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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의 술객들

신사도 운동의 술객들
정이철목사 캔톤한인교회
자료출처 http://www.cantoncrc.com/bbs/zboard.php?id=column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출 7:11)

   신사도 운동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매우 효과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신사도 운동이 사단의 큰 미혹이라고 말하기를 조금 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넘치는데,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모양이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보다 더 화려하고 뭔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저들에게 임하리니”(살후 2:9,10). 신사도 운동에서 나타나는 모든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부흥의 실상은 바로 이것이다. 사탄의 능력과 표적과 기적들이다. 그들은 마귀의 각종 은사와 능력을 세상에 선보이며 요란스런 부흥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각종의 기적을 행하며 영혼들을 사냥하는 신사도 운동가들은 우리 시대의 세련된 술객들이다. 그들에게서 사탄의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금이빨 만들기, 질병 고치기, 빈번한 환상, 일상의 입신, 아무 때나 선포되는 거창한 예언들, 괴상망측한 기름부음, 이웃집 아저씨처럼 자주 나타나는 고위직 천사들 ... 이런 일을 행하는 술객들이 근사하게 사도와 선지자로 포장되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로 인해 사람들은 흥분한다. 감정이 고무되며 열성이 더해진다. 사람들이 더욱 모인다. 급속히 부흥한다고 자랑한다. 과연 진리일까? 이것이 진정 성령의 사역일까? 의심해보지도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다. 망설이고 미적거리다가 서서히 발을 담그다가 맛을 보고 깊이 빠지는 사람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의 생각과 판단이다. 어떤 이는 기왕에 시작한 목회,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뭔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며 작정을 하고 신사도 운동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어떤 이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이미 이 부류의 은혜의 맛을 보고 영혼이 뜨겁게 달구어진 교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아무 소신도 밝히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이렇듯 신사도 운동의 기세가 당분간 꺾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끝은 빤하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과연 사도와 선지자라 자랑하는 신사도 운동의 해괴한 엘리트들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일까? 지난 2,000년 동안 보이지 않던 그런 뛰어난 집단이 어디서, 어떻게 출현했을까? 조금이라도 당당하려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신사도 개혁운동을 이끄는 그 위대하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출현에 대한 성경적 Basis가 무엇인지 늘 예민하게 살폈다. 그러나 아직 발견한 것이 전무하다.
   1517년에 독일의 수도사였고, 사제였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서학 교수였던 루터로부터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남긴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운동의 요지는 구원이 인간의 그 어떤 신앙적인 행위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면죄부를 비롯한 교회의 어떤 인위적인 전통이나 의식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은 오직 그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문제라는 성경의 선언을 교회에 다시 회복시켰다.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그 개혁운동의 모토였다. 성경 원어에 정통했던 루터가 깊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시대의 교회의 실상을 보니 개혁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터가 앞장을 섰지만, 그 주체는 성경이었다.  
   그렇다면 신사도 개혁운동의 전위부대의 최정예 요원들인 사도와 선지자들의 출현에 관한 성경적 모토는 무엇일까? 그들이 주장하는 가장 근거가 되는 말씀은 에베소서 4:11,12절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을 온전케 하려고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이 다섯 가지 직분을 주셨다. 그런데 세속화된 사탄의 교회들과 교권을 틀어쥐고 횡포를 부리는 사악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보존하기 위해 사도와 선지자들이 압살하여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종말의 대추수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신앙개혁운동을 시작하였고, 결국 2001년부터 사도와 선지자는 다시 출현했다.
   지금 현재 세계의 교회는 하나님이 수립하신 새로운 영적질서를 거역하는 죽은 바리새인 교회들과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대부흥 운동을 확산시키는 신사도 개혁교회들로 나뉘어 졌다. 죽은 중세의 로마교회와 새로 태동한 개신교회와 같은 이 두 세력은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중이다. 신사도 개혁 교회를 이끄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일반 목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능력으로 굉장한 부흥과 추수를 일구고 내고 있다. 장차 온 세상에 이 부흥의 물결이 넘칠 것이고,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분들이 위대한 영적 엘리트들로 변신하는 과정은 참 요상해서 더 놀랍다. 이상하게 그들의 이력들은 요상하고 찬란하다. 감옥살이, 마약, 사탄과의 부르스, 동성연애, 어린시절부터 범상치 않는 천사들의 방문, "네가 결혼하는 것이 질투난다! 독신으로 살면서 나하고만 연애하자!"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애정공세 ... 타드 밴틀리, 밥 존스, 폴 케인 같은 신사도 개혁 운동의 쟁쟁한 최고 엘리트들의 영웅적 설화들이다. 
