멸망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대해 교훈하신 것을 잊지 말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 24:4-5, 23-24). 덫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출처] 5. 넓은 길, 좁은 길 - 새 포도주와 바벨론 포도나무 - 로저 오클랜드
http://blog.naver.com/thebloodofx/20096901349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아니한 비성경적인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될 수 없다. 성경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지 않을까? (유 1:3).
불신자들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것같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복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어렵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아이마저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한 구절로 복음을 정의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다른 복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복음이 있다고 알려 준다 (갈 1:6). 참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주께서 하신 일을 믿는 믿음에 선다. 십자가의 보혈이 없으면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주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죄성 및 죄악된 행위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지옥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께 용서를 구할 때 주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이때 우리의 영은 다시 거듭나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된다.
교회사를 보면 복음의 간단한 메시지가 계속 왜곡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 신도들 중에는 자신들만은 믿음의 참된 수호자라고 장담하는 자들이 있지만 언제나 한가지만은 마음 속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개신교 신도들이던 카톨릭 신도들이던 상관없이 언제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들을 영적 기만에 빠뜨릴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반드시 점검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말씀이 그러한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확인해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인간을 사로 잡는 사상은 처음에는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면 그 영향력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약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오래된 세계관은 새로운 세계관에 의해 신속하게 대치된다. 이때 오래된 세계관은 구닥다리가 된다. 한편 새로운 세계관은 어느새 길과 진리의 빛으로 환영을 받는다. 지금 이러한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세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방대하고 다양한 성경 외적인 (extra-biblical) 믿음들을 허용하면서 조직적으로 복음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은 왜 하는 것일까? 왜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연합의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일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연합과 형제 우애가 중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버리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종교 개혁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점검해 볼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여러 참조 내용들을 제공한다. 솔로몬은 말하길,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라고 하였다 (전 1:10).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약 500년 전 교회에 있었던 패러다임 전환을 재고해 보려고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개혁(reformation)이라는 단어마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에 복음을 회복하여 기독교의 노선을 바꾼 종교 혁명을 알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종교 개혁에 대한 폭넓은 견해를 접하기 위하여 여러 다양한 역사 책들을 읽어보는 것은 흥미롭다. 세속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의 기간을 혁명운동으로 보고 있는 반면, 로마 카톨릭은 종교 개혁을 우주적 교회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반란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개신교를 중세 로마 교회의 일치와 신학을 파괴한 이단 분파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틴 루터는 이단이었다. 한편,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을 성경이 말하는 본래 기독교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많은 피를 흘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바울 및 다른 성경 저자의 가르침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신학을 개발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라 교회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의 꿈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교 개혁의 원인들
팍세의 이 세상의 기독교 순교자들 (Foxe’s Christian Martyrs of the World) 이라는 책에 의하면 초기의 개혁자들은 네가지 영역에서 로마 교회를 대항하여 섰다: 1) 그들은 성지 순례의 가치를 거절했다. 2) 성자들 숭배를 거절했다. 3)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4) 그들은 성례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신체적인 몸이 된다고 믿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네 번째의 불복은 로마 카톨릭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개혁자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라일(R. C. Ryle)은 역사적인 이 사실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개혁자들이 왜 화형을 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이 교황에서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형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또는 영국 교회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다. 그러한 것들이 절대 아니다! 그들이 화형을 당하게 된 주된 이유는 그들이 로마 카톨릭의 특별한 교리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경우가 그 단 한가지의 교리에 의해서 죽음과 삶이 좌우되었다. 만일 그들이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사는 것이요, 거절하면 죽어야만 했다. 문제가 되는 그 교리는 바로 주님의 성찬에서 나누는 거룩한 빵과 포도주의 성분이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초기 개혁자들은 면죄부 및 교황의 권위 등 다른 많은 관건들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중 화체설이라 불리는 교리에 대해서는 가장 크게 반대하였다.