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교회 비판
셀교회 비판
- 2004년 신학교 2학년 1학기 조병수 교수님의 '초대교회의 형성' 과제 리포트
자료출처 http://blog.daum.net/kkho110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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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지금의 교회들의 가장 큰 주제는 ‘성장’이다. 대형이건 소형이건 그 크기와 규모에 상관 없이 모든 교회들이 ‘성장’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다.
이러한 교회 성장에 대한 관심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과연 이 교회의 성장이라는 측면이 ‘복음 전파’와 동일시 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문제제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히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믿는 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들과 행사들이 실상은 전혀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교회 성장만을 위한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들 또한 순전히 성경적인 것인가는 정확히 따져봐야 한다.
수 많은 교회 성장을 위한 방법론들의 대부분은 경제학에서 왔음을 우리는 그 구조를 조금만 따져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기업 경영 원리와 유사하다. 비근한 예로 모 교회가 실시한 ‘맞춤식 전도’라는 것 역시 기업의 광고 방식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그러한 방식들이 필요하고 여러 방법들이 제시되고 연구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것에만 집중해서 그것이 마치 전부인양 광고하고 더해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성장이야 말로 교회의 성장을 위한 최고의 상품인 것처럼 되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상품들을 통하여 이룩한 성장과 확장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며 어떤 식으로든 성장만 한다면 모든 활동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이상인 이윤의 창출이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열광적으로 환영받으면서 대형교회들이 앞장 서서 전파한다는 사실에 거의 절망감을 느낄 정도이다.
어떤 교회에서 마련한 전도 프로그램 박람회의 제목은 ‘change- up'이었다. 얼마 전 모 증권회사와 더 오래전 모 컴퓨터 회사의 상품 광고 제목 역시 그것이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어감 그리고 때 맞춰 미국에서 날리던 박찬호 선수의 주무기인 이 단어가 가진 파생력은 훌륭한 광고 효과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교회가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이 상품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사실에 심한 자괴감이 오기도 한다.
‘셀 교회 운동(Cell Church-Movement)'은 이러한 교회 성장을 위한 인간들의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노력의 사생아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단지 성공해서 적자보다 더 대접받는다는 것 말고는 별 특징이 없다. 그래서 셀 교회의 중요한 지침서인 “셀 교회 지침서 - 교회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읽고 그 문제를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2. 본문
2.1 셀교회 - 그 경제 논리
일단 이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저자의 해박한 경제원리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구조를 취한 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사용한 많은 단어는 지극히 경제적이다.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저자는 많은 부분에서 사업(business)이라고 표현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불황(depression), 해고(fire), 성령의 기획(planning, project), 단위(unit), 감독(supervisor), 조직관리, 인턴, 그룹, 전략 등의 용어들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중에서 기존 교회들이 혹은 선교단체들이 사용한 단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러한 단어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지극히 기업 용어와 뜻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제 20장, 셀 확장 전략 개발하기’의 경우는 어떤 지역에 입점하기 위한 쇼핑센터에게 제공할 기업 자문(consulting)으로도 훌륭한 전략들과 자료들이 가득하다. 20장에 있는 소제목들만 정리해도 얼마나 경제 활동적 성격이 강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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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활동을 위해 기도의 기초를 세우라 2.자료를 확보하라 3.사역 전략지도를 만들라 4.도시를 주택 단위로 나누라 5.인구 피라미드를 만들라 6.보고서용 서식을 만들라 7.주택지구 분석표를 만들라(다양한 분석표와 소견들) 8.주택지구를 영역별로 분류하라 1)신도시 개발 교외 지역 2)성숙기의 교외 지역(도시 조감도) 3)노화기의 교외 지역 4)회춘기 교외 지역 5)시골, 공업지역 또는 특수 교외 지역 9.주민들의 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라 10.전략적인 문건을 만들라 11.핵심 침투 지역을 선택하라 12.바둑판 셀 개척 양식을 사용하라 13.실제적인 전략을 세우라 |