   그 외에도 수 많은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이 계신다. 아마 캔자스시티의 IHOP 기도원에 가서 "이 자리에 계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은 손들어 보세요!"하면 평군 30여개의 손이 올라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력을 조사해 보면 놀라운 공동점들이 있을 것이다. 바른 신학과 건전한 영적인 훈련과 정상적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이 결코 사도와 선지자일 수 없다는 신학적 증거가 드러나면 그들은 끝이다. 그 순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의 주장하는 성경의 근거를 조금만 연구하면, 자신들이 사도이고 선지자라 주장하는 것이 황당한 일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성경이 인사하지도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경계한 이단으로 신분이 바뀔 것이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요이 1:10).
   굳이 복잡하게 돌려서 여러 말 할 이유가 없다. 가장 먼저 사도, 선지자를 운운한 선구자격인 인사에 대해서 알아보면 된다.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보자!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주로 무슨 일을 벌였던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그가 사도, 선지자 타령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외에 그가 했던 일들을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신사도 운동의 특별 계급인 사도와 선지자의 기원을 어디서부터라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많다. 그러나 가장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인물은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이라는 인사였다. 그는 1900년 초에 일어난 미국의 오순절 부흥운동의 한 지류에서 나타난 과격한 은사주의자였고, 1940-5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대표적인 성령운동의 이단이었다. 
   교회를 심각하게 해치는 이단 중에서 참 다루기 까다운 이단이 바로 성령파들이다. 성령! 성령! 하면서 지나치게 신비주의 일변도로 치닫다가 나중에는 심히 혼탁해 져서 사탄의 역사와 구별이 안 되는  노선으로 전락하는 부류가 이들이다. 초대교회 시대의 대표적인 성령파였고, 그 모습이 요즘 신사도 운동과 너무나도 유사한 그룹이 있었다. 선지자, 예언, 환상 ... 문타누스라는 사람이 이런 운동을 하다가 결국 이단으로 전락했고, 그 뒤를 이은 수 많은 신비스런 은사주의 이단들이 2,000년의 교회사를 촘촘히 수 놓았다. 
   윌리엄 브랜험은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온갖 신비적인 일들이 그에게서 일어났었다. 그는 천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나고 대화했다. 집회를 인도할 때에 자신과 함께 동행하는 천사에 대해서도 자주 소개했다. 수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는 신비적인 능력도 발휘했다. 오늘 날 신사도 운동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본 골격이 그에게서 이미 모두 나타났다.
   윌리엄 브랜험의 가장 심각한 점은 자신이 종말에 보냄 받은 사도이며 선지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오늘 날의 신사도 운동의 사도, 선지자 타령이 태동했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직통의 예언 계시를 전파하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흥미를 느끼고 추종하면서 당시에는 큰 부흥과 세를 이루었었다. 그 외에도 삼위일체 교리가 사탄적이라고 주장했고, 77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였고, 사탄이 하와를 성적으로 범하여 타락시켰다고 했고, 곧 시멘트 벽을 자유로이 통과하며 활동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건전한 교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해괴한 행동과 사상으로 인해 결국 브랜험은 1949년에 자신이 소속한 하나님의 성회의 49회 씨애틀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되었다. 성령의 은사운동에 관하여 가장 열려있는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가 가장 먼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 정도로 그의 부흥운동은 부패했고, 위험스러웠고, 사탄적이었다는 것이다.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조류를 “늦은 비 운동”(The new order of later rain)이라고 하였다. 생존한 사도들과 함께 임시적으로 존재하면서 교회를 섬긴 선지자들이 활동하였던 2,000년전 초대교회 시대를 "이른 비 운동의 시대"라고 규정했고, 2,000년 후에 다시 사도, 선지자가 출현하여 일으키는  부흥운동을 늦은 비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지구상에 더 이상의 부흥은 있을 수가 없다. 늦은 비 다음에는 다른 비가 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현재 70대, 80대 노객들인 밥 존스와 폴 케인 같은 신사도 운동의 원로 선지자들이 이미 20대, 30대 젊은 나이에 당시의 이단 윌리엄 브래험과 교제하면서 영적인 토대를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 날의 신사도 운동을 늦은 비 운동에 뿌리를 둔 운동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50년대에 사탄의 변질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브랜험을 통하여 일하던 영(Spirit)이 밥 존스와 폴 케인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착실하게 미국 교회 속에 잠입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존 윔버의 빈야드의 강의 원류가 되었고, 그 강에서 마이크 비클이라는 대어가 자라 캔자스시티의 IHOP 기도원을 이루면서 크게 폭팔하였다. 그것이 신사도 운동이다. 