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이란 성체(the Eucharist) 속에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제한다는 믿음이다. 카톨릭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은 따질 필요도 없이 거룩한 성체(the Holy Eucharist)이다. 보이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성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과 연합된다. 물론 일반 세상 사람들과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교리는 카톨릭 믿음의 원천이요, 일치요, 최고봉이다. 카톨릭 교회는 성체 성사(the Holy Communion)를 받는 것이야 말로 “내 몸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토마스 페트리스코 박사(Dr. Thomas W. Petrisko) 및 교회사에 대한 카톨릭의 관점에 의하면 “14세기 내내 성체의 기적들과 성자들의 환상 및 환영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하늘은 계속 믿는 자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기적과 기사들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이러한 성체의 기적들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러한 전례가 없다. 다음은 페트리스코 박사가 그의 책에서 말하는 14세기의 성체 기적에 대한 두 가지 예이다:
1345년 3월 15일, 화란 암스텔담에 사는 입스브란트 돔머(Ysbrant Dommer)라고 이름하는 매우 병든 사람이 자기 집에서 성체 성사를 받았다. 사제가 떠난 후에 입스브란트는 뱃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어 양동이에 담았다. 그곳에 있던 여자가 그것을 큰 난로에 던졌다. 그 다음 날 그 여자는 난로 속에서 빛이 나는 그리스도의 성체(the Host)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것을 천에 싸서 가슴에 넣었다. 사제가 와서 그것을 가져다가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가져서 성합(Pyx)에 넣었다. 그 다음날 사제는 성합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의 성체는 그 여인의 품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있은 후 사제는 이 사건이 완전한 기적임을 확신하고 조사를 요청했으며 주교(Bishop)들은 이 사건을 놀라운 기적으로 인정하였다. 수 세기를 걸쳐 지금까지 매해 이 기적으로 인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
1412년 이태리 바그노 디 로마그나의 산타 마리아 아선타 교회의 사제는 자신의 믿음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미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성체에 예수님이 실제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다. 성결 예식을 마친 후 사제는 성찬배의 잔을 들여다 보았는데 포도주가 변하여 피로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붉은 피가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 피를 토해 버리는 바람에 성체보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피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사제는 그 엄청난 기적적인 성체 변화를 체험한 자들에게 침착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약 400년 후에, 파이어스 4세 교황은 조사 위원회를 소집한 후에 그 유물을 경배할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1912년, 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큰 축제가 열렸다. 1958년에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성체보에 남은 흔적은 진짜 피였음을 확인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체 성사의 기적들과 표적들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비평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체험’을 대항하고 일어섰다. 이미 말한바 대로 셀 수 없이 많은 개혁자들이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대항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을 잃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토마스 페트리스코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라고 이름하는 옥스포드의 학자가 성경을 심각하게 연구하더니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러면서 위클리프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만이 믿음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가르쳤다. 번역된 성경은 급속도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화체설에 관한 위클리프의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존 허스(John Huss: 1369-1415)가 위클리프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당장 교회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무리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무르익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기간에 신비한 역사에 의해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이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교회 역사에 대한 개신교와 카톨릭의 관점에 대해 연구하면서 몇 가지 합리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성경을 통하여 카톨릭의 화체설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니면 사람의 전통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 보았다. 화체설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작대기에 꽂아 화형시키는 것이 성경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만일 화체설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미래에 그러한 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도 하였다.
마틴 루터
종교 개혁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마틴루터라는 이름을 인식할 것이다. 그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에이스리벤(Eisleb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을 공부하기 원하였지만, 루터는 1505년 7월에 너무나 무서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에 놀란 이후 자신이 살아나게 되면 수도승이 되겠노라고 성 앤(St. Anne)에게 약속을 했다. 3주후에 루터는 에르프르트(Erfurt)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수도승으로 입문하였다. 1507년 그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첫째 미사를 집행하였다.
1510년과 1511년 겨울, 루터는 상위의 지시에 따라 로마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의 계시”를 보게 된다. 즉, 로마 교회의 화려함과 부패를 보면서 큰 개혁이 일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1511년 루터는 독일 위텐버그(Wittenburg)로 옮겨졌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성경 교수가 되었으며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그의 사무실은 탑 안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독일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로마서 1:17절을 읽으면서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후로부터 믿음에 의한 칭의 및 오직 성경(성경만이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유일한 권위이다)이 그의 신학적 입장의 주요 핵심이 되었다.