사실 이러한 방법론들은 이미 교회 성장학자들이 이미 사용하는 방식들이다. 곧, 셀교회 운동이 교회 성장학에 그 근간을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지 셀교회의 경우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극대화해져서 단일한 구조로서의 교회에서 수많은 지점들을 연결한 대형 그룹 형태의 셀 교회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들과 문건들은 얼마나 셀 교회의 방법론이 세속적이고 기업 원리를 쫓아가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성장과 운영에 많은 기업 경영 원리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일부 방법론에 한정된 것이지 교회의 전체를 지배하고 구조를 결정하는 경우는 없다. 교회 성장학자들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셀교회와 그 밖의 교회 성장학자들의 논리가 얼마나 세속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과 특성이 왜곡되어지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 세속적인 방식이 침투해서 교회의 정체성 자체를 변화시키고 왜곡한다는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본 근본적인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셀 구조가 바람직한 경제체제인가를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재 살아남은 대형교회들의 경우 거대한 쇼핑센터가 들어옴과 동시에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는 현상과 비슷한 형태의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럼으로 모든 교회는 셀교회로 가야한다는 논리를 이 책의 저자는 편다. 왜냐면 셀교회는 어떠한 물리적 공간의 필요성이 없고 소그룹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한 논리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다단계 업체들이 주로 사용하는 논리와 셀 교회의 주장하는 바가 거의 같다.
일단 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구조, 즉 각 셀들의 조직과 전체 구조, 그리고 관할 목사등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완벽한 피라미드형임을 알 수 있다. 구성원, 구성 단위(unit) 하나 하나가 연계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형 구조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각 구성단위들은 독립적인 활동이 보장이 되며 각 단위가 또 스스로 새로운 단위를 하부 구조로 창조해냄으로써 조직이 더 거대해진다. 또, 그러한 구조들이 모임으로서 상부 구조로 갈 수록 이윤과 권위가 상승하는 권위의 역 피라미드화 또한 동일하다. 가장 결정적으로 상위 단위로 갈 수록 별도의 노력 없이도 계속적인 이윤의 성장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가장 큰 유사점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피라미드 기업이 수 많은 부작용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살아남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도 사람을 몇 명만 잘 끌어 모으면 엄청난 이윤을 낼 수 있다는 사행심과 욕심이 수 많은 사람을 망하게 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욕심을 교묘하게 교회 안에 끌여들인 것이 바로 셀 교회 운동이다. 교회 성장과 부흥에 눈이 먼 목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교회에 성도수가 몇 만임을 증거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다단계 판매 형태의 목회 양식을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과연 이러한 형태가 올바른 교회의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대형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그룹의 셀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평신도를 세워서 작은 셀들을 만들어서 계속 커진다고 했을 때 최종적인 영광과 권위(이윤)는 어차피 목사에게 돌아간다. 목사가 성도를 두 번 속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성도에 대한 돌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 창출의 도구로 보고 또 불로소득을 노리는 다단계형의 기업은 사회의 독버섯과도 같다. 그와 유사한 형태의 교회가 생겨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목회자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잘 훈련된 최소의 인원들을 효율적으로 훈련시켜서) 거대한 규모의 교회를 소유하게 된다는 성장 지상주의와 대형교회를 향한 목사들의 잘못된 시각이 탄생시킨 사단의 방법이다. 셀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형교회를 거부한다는 자신들의 논리는 그들 스스로 대형 셀 교회를 그들의 성공의 증거로 내세움으로 인해 무너진다.
2.2 셀교회 - 비성경성
이 책에서는 셀 교회의 많은 부분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다. 주로 신약의 초대교회를 주요하게 다룬다. 소규모이고 가정에서 모였으며 능동적 형태였다는 점을 이들은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을 넘어서서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알레고리적 해석을 넘어서는 비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하겠다.
