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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개혁주의 (김병혁 목사)

가장 좋은 개혁주의 (김병혁 목사)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571
 

아키님과 같은 글을 대할 때마다 한국 교회, 특히 한국 장로교회는 여전히 개혁된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도 장로교회라고 하면 다 개혁된 신학과 신앙을 담보한 것인양 착각하고 있으니 개혁의 목적을 생각하면 암담하기까지 합니다. 개혁주의라는 낱말이 한국 교회에서만큼 다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을 찾기 힘듭니다. 보수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그렇고, 현상적인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이도 다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또 주일 성수, 십일조,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이와 심지어 교히 연합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도 자신들의 사상적 근원이 개혁주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한국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역사적으로 바르게 개혁된 것을 아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무분별하게 오용되고 있는 개혁주의라는 신학 사상을 감싸고 있는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와 혼합주의와 회의주의의 표피를 벗겨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참여하였던 죠지 길레스피가 말한 '가장 좋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한 개인이나 종파적 성경의 특정 세력에 의해서 혹은 사회 문화적 영향에 민감한 개혁주의가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틀어 변함없이 고수되며, 고백되어진 개혁된 신학의 산물로서의 개혁주의의 원형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칼빈 신학의 영향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교리가 불변하는 진리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진리 안에 확고히 서 있는 성경적 진술이므로 우리는 이 고백의 성격이 이 시대의 정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진리로서 판단받는 성도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개혁주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늘 여유롭게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란 진리에 관하여 엄밀한 인식과 통찰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결코 환영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키님의 글 속에 언급된 예정론과 제한 속죄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일면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예정론과 제한 속죄를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매우 불쾌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은 항상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하며, 전도나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이 주제를 피해 가려거나 모종의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만들려고 합니다. 아르미니안의 예지예정론이 나오게 된 실제적인 배경도 이와 같습니다.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 드러난 아르미니안의 주장을 보면,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인간의 타락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택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종래의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타락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주장을 고집함으로써 보편 구원론으로 가는 문의 빗장을 활짝 열어 놓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장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라는 개념은 수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한 속죄를 거부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도미노적 논리는 진리에 관한 아노미적 현상을 야기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하되, 유기자에 관한 절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말하되, 하나님의 택자만을 죽으시는 것은 사람보다도 사랑이 없는 행위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이율배반적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주권의 권한은 제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 그 은혜 역시 사람 편에서 동의하는 것이어야 인정하겠다는 오만 불손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아르미니안의 발상이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기독교 주류 (구원) 사상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교회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진 것인가? 제 생각에는 오늘날 교회와 신학의 관심이 늘 인간론 중심으로 편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예정론이나 제한 속죄론 뿐 아니라 신학의 거의 모든 테제들을 인간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 믿음의 선지들이 하나님의 예정과 택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상을 통하여 누렸던 그 귀한 보화와 같은 진리의 풍성함과 부요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혁자들은 예정론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조차 겸손과 인내를 발휘할 것과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빛을 전달해야 할 것과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향하여 성경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신앙적 근거를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예정론을 교회와 성도의 내적 성숙과 진정한 화해의 밑거름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보편적인 장로교회들은 이러한 진리의 보화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개혁주의에는 관심이 없는 명목뿐인 (자칭) 개혁주의자들에 의해서 진정한 개혁주의가 훼파되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심각하게 되돌아 보지 않는 한, 가장 좋은 개혁주의로의 회귀와 회복은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주께서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금이나마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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