   불현듯 출현하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이 벌이시는 신사도 개혁 운동은 성경을 연구하다가 일어난 개혁운동이 아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교회에 사도, 선지자의 직분을 회복하게 한 것이 아니다. 신사도 개혁 운동이라는 것은 근본 시작부터 불건전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찾아온 정체불명의 영들의 음성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도, 선지자라는 단어가 있는 성경 구절이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그들에게 도용당하였을 뿐이다.
   1517년에 시작된 개혁운동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일하는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신사도 개혁운동은 웃기는 영들이 한심한 그들을 통하여 일하는 개혁운동이다. 그러니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 외에 더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소명도 다 그렇다. 그들에게 다가온 영이 “너는 종말 대를 위해 예비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이다! 너는 영혼의 대 추수를 위해 쓰임 받을 선지자이다!”라고 하면, 그대로 믿는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하나님이 너를 보내신 것을 어떻게 믿겠느냐?" ... 이런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역사하는 영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결코 성령이라고 볼 수가 없다. 삼위일체 교리를 사탄의 교리라 하고, 사탄이 하와를 성적으로 타락시켰다 하고, 휴거의 날짜를 정하였지만 맞지 않고, 마음대로 벽을 뚫고 통과하며 이동하는 종말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임박한 출현을 예고하고, 애완견 데리고 공원산책 나가듯이 집회마다 고위직 천사를 데리고 가고 ... 이랬던 신비주의 이단 윌리엄 브랜험이 이 엘리트 술객들의 원조이다. 그러니 지금 그들 속에 일하는 그 영(Spirit)이 복음을 섬기는 건전한 영이라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이러한 계시가 나오겠는가? 그 활동과 계시가 성경에 종속하지 않는 영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영일 수는 없다.
   그 영들의 음성이 의해 사도, 선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럽고 황당한 일인가? 그들은 겸손하지 않고 우쭐했기 때문에 쉽게 사탄에게 농락 당한 것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사탄이 먼저 알고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사도가 선지자가 되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지고 그렇게 믿어질만한 이적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된 후에 그들은 성경을 보았다. 성경을 보니 근거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한 절 한 절을 떼어서 보면 모든 이단들의 교리의 근가가 다 보이는 책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겸손한 자세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만 하는 책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 그들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이 성경에 있다. "여기 성경에도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신령한 은혜를 입어 크게 쓰임 받는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이야? 네가 나처럼 은혜 받지 못했으며 가만히 있기나 하란 말이야! 죽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골치거리인 너희여! 아무리 기를 쓰고 막으려 해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종말의 대 추수와 개혁의 기차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 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더욱 확실하게 사탄에게 속게 한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잠시 언급한 그 부분을 통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도, 선지자 직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배가 고파 정신 줄을 놓아버린 개가 급히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조롱을 들어야 마땅하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후에 "신사도 운동의 오중직"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글을 쓰는 시간을 만들도록 하겠다. 