2.2.1 공동체에 대한 오해
신약의 초대교회는 분명히 소그룹 형태였고 또한 분명히 가정에서 모여서 예배 드렸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이를 증명한다. 셀 그룹이 주장하는 근거 역시 초대교회가 자신들의 근거이고 동일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즉, 구조적 유사성을 근거로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문제는 과연 초대교회의 교회 형태가 가장 궁극적이며 성경에서 말하고 주장하는 절대적인 교회 형태인가하는 점이다. 물론 초대교회는 분명히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임은 분명하지만 궁극적인 교회인가는 다시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다. 동시에 과연 초대교회의 긍정적인 면들이 구조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점에서 나온 것인가 또한 심각하게 논의해 봐야 한다.
교회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다양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고전 1:2), 올바르게 가르치는 곳이며(고전4:7)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이자 터(딤전3:15)이다. 이러한 교회의 모든 기능적 영적 측면이 종합되어진 교회의 형태는 오히려 구약의 성막이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앞으로 모였고, 성경이 낭송되어지고 율법이 가르쳐졌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거룩한 죄 사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초대교회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결코 초대교회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거나 혹은 성령의 순간적인 불같은 역사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곧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에서 그 연속성을 찾아야 한다. 곧 이스라엘의 어느 가정에서나 안식일 전날이 되면 각 가정에서 의식을 가졌고 구약에서 말하는 많은 유전들과 전승들이 가족을 기본 단위로 각 가정에서 행하는 행사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가정에서 모였음은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에서 이해해야지 특별한 단절과 새로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틀린 이해이다.
초대교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그들이 소그룹으로 모였다는 것이다. 물론 소그룹으로 모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그룹 형태의 모임이 모인 이유가 소그룹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던가 소그룹만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나타낸다는 이 책의 주장과는 달리 시대적 상황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핍박과 복음 전파의 초기 단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거대한 군중이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가정 중심적인 의식 형태가 남아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렇게 모일 필요성 역시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이 모인 장소가 가정이었기 때문에 다수가 모일 수 있는 공간적인 능력조차 없었다. 초대교회가 소수로 가정에서 모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결코 셀 교회의 정당성을 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2.2.2 신학적 왜곡
이 책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초대교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신학적 왜곡은 세 가지이다. 첫번째로 저자는 이 책에서 초대교회에는 사도 외에는 어떤 특별한 형태의 담임 목사가 필요하지 않았고 각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운영에 참여하였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셀 교회가 지향하는 평신도 목회자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과연 초대교회에 담임 목사라는 제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성경에는 담임 목사라는 제도적 명칭이 분명히 없다. 그런 의미에선 “셀”도 없는 말이다. 초대교회에는 사도 외에도 각 지역마다 기름 부은 받은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특히 장로의 직분에 대해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곧, 장로란 지금의 의미처럼 단지 elder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곧 지금의 목사의 직분 역시 가지고 있었다. 곧 이 장로란 단어는 교회 내에서 제도와 교육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분을 가리키는 단어인 것이다. 담임목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또 단순히 장로만이 아니라 사도를 통하여서 제자들의 수가 확장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2사도를 비롯해서 7집사가 세워졌고 또 그들의 제자들의 수가 확장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역시 권위 있는 가르침과 말씀의 정통성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받은 자들에게 목회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셀교회의 논리는 말도 안된다.
두 번째로 성찬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성찬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내용이라 직접 인용한다.
“열 세명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았던 한 가정의 다락방에서 시작했던 이 성찬식의 본래적 의미는 그 성대한 의식에 있지 않았다. 또한 이 의식이 의미와 동떨어지길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활동이며, 셀그룹의 활동을 의미한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행하는 성찬식을 정당화한 내용은 없다.
성찬식은 공동체가 존재하는 소그룹에 사용되기 위함이었고, 바로 이 곳에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이 존재했다. 교회가 시작되었던 시절로 돌아가야만 성찬식이 거행됐던 장소와 가치에 대해 깨닫게 된다. 성찬식은 초대 교회의 찬생을 축하하기 위해 서로 나누었던, 참으로 독특한 ‘생일파티’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성찬에 대한 왜곡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가진 흐름이 어떻게 그렇게도 강렬하게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부에 국한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신학적 사상이 너무 위험하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성찬식이 열세명의 공동체만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초대교회의 형성을 축하하기 위한 독특한 생일파티였는가? 그리고 성경이 대규모의 성찬식을 정당화한 내용이 없다면 그렇다면 어디에 소규모의 성찬식만을 정당화한 내용이 있는가?
