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4.1 신사도운동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4.1.1 신사도운동의 사도직에 대한비판
자료출처http://blog.daum.net/kkho1105/7245
개혁신학입장에서는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개념(고후 8:23, 빌2: 25; 행 14:4, 14)이 아니고, 특수한 의미의 그리스도의 사도들(고전12:28,29; 엡 4:11)은 그 직분이 중단되었다고 본다. 후자의 의미를 가진 사도에 관해서도 숫자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교회사에서 첫 세대에 국한된 인물로 본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에베소서 4:11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오중 직임이라는 것에 대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교회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였던 어떤 직책들과 교회에 영구히 존속하고 있는 직책으로 구분한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들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의 직책이며,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는 목사와 교사를 지칭했다.
그는 “사도”의 자격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로서 주님에 대한 증인(고전 9:1; 15장)이 되어야 하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임명받은 자,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은 자로서(엡 3:2-3; 10-12) 사도적 권위뿐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서(고전 4:16, 빌 3:17)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여야 하기에(히 2:4, 요 14:2),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사도직이 계승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도행전 12장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의 계승자가 임명되지 않았음을 볼 때 사도직이 임시적이라는 것이다. 교황제도는 이것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라고 했다.
박윤선도 “사도는 기독교 설립의 기초 성직으로서 예수님이 직접 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으로 교회 창설기에 있었고(고후 12:12), 그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엡 2:20)"며 개혁신학적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로이드 존스와 마찬 가지로 사도의 직분은 신약의 선지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세우는 터(마 16:8, 롬15:19-20, 엡 2:20)로서 특별한 일시적인 직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사도들 가운데 회심한 바울을 예로 들면서 사도의 자격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에게는 천국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었고(마 10:7 , 막 3:14, 눅 9:2, 롬 1:1, 갈 1:11, 고전 15:3-4), 둘째는 병 고치는 권능이 있었으며(마 10:8, 막 3:15, 눅 9:1, 행 19:11-12) 셋째는 부활의 증인들이였고(행 1:22, 2:32, 고전 15:8, 15), 넷째 성령으로 충만하고(행 2:4, 9:17), 다섯째 성령과 권능으로 표적과 기적들을 행하였다(행 2:43, 5:12, 14:3, 고후 12:11-12). 고 제시한다.
바울은 자기의 경우 이 조건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고전 9:1; 15:8, 9; 행 9:3-8 등등). 특히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였으나, 디모데를 결코 사도라 지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도권 계승”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오늘날에는 “사도적인 사역”은 존재한다 할 수 있으나 “사도라는 직임”은 종료되었다 할 수 있다.
4.1.2 신사도운동의 선지자직에 대한 비판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현대시대의 선지자직의 존재에 대하여도 우리는 그 견해를 달리한다. 로이드 존스는 “선지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로이드 존스는 신약 누가복음 2장에 안나라는 선지자와 사도행전에 빌립의 예언을 하는 딸 넷(행21:9)과 안디옥교회에 여러 선지자들(행11:27, 13:1)은 임시적인 것 이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아직 진리가 글로써 기록되어 설명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 이였기에 생긴 직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신약성경이 글로 쓰여 지게 되자 선지자직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교사와 목사와 그 밖의 다른 직책들에 대한 소명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선지자직의 소멸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별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을 세워(행 11:28, 13:1-2, 15:32, 고전12:10) 하나님의 비밀 계시를 알게 하였고(엡 3:4-5),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의 터로 삼았다(엡 2:20). 이 선지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후로 교회에서 소멸되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왕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운명과 주변국들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말하였다. 이들의 예언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약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의 연속선상에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의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구약의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선지자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의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점쟁이(fortuneteller)의 역할은 아니였다.
신약시대의 선지자직은 성경이 기록되는 과도기적 상황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임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이요 사도성이 있는 성경을 신앙과 교회의 진리의 터로 삼고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역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은 에베소서 2장 20절의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의 돌이 되셨느니라”이다.
여기서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도 개인의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것(행 11:28)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행 21:11)대한 예언이다. 이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가보의 경우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으로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예언은 바울이 그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음전파가 최우선이고, 복음전파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주의 자들은 성경 형성시기에 존재했던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들은 정경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는 그 자격과 역할로 인해 초대 교회역사 안에서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사라진 직분의 속성들은 영구히 존재한 직분에 편입되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신사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직접메시지를 받는다는 현시대의 사도와 예언자들의 주장은 주관적 환상체험과 예언에 불과하며,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4.1.3 신사도운동의 은사주의 비판
신사도교회는 개개인의 은사를 강조함에 있어서 일반 은사를 무시하지 않지만 특별한 몇 가지 은사라는 예언, 영분별, 지식,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오중직임이라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교사, 목사직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며 예배형식의 급격한 변화도 허용한다. 또한 이러한 결과 현대에 “사도”라는 직분을 부활시키는데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은사주의를 지형하면서 교단내의 성장하는 교회들과 심지어 개혁교회들까지도 신사도교회로 지칭하면서 신사도운동이 현대의 보편적인 경향인 것으로 과장하고 있다.
