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7)
요약 권영배 (2008.06.29 ~ 07.22)
출처: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34834198
C O N T E N T S
글을 열며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 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 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글을 닫으며
1. 포스트모더니즘
2. 프래그머티즘
1. 포스트모더니즘
혹시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미국에서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큰 오산
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미국 사람의 다섯 명 중에서 네명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지 않으니까요.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은 기존의 38%에서 9/11 테러 이후 22%로 내려갔다.
Gerald L. Zelizer, USA Today, 8 Jan 2002, P 13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입니다.
프리모던(Premodem)시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고체계를 일컫음
- 초자연적인 존재, 즉 하나님을 믿던 시대.
- 공기 속에 있는 산소, 수소와 같은 물질의 존재를 믿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히 믿음.
- 초월적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눈에 보이는 이 자연 너머에 있는 그 존재의 실재를 믿음.
(예)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 ‘우상의 동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이론화함.
프리모더니즘의 붕괴의 시작(이마누엘 칸트)
○데이비드 흄 : 회의론
- 절대적 존재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이성적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 관계에 대한 회의.
- 회의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 또는 무관심으로 향하는 철학의 시초.
○ 임마누엘 칸트
- 인간은 경험적인 증거와 이성적인 회의를 통한 과학적 발견.
- 경험론과 인식론 통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인식될 수 없는 존재로 결론.
-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식적으로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결론지음.
- 철학의 중심에 있던 신학이 철학의 변두리로 밀려남.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 모든 것을 달성 할 수 있다는 과학이 들어옴.
=초월적 실재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이 차지함.
모더니즘의 붕괴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과학이 인간을 대량 파괴하는데 사용됨.
모더니즘시대(계몽주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포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
○새롭게 깨닫게 된 시대.
- 인간 이성의 능력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
- 과학의 비학적 발전에 철학적 토대를 부여.
- 또한, 인간사회 유지를 위해 어떤 절대적인 원인, 하나님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칸트)
- 이신론 : 과학의 힘을 믿지만 동시에 종교적 흔적도 유지. 과학을 믿는 시대와 신을 믿는 시대가 혼재.
○기독교에 끼친 영향
-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 과학의 검증, 계시는 인식 아래 위치.
- 교리의 실종.
- 다윈의 진화론 :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상징적 경전으로 전락.
-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과 복음주의의 변화
- 뉴 에이지적 영성운동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지도자들
- 상징적 경전 속에 담겨 있는 무의미한 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용하고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함. →하나님 부정보다 더 무서운 왜곡과 변질.
포스트모던니즘시대
진리 실종의 시대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음을 결론내린 시대
○새롭게 정의한 진리
-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 진리 대신 개인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상대적 진리.
- 확실히 느껴지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
- 가장 중요한 가치 : 나의 ‘자존감’
- 가장 중요한 실재 : 내가 지금 살아서 느끼고 있다는 사실
- 인간의 근원 : 이성(근원이 아닌 통로)⇒‘느낌’
○인간에 대한 연구를 자아에 대한 연구로 대체.
‘인간이 누구인가’(human nature)⇒‘나는 누구인가’(personality)
○책임을 사라지게 한다
-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은 거부
-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책임짐 : 나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책임,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추구해야
하는 책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적 : 관용하지 않는 사람
- 상대주의적 가치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침.
- 나도 너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암묵적 동의가 요구됨.
- 특히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는 식으로 나에게 진리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순
-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상대적 가치의 주장 자체가 (스스로가 부정하는)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되는
자체 모순
포스트모던니즘을 극복하는 길
죄를 자기 느낌에 근거해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로부터 사랑받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불가능한 목표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너무 많은 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입니다. 마케팅 교회가 초래하는 위기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프리모더니즘의 가치관을 가진 곳입니다. 초월적 존재와 유일하고 절댁적인 진리를 믿는 공동체입니다.