일단은 이들의 주장은 성찬이 무엇인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찬은 마태복음 26장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념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어떻게 초대교회가 탄생할 것인지에 대해서 기념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를 위해 찢어야 할 자신의 몸과 흘려야할 자신의 피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하셨다. 초대교회가 소수의 그룹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성찬식을 그들의 모임마다 가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신앙의 1세대로서 혹은 그들과 가까이 있던 2세대로서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과 함께 기념하셨듯이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지 자신들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10장과 11장에서 분명히 바울은 자신들이 성찬을 시행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곧 고린도전서 10장 16절, 17절에서 분명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성찬을 이야기하면서 그 반대로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이 먹는 것과 다름을 이야기한다. 11장에선 24절, 25절에 마태복음 26장을 인용하면서 26절에 성찬의 궁극적인 의미가 그 떡을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이 고난을 기념하고 동시에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합당치 않은 자는 먹지 못하는 것이다(27,28절). 백보 양보해서 사도행전 2장 46절과 종종 나오는 예찬식의 개념이라고 해도 셀교회가 주장하는 성찬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셀교회가 말하는 성찬은 복음적인 교회들이 말하는 성찬식에 대한 어떤 설명과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비성경적이다. 아예 성찬식이 가지는 거룩한 의미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를 세속화 약화시켜서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 성찬식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이단적인 사상이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격분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로 가장 어처구니없는 해석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의 제 5장 ‘공동체 : 셀그룹을 존재케 하는 이유’편에 나오는 첫 번째 소제목은 “우주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형태”(pp152 - 154)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예로 들면서 그럴싸한 삼위일체론을 주장한다. 곧 요한1서 4장 8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표현을 가지고 사랑은 주고받는 오직 두 사람만이 필요하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양위일체(duality)이어야 하는데 삼위일체(trinity)로 설명된 것은 강력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강력한 진리는 바로 셋이 있는 곳에서부터 처음으로 공동체가 존재하고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셋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풍요함 속에 항상 거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이고 하나님 스스로도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시기 때문에 삼위일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심각한 고민에 쌓였다. 거의 손가락이 떨릴 정도의 분노와 어이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과연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경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들의 공동체론은 말도 안되는 괴변에 불과하다. 특히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변호하는 모습은 반론의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삼위일체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은 분명하다. 각각의 위격을 독립된 인격으로 설정해서 삼신론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죄로 인하여(인간의 죄) 그리스도와 하나님사이의 공동체성이 깨어진 적이 있고 그리스도는 이 때 신격과의 단절을 경험했으며 가장 완벽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모습은 신격과 각 위격과의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그 예로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나오는 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을 예로 든다. 과연 이러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아니 과연 그리스도의 위격이 분리되어서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경륜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물로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위한 구속의 경륜상 그 가상의 그리스도의 고통에 성부도 성령도 본질적으로 함께 하셨다. 그렇지 않다면 삼위일체는 깨어지는 것이다. 셀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삼위일체란 어떤 때는 붙었다가 어떤 때는 떨어지는 가변적인 것이 아닌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루며 존재하셨다면 이러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스스로의 논리를 무너뜨리게 된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인지, 어떻게 삼위일체라는 절대 진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왜곡할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2.3 하나님과의 만남.: 공동체가 대신하는 개인의 경건, 영성