신사도교회는 교회의 전통과 개혁주의 교단들과 전통적인교단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 체계를 추구하고, 사도직을 성령의 권위를 내세워 강조함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개인에게 위임하고 있다. 또한 사도라 칭하는 권위자는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개인의 비전과 목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 안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개인이 권력을 가질 때 성경적 교회론을 실현시킬 수 없고 부패함을 교황정치의 선례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신사도운동의 권력구조는 개혁교회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다
4.1.1 신사도운동의 사도직에 대한비판
자료출처http://blog.daum.net/kkho1105/7245
개혁신학입장에서는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개념(고후 8:23, 빌2: 25; 행 14:4, 14)이 아니고, 특수한 의미의 그리스도의 사도들(고전12:28,29; 엡 4:11)은 그 직분이 중단되었다고 본다. 후자의 의미를 가진 사도에 관해서도 숫자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교회사에서 첫 세대에 국한된 인물로 본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에베소서 4:11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오중 직임이라는 것에 대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교회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였던 어떤 직책들과 교회에 영구히 존속하고 있는 직책으로 구분한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들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의 직책이며,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는 목사와 교사를 지칭했다.
그는 “사도”의 자격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로서 주님에 대한 증인(고전 9:1; 15장)이 되어야 하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임명받은 자,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은 자로서(엡 3:2-3; 10-12) 사도적 권위뿐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서(고전 4:16, 빌 3:17)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여야 하기에(히 2:4, 요 14:2),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사도직이 계승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도행전 12장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의 계승자가 임명되지 않았음을 볼 때 사도직이 임시적이라는 것이다. 교황제도는 이것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라고 했다.
박윤선도 “사도는 기독교 설립의 기초 성직으로서 예수님이 직접 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으로 교회 창설기에 있었고(고후 12:12), 그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엡 2:20)"며 개혁신학적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로이드 존스와 마찬 가지로 사도의 직분은 신약의 선지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세우는 터(마 16:8, 롬15:19-20, 엡 2:20)로서 특별한 일시적인 직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사도들 가운데 회심한 바울을 예로 들면서 사도의 자격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에게는 천국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었고(마 10:7 , 막 3:14, 눅 9:2, 롬 1:1, 갈 1:11, 고전 15:3-4), 둘째는 병 고치는 권능이 있었으며(마 10:8, 막 3:15, 눅 9:1, 행 19:11-12) 셋째는 부활의 증인들이였고(행 1:22, 2:32, 고전 15:8, 15), 넷째 성령으로 충만하고(행 2:4, 9:17), 다섯째 성령과 권능으로 표적과 기적들을 행하였다(행 2:43, 5:12, 14:3, 고후 12:11-12). 고 제시한다.
바울은 자기의 경우 이 조건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고전 9:1; 15:8, 9; 행 9:3-8 등등). 특히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였으나, 디모데를 결코 사도라 지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도권 계승”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오늘날에는 “사도적인 사역”은 존재한다 할 수 있으나 “사도라는 직임”은 종료되었다 할 수 있다.
4.1.2 신사도운동의 선지자직에 대한 비판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현대시대의 선지자직의 존재에 대하여도 우리는 그 견해를 달리한다. 로이드 존스는 “선지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서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로이드 존스는 신약 누가복음 2장에 안나라는 선지자와 사도행전에 빌립의 예언을 하는 딸 넷(행21:9)과 안디옥교회에 여러 선지자들(행11:27, 13:1)은 임시적인 것 이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아직 진리가 글로써 기록되어 설명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 이였기에 생긴 직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신약성경이 글로 쓰여 지게 되자 선지자직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교사와 목사와 그 밖의 다른 직책들에 대한 소명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선지자직의 소멸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별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을 세워(행 11:28, 13:1-2, 15:32, 고전12:10) 하나님의 비밀 계시를 알게 하였고(엡 3:4-5),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의 터로 삼았다(엡 2:20). 이 선지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후로 교회에서 소멸되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왕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운명과 주변국들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말하였다. 이들의 예언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약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의 연속선상에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의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구약의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선지자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의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점쟁이(fortuneteller)의 역할은 아니였다.
신약시대의 선지자직은 성경이 기록되는 과도기적 상황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임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이요 사도성이 있는 성경을 신앙과 교회의 진리의 터로 삼고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역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은 에베소서 2장 20절의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의 돌이 되셨느니라”이다.
여기서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도 개인의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것(행 11:28)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행 21:11)대한 예언이다. 이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가보의 경우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으로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예언은 바울이 그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음전파가 최우선이고, 복음전파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주의 자들은 성경 형성시기에 존재했던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들은 정경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는 그 자격과 역할로 인해 초대 교회역사 안에서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사라진 직분의 속성들은 영구히 존재한 직분에 편입되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신사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직접메시지를 받는다는 현시대의 사도와 예언자들의 주장은 주관적 환상체험과 예언에 불과하며,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4.1.3 신사도운동의 은사주의 비판
신사도교회는 개개인의 은사를 강조함에 있어서 일반 은사를 무시하지 않지만 특별한 몇 가지 은사라는 예언, 영분별, 지식,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오중직임이라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교사, 목사직임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며 예배형식의 급격한 변화도 허용한다. 또한 이러한 결과 현대에 “사도”라는 직분을 부활시키는데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은사주의를 지형하면서 교단내의 성장하는 교회들과 심지어 개혁교회들까지도 신사도교회로 지칭하면서 신사도운동이 현대의 보편적인 경향인 것으로 과장하고 있다.
신사도교회는 교회의 전통과 개혁주의 교단들과 전통적인교단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 체계를 추구하고, 사도직을 성령의 권위를 내세워 강조함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개인에게 위임하고 있다. 또한 사도라 칭하는 권위자는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개인의 비전과 목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 안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개인이 권력을 가질 때 성경적 교회론을 실현시킬 수 없고 부패함을 교황정치의 선례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신사도운동의 권력구조는 개혁교회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