초월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만이 오늘날 교회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서는 길만이 이 시대를 헤쳐갈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나도 옳고 너도 옳은 시대에 넘어지지 않는 길은 말씀을 바로 배우고 바로 가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제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기독교의 절대 진리에 대하여
어릴 때부터 진지하게 접근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어!’, ‘언젠가는 다 알게 돼!’라는 대답들은
‘언젠가는 포기하고 그냥 생각이 다 없어지는 때가 올 테니까 그 때까지만 궁금해도 참아라.’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진리가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득되기에 믿어질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하나님 말씀의 역사성과 실존적인 진실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게 완전히 대문을 열어 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이성적 탐구의 영역 밖으로
밀어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기독교도 문제이지만 머리를 포기한 기독교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2. 프래그머티즘
프래그머티즘의 정의와 뿌리
프래그머티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은 실질적인 결과에 대해 의미 또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진리 여부의 표준으로 삼는 실용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어떤 기술 또는 과정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면
프래그머스트와 실용주의자에게 그것은 진리가 된다. 그런데 만약 효과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프래그머티즘은 그 뿌리를 다원주의(다윈의 진화론)와 세속적 인본주의에 두고 있다. 이 사상은 내재적으로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절대 선과 거짓과 그리고 선과 악 또한 진리와 거짓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프래그머티즘에게 있어서
진리란 유용한 것이며 의미가 있으며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효과가 없으며 관련이 없는 것은 거짓으로 간주되어
거부된다. John F. MacArthur, Ashamed of the Gospel, Crossway, 1993, p. ⅻ.
존 맥아더 목사가 프래그머티즘의 뿌리를 다윈의 진화론으로 본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래그머티즘은
진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진리란 변하거나 진화하는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래그머티즘
에서 진리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바라는 결과 또는 효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를 주는
것은 참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척해야 할 거짓입니다. 동시에 나의 목표가 변하는 것에 따라 프래그머티즘의 참도
변합니다. 내 목표가 점점 더 커지는 경우 프래그머티즘의 참도 진화하고 발전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목표달성여부입니다. 그런 면에서 프래그머티즘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를 움직이는 엔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사상입니다.
프래그머티즘이 교회를 미친 영향
①프래그머티즘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
이런 프래그머티즘이 파고든 교회는 그 의도와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
시킵니다. 무엇보다도 프래그머티즘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연하다는 것은 결국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②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구원 초청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프래그머티즘이 유발하는 가장 큰 위험은 수많은 가짜 크리스천의 양산입니다.
가짜 크리스천, 다른 말로 하면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은 프래그머티즘을 통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
프래그머티즘에 빠진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고민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설교와 설교자』
에서 구원 초청의 승패가 테크닉에 달려 있음을 믿는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 지음, 정근두 옮김, 『설교와 설교자』, 복 있는 사람, 2005, p.419~420.
우리는 설교하면서 진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
하고 다른 요소에 직접 접근하는 순간 곤경을 자초하게 될 것이며, 쉽사리 그 곤경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결국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하여 깨달아 ‘앞으로 나오는’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개성이나 일반적이며 막연한 두려움 또는 어떤 심리적
영향 때문에 앞으로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에 이 점이 핵심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사례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한 전도자가 주일 밤 라디오 찬송 프로그램을 담당하며 생긴 일......
○전도자가 원했던 순서 : 설교→구원초청→찬양시간
○방송된 순서 : 설교→찬양시간→구원초청
○방송 후 전도자 인터뷰 내용 : 평상시 초청에 응했던 사람들의 숫자에 훨씬 못 미친 결과가 나오자, 비교적 적은 숫자가
반응했던 이유를 ‘설교를 마치고 구원의 초청을 하기 전에 불행히도 30분의 찬양시간이 끼어들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고 대답하면서, ‘설교를 마치자마자 초청했다면 휠씬 더 많은 사람이 호응했으리라’고 말함.)