   잠시 조금 언급하자면, 이래서 신사도 운동의 사도, 선지자 타령은 허황된 쓰레기 이론이다. 바울이 신약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언급한 성경은 후배 목회자 디도와 디모데에게 쓴 성경이다. 그곳에서 바울은 교회의 중요 직분자들을 어떻게 세우고 훈련할 것인가? 에 대해서 자세한 지침을 주었다.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하여 가장 자세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이 두 성경에서는 어째서 사도, 선지자에 대한 언급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까? 신사도 운동가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은 오직 에베소서의 한 구절만을 가지고 우려먹는다. 그것 하나로 오늘 날에도 사도, 선지자가 있어야 성도와 교회가 온전하여 진다고 주장한다. 참 우습고 유치한 장난이다.
   2,000년 신약 교회의 직분은 바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교회의 장래를 위해 후계자로, 아들로 키우고 사랑했던 후배 목회자 디모데(딤전 3:1-13)와 디도(딛 1:5-9)에게 보낸 가르침에 근거하여 발전되었다. 두 성경에서 바울이 말한 집사는 목회자를 돕는 평신도 직분이다. 사도행전 6장에서 유래하여 오늘 날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내 의견으로는 침례교단이 성경의 집사의 직분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직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했다. 장로와 감독을 당시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그 시대의 같은 목회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다만 교회들이 속한 문화권에 따라서 선호하는 호칭이 달랐을 뿐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문화를 계속 이어받은 교회들은 장로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그래서 유대인 선교에 전념했던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이스 문화와 더 친숙했던 이방인 교회들은 감독이라는 호칭을 선호했다. 감독은 당시 정부의 공무원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바울의 글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호칭이 별다른 구분없이 호환되면서 나타난다.     
   바울의 언급한 집사와 장로(감독)가 신약교회의 중심직분이었고, 출발점이었다. 2세기에 들어서 감독이라는 호칭의 의미가 변했다. 교회가 많아지면서 목회자도 많아졌고, 더불어 무질서한 일들과 이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관리하는 더 권위있는 특수 목회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바로 그 목회자에게만 감독이라는 호칭이 쓰여지시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 날 감리교회와 성공회 등의 교단에 여전히 존재하는 Bishop의 기원이다.
   이 시스템이 더 강화되고 발전되면서 모든 지역의 감독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더 권세있는(?) 감독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로마의 교황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로마교회의 이 시스탬이 너무나 권위적이고 계층적이어서 도리어 교회와 성경을 분리시키는 폐단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목회자간의 계급과 신분질서를 타파해 버렸다. 그 결과로서 오늘 날의 Pastor와 pastor를 도우며 교회를 섬기는 평시도 elder가 등장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성경에 근거한 신약 교회의 직분의 역사이다.
   그러면 사도, 선지자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에베소서의 그 구절은 어디에다 적용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버렸을까? 과도기라는 개념을 떠 올려야 한다. 모든 나라의 건국의 과정에는 국가의 기틀이 온전히 잡히지 못했던 때가 항상 있었다. 과도기이다. 에베소서의 오중직을 언급한 구절은 신약교회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당시의 교회는 여전히 생존한 사도들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교회에 나르는 살아있는 신적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성경을 가지게 된 것은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고 난 후로 수 십년에서 수 백년이 지났을 때였다. 성경이 없었으니 그 당시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말아야 했을까? 그래도 믿음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을까? 그 시기는 말씀금식의 시기였을까?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포되어져야 한다.
   그 역할을 주로 감당하는 직분이 바로 당시의 선지자였다.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고, 직접 보고 들은 복음을 간증하고 전파할 성도들은 수적으로도 희소했고, 또한 하나씩 둘씩 소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누가 뭘 근거로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사람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기록된 성경이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을 성도들에게 먹이셔야 하셨다. "예언", "예언적 설교"라는 것이다. 말씀 선포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계획과 묵상이 중심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중심이 되어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었다. 