1517년, 카톨릭 교회를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공식적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은 다른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포하였다. 면죄부 자체로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죄사함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루터는 매우 분노한 가운데 공적 대항을 하기로 결단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위텐버그의 교회 문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였다.
그는 면죄부의 남용에 대해 대항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서 논쟁할 것을 도전하였다. 그의 원래 목표는 개혁이었지만, 1518년에서 1521년 사이에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할 필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개혁이 일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교회가 붙들고 있는 모든 이단적 가르침을 완전히 버리고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반종교개혁 (the Counter Reformation)은 성공하였는가?
종교 개혁은 인간들이 기독교로 가장하여 만든 종교 시스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로 돌아서려는 시도였다. 결국 종교 개혁은 개신교라는 분리를 자아내었으며 이는 카톨릭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반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1545년에서 1645년까지의 100년 동안 발생한 변화들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반종교개혁은 카톨릭 교회가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너무나 큰 손실을 개신교에게 빼앗긴 이후에 로마 교회를 안정화 시키고 강화하기 위한 로마 카톨릭의 시도였다.
반종교개혁은 카톨릭 내부의 여러 잘못된 점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종교개혁의 거친 속성들을 보면 참된 회개가 전혀 없었다. 로마 카톨릭 제국의 명분 때문에 수없이 많은 피가 희생되었듯이 반종교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뿌려져야 했다.
오늘날 “통합 운동”을 주창하는 자들은 개신교가 통합을 위해 과거를 용서하고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카톨릭과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개신교와 카톨릭은 사실은 같은 믿음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일치되는 내용부터 서로 동의하면서 서로 다른 점은 제켜두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마틴 루터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개신교 신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지 않은 화해란 결코 화해가 아니라고 믿는다. 참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붙들고 있는 기독교 단체와 연합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길 만일 다른 복음을 포용하게 되면 이는 사탄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요 교회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고후 11:3-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디모데에게 말하길 마지막 때에 매우 강력한 미혹들이 진행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살후 2:3).
개인적 간증
맥마혼 (T. A. McMahon)은 내 친구다. 그는 새 영성 및 기독교의 미혹 등 여러 책들을 나와 함께 저작하였다. 과거에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최근에 개신교 교회들에게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매우 마음이 상하였다. 그에게는 여전히 그가 어렸을 때에 그를 가르쳤던 여러 카톨릭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는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가르침에 대해 매우 염려를 하고 있다:
사제들과 수녀들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군인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들은 내 삶 속에서 참으로 귀한 분들이었다. 나는 지난 25년간 이 분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 삶에 참으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나를 길러준 그들을 존경하면서 자라났다. 그 감정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내게 바뀐 것은 그들이 헌신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나의 믿음이 바뀌었다.
맥마혼은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개신교 교인들이 반드시 거듭난 신자라고 믿지는 않는다. 카톨릭 신자들도 뭔가를 진실로 믿는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도 뭔가를 진실로 믿지만 그럼에도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 있다. 즉 카톨릭이나 개신교라는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이다.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현재 동향들에 관하여 맥마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카톨릭 대표들과 복음주의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들어왔다. 카톨릭 지도자들이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카톨릭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과 대화를 들으면서 몇 가지 맘에 걸리는 것들을 주지할 수 있었다. 첫째, 카톨릭 변론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용어들이 주로 ‘복음주의적’이라는 점이었다. 즉,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카톨릭 교인들에게는 생소한 용어들이다. 카톨릭 변론자들은 성경 공부에 함께 참여하여 구원 받음에 대해, 거듭남에 대해, 성령의 가르침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자라날 때는 그러한 용어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의 입술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나오고 있다.
꿈에 부푼 여러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현재 진정한 개혁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맥마혼은 오히려 절대로 신나해서는 안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복되는 말이긴 하지만,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무슬림이던, 힌두교도이던, 뉴에이지에 속한 사람이던, 나아가 카톨릭 사람이던 참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믿음을 소유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적 내용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개념을 따라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맥마혼은 이렇게 진술한다:
전략적으로 카톨릭 대표자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에게는 그 용어들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이 부분을 그들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동기는 자신들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간교하다. 예를 들어, ‘은혜에 의한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행위가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카톨릭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혜란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여러 공적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톨릭이 표현하는 ‘은혜에 의한 구원’은 복음주의자들이 의미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의미에 있어서만의 차이가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차이이다.