셀 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가 모여서 예배하고 멀리서 설교를 듣기만 하는 형태로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실제적인 영적 생활을 누리기가 불가능하며 오로지 소규모 형태의 셀에서만이 참된 하나님을 만나고 실제의 삶에서 영적인 만족과 더불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 책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셀교회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반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과연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만의 영적인 생활을 강조했냐는 것이다. 교회가 성도의 영적인 생활과 예배, 하나님과의 교통이 교회, 특히 건물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가르쳤냐는 것이다. 대답은 결코 아니다. 종교 개혁의 가장 큰 신학적인 발전 중의 하나는 성경이 쉬운 말로 번역되어지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곧, 성당과 사제들만이 누릴 수 있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모든 믿는자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공간적인 의미를 가진다. 곧, 종교개혁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낀 공간은 오로지 성당 안에서만이었다. 왜냐면 성당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왔고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와 소통의 시간과 장소를 성당 안에만 제한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곧 하나님의 편재성이 올바르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의 Sola Scriptura는 힘을 얻게 된 것이며 수 많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신앙과 경건은 일상의 삶에서의 하나님을 만남을 위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주일 하루만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과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성경대로 살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이는 왜 안식일이 신약에 들어서 주일로 바뀌었는가와 그 의미가 상통한다. 곧 오직 안식일에만 이루어지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매일을 통하여(through everyday)이루어지고 주일(on Sunday)에 그것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로 그들이 주장하는 공동체성에는 결코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개별적인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단위는 ‘나’와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의 신실함이 곧 나의 신앙의 깊이이며 영적인 생활의 풍요로움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나’들의 모임(거룩하심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셀에서는 오로지 셀이다. 곧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셀과의 관계이다. 물론 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셀에서 더욱 친밀하게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문제는 바로 그 ‘셀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곧, 셀의 지도자 혹은 다른 구성원들을 통해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은혜가 곧 셀의 성장이고 셀의 확실성이라고 이야기한다. 곧 ‘나’와 ‘하나님’사이의 관계가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경우 각 셀 안에서 ‘영성’이 탁월한 자의 영적인 권위와 능력, 은사에 의존하게 되어 신비주의적인 위험을 띌 수 있고 영적인 부작용들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대리자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천주교의 사제관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고 더 나아가 수 많은 이단들의 발생동기를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만다.
3.결론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본 소고를 쓰기 위해 여러장의 메모와 정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 텍스트에서는 그 내용들이 별로 사용되지 못했다. 사실 그 많은 내용들도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곧,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소그룹을 통하여서 개교회(cell-
church)를 이루게 하고 이 교회들이 모여서 거대한 공동체적 교회를 이루자는 것이다.’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억지 논리들이 많고 더 나아가 위험한 요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신학적으로도 여러 교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특징들 예를 들어 장로교에선 장로의 역할과 목사의 직무를, 감리교에서는 일반 성도의 적극적 교회 참여와 속회 활동을, 오순절 계열에서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공동체적 신앙활동의 장점을, 천주교에선 교구주의를 끌어들여 종합 선물 셋트를 만들어 놨다. 정확한 신학적인 바탕도 없고 성경적인 이해도 없으며 단지 세련되게 표현된 용어와 돈에 미쳐가는 세대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수 많은 경제 용어들로 포장된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의 상을 엎으시며 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 엎으셨던 그들의 상은 단지 돈과 장사의 상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던 세속의 문화였고 세속의 가치관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곧 교회를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었다. 셀 교회 운동이 사단의 그러한 작업이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수의 논리 앞에서 셀교회 운동 역시 정당성을 획득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교회들이 앞 다투어 셀을 도입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 위에 올바른 성경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올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셀교회 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험성은 그들이 교묘하게 그들의 신학적 오류는 숨기고 방법론적인 측면으로 교회 안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몇 몇 성장에 눈이 먼 목사들이 신학적 위험성은 애써 숨기고 그 방법들만을 도입해서 교회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고 보고 있다. 그런 식의 변명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몇 몇 사안들 교회론과 신론에 결정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운동이 어떻게 그 방법만이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겠는가. 형식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내용의 산물은 형식이다. 그리고 그 형식을 통하여 내용을 이루어가고, 어쩌면 그 형식 자체가 가장 중요한 내용인 셀교회 운동에서 형식과 내용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임은 분명하다.
셀교회 운동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일면은 틀릴 수도 있고 어쩌면 짧은 이해로 좀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어야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양보하고 열어둔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셀교회 운동은 분명히 반성경적이고 반교회적이며 반기독교적이다. 이에 대해 분명한 신학적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