   성령께서 쓰시는 사람의 마음에 특별한 말씀의 감동을 부으시고 그를 따라 증거하게 하셨다. 그렇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였다. 그러나 그런 말씀 선포사역에 엄청난 부작용이 따랐었다.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생각이 주가 되어, 때로는 악한 영이 개입되기도 하고 ... 그러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면서 교회에서 외치고 다시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성도들이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의 성경에는 예언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말고 잘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강조했다. 오늘 날에도 같은 일은 쉬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예언은 정말 무턱대고 믿고 좋아할 것이 못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성경없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이 모두 기록되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온 진정한 신약성경의 목록이 확정되었다. 성경의 필사본들이 많아지고 여러 교회에 보급되었다. 교회와 말씀의 상황이 변한 것이다. 기록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고, 성령충만한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적용하는 신앙생활의 패턴이 교회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미 사도들은 다 순교하고 없었다. 성경이 완성되고 신약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졌음으로 사도들이 그때까지 장수하였다 해도 더 할일도 없었다. 선지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성도와 교회를 온전히 교훈하고 가르치도록 성령의 감동을 입어 기록된 성경이 교회에 주어졌는데, 왜 성경을 제쳐두고 직통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겠는가? 선지자 직분은 성경에 밀려서 세례요한처럼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후에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들이 종종 일어났지만, 하나같이 이단이 되어 그 인생들이 허망하고 불쌍해졌다.  
   잠시간의 과도기를 제외하고 신약의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성경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는 떠오르는 태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세례 요한같이 성경과 교회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숨 쉬는 인간도 사도이거나 선지자일 수 없다. 무슨 특이한 기르부음을 천번 만번을 받아도 그렇다. 사도와 선지자가 되는 어떤 코스나, 길이나, 소명이 있다는 말은 모두 사기이고 속임이다.
   진정 그런 말을 하려면 먼저 온 세상의 성경을 다 모아 찢어야 한다. 바울이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멸절시켜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도임네, 선지자임네 떠들어야 이치와 아귀가 조금이라도 맞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음의 최고의 규범인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부르심 받은 목사, 장로, 집사, 교사, 전도사, 선교사 일 뿐이다.      
             
   나는 교만한 공명심 때문에 사도, 선지자 타령이 더 크게 기승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신사도 운동에 앞장서거나 열심으로 가담하는 사람들 중에서 명예와 이름을 탐하지 않는 사람을 못 보았다. 그쪽에 선 모든 사람이 사도이거나 선지자이다. "나는 사도도 선지자도 아니고 기도하는 무명의 성도일 뿐이오! ..." 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다. 모두가 사도, 선지자 되기 위해 안달이 났다. 사도, 선지자 되었다고 과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뿐이다.
   이미 6개의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거나, 교류할 수 없는 불건전한 위험인물로 고시된 한국의 대표적인 신사도 운동의 기수인 분이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 설교할 때에 “피터 와그너는 그의 책에서 한 사람이 오중직 중에서 하나의 직분만 받는다고 했는데, 틀렸어요! 저에게는 오중직이 모두 임했습니다. 수 많은 정상급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 또한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 옆에서 계시를 전하였던 한 고위직 천사가 저와 함께 하고 있다고 여러 선지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행여 사실이라 해도 그렇게 자랑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사도, 선지자 타령하는 사람들 중에서 겸손한 사람이 없다. 대부분 자랑 못해서 안달이고, 교만하지 못해서 난리다. 그들은 자기 머리를 스스로 못 깍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기 위해 돕는다. "내가 000에 대해서 받은 계시는 이러합니다 ..."라면서 서로 높여주고 자랑해주는 신비하고 놀라운 예언을 남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름없이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 그들 중에는 없다. 아마도 사탄의 속성과 연관된 현상일 것이다.
   사냥하는 사탄의 영들이 “너는 이제부터 사도다! 이제부터 선지자다!”하니 그대로 믿고 좋아서 뛴다. 영적으로 존귀하게 높아진다는데 싫어하기도 쉽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신사도 개혁 운동의 최고 엘리트 계층인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실상이다.
   그들에게 다가온 영들이 더 믿고 깊이 빠지도록 기적을 보여주고 환상을 던져주니 더 잘 믿고 미친다. 그들의 영성과 부흥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다. 결코 성경을 연구하고서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에서 사라진 것을 되 찾아낸 성경중심의 개혁운동이 아니다. 사도와 선지자 타령은 이미 마귀에게 완벽하게 사기 당하여 자기의 영혼을 내준 자들의 노래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흥은 먼저 마귀의 주구가 된 자들이 벌이는 구성진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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