마지막으로, 맥마혼은 평신도 변증론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 변증론자들은 카톨릭 교회를 위해서 변론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용들은 그 어떠한 것도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다. 통합 운동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카톨릭 변증론자들의 의견을 (공식적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마치 카톨릭 교회가 믿는 내용인 것처럼 개신교 신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카톨릭 변증론자들의 말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들릴지라도 그들의 변론은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 교리 및 예식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맥마혼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미혹하는 속임수가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준다:
예를 들어, 카톨릭 변증자는 주장하길, 복음주의 학자들과 카톨릭 학자들과 함께 점검한 결과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듯 마리아에게 기도하거나 예배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우 나는 마리아를 예배하면서 자라났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마리아에게 훨씬 더 많이 간절하게 기도하며 자라났다. 나의 카톨릭 친구들과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어떤 우상 숭배가 아니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예배하도록 교회에서 배우며 자라났다. 마라아에게 156개의 기도를 드리는 묵주(Rosary) 기도는 우리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마리아에게 드려지는 수백 수천의 호칭기도가 있으며 성자들에게 드리는 셀 수 없는 호칭기도가 있다. 이러한 기도들 때문에 나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께 드릴 시간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것으로서 나만이 아니라 모든 카톨릭 교인들이 매일 겪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 움직임이 왜 잘못인가?
그렇다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기독교를 향한 미혹’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몇 명의 정신 나간 점쟁이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현재 진행 중인 위대한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카톨릭 교회가 정말로 새롭게 변하였다면 왜 바벨론 포도나무와 분명히 연결된 여러 관습들과 믿음들을 제거하지 않는가? 교회 내에 이방 믿음이 들어옴으로 기독교의 교리가 왜곡되던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와 바벨론 종교의 조합이 잘못되었노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그러한 교황의 선언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사건들이 발생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1986년,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바티칸은 평화를 위한 특별 기도의 날을 정하고 세계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따라서 불교, 힌두교, 정령 숭배자들, 여러 교단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로마 교황의 초청을 받고 한 자리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신과 여신들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이 모임을 주관하였던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이루길 원하는 평화에 복음이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억만명의 카톨릭 신도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예식과 규례와 전통에 충성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복음을 알고 자신들의 양 떼들을 위한다고 하는 카톨릭 변증론자들은 왜 카톨릭 신도들이 이방종교 및 풍습을 따르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까? 맥마혼이 언급한 것처럼 “대신, 그들의 노력은 세계적인 제국을 세우기 위해 바티칸의 최대의 위협인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미혹하는 것이다.”
어떻게 넓은 길이 좁은 길이 될 수 있을까?
사탄이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 중에 하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복음이 타당하지 않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또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복음을 혼미케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오해하게 하거나 복음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분별력을 키우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가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훈련이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데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훈련을 시도해보면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 실습해 보기 위해 마태복음 7장을 의도적으로 엉터리로 인용해 보자.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니 그리로 들어가는 가는 사람이 적다. 그러나 넓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고 들어간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 중에 복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용이 거짓임을 즉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거짓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내용임을 확신할 것이다.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매우 좁다. 넓은 문은 속이는 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간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주님만이 “그 길”이요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 (요 14:6).
이러한 근본적인 성경적 진리를 인식하는 가운데 현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배교의 동향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한때 진리의 길은 좁다고 믿던 사람들이 이제는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넓다고 믿는 것 같다. 점점 기독교는 모든 종류의 믿음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너무 배타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믿음은 타락한 것이다.
나는 복음은 좁은 길이라고 믿는다. 또한 복음만이 하늘 아버지와 영원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 좁은 길이 넓혀지거나 타협된다면 그 길은 더 이상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이다. 그리고 넓은 길의 종착역은 영원한 멸망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대해 교훈하신 것을 잊지 말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 24:4-5, 23-24). 덫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출처] 5. 넓은 길, 좁은 길 - 새 포도주와 바벨론 포도나무 - 로저 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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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 주의해야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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