설교자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구원 초청을 안 했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사람들이 생깁니까? 그 순서 하나
때문에 천국에 갈 수도 있었던 수천 명이 지옥으로 갑니까? 순서 뿐 아니라 분위기 좋을 때 하면 천국에 갔을 수천의
영혼이 좀 썰렁한 분위기에서 구원 초청하면 그냥 지옥으로 직행할 수도 있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프래그머티즘적인 수법을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기막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이런 발버둥과 동정이 필요한 불쌍한 진리가 아닙니다.
③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가 만들어 낸 간증 중심의 전도
오늘날 교회에서 간증집회가 많이 열리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적인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증 집회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간증이 넘쳐나는 것과 설교가 예화로 넘치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교회속에서 교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간증과 자신의 상황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정말로 수많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하는 재미있는
간증에서부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간증까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수많은 간증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되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경우, 병이 나아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또는 인생의 위기를 만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식의 간증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희한한 일이 아닙니다.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이슬람에도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잡신 종교는 집회 중에 워낙 신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 그 지역에서 선교하는 기독교 선교사들도 그 종교의
집회에 자주 참석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7장에서 예수님이 저주하신 거짓 선지가들의 가장 큰 자랑이 무엇입니까?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닙니까? 또한 많은 간증이 방언을 받게 된 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방언 역시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힌두교와 같은 명상을 중시하는 종교들을 중심으로 방언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들의 방언과 기독교의 방언은 언어 음성학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수없이 넘쳐나는 간증 속에서 ‘왜 기독교만이 진리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은 내용을 찾기는 참으로 힘듭
니다. 기독교가 참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말씀을 통해 해결한 간증을 찾기가 쉽기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증들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성경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죽은 영혼을 살리신 진짜 간증들이 담겨 있는 책은 성경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사도 바울처럼 간증거리가
확실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막힌 체험을 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국을 다녀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자신의 체험을 떠들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도 남을 자기의 체험을 얘기하는 대신
바울은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왜 예수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만 증거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가
진리인 이유가 바로 성경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프래그머티즘이 본격적으로 그 위세를 떨치던 20세기 중반, 이 위험을 무엇보다 가장 잘 감지하고 있었던 로이드
존슨 목사가 당시 프래그머티즘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쓰이고 있는 간증의 위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
는지가 그의 전기에 자세히 소개됩니다.
첫째, 로이드 존스 목사는 간증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모습을 정형화 또는 획일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마치 간증을 하는 사람이 만난 형태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둘째, 간증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간증이 반복될수록 자신도 모르게 내용을 과장하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 간증 속에는 마치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주를 위해’ 대단한 희생을 한 듯이 포장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넷째, 간증이 주는 위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개인적 체험이 기독교의 진리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는 것입니다.
④프래그머티즘은 성경을 몰아낸다.
프래그머티즘이 자리잡은 교회 속에 성경 말씀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 속에 파고든
구체적 모습이 프래그머티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성경 본문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가 중요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나에게 확실한 ‘필feel’을 꽂아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제 무엇이 옳고 그르고는 무엇이
효과가 있냐 없는가의 문제로 대체되었습니다.
프래그머티즘의 극복
프래그머티즘이 파고든 교회는 말씀을 떠나 효과에 생명을 겁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위해 음악과 간증 등을 통한
감정 배설과 체험 중심의 장소로 예배를 왜곡합니다. 느낌과 사실을 혼돈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수련회를 통해 감정을 마음껏 배설하고 이제는 뭔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 산을 내려와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비참한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프래그머티즘이 주는 악영향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바른 구원관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집회에서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상한 체험을 한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필요한 죄인 됨에 대한 깊은 각성 없이는 결코 복음이
내게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바른 구원이 어떤 것인지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은 아주 아주 어렵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그는 좁은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다.…“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다행입니다. 이제 당신은 우리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리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값싼 복음이고 쉬운 믿음주의이며 라이트 기독교이고 얕고
감정적인 부흥사 스타일의 접근 방식이다. 그렇지 않다. 좁은 길을 찾아내는 소수의 사람은 그 길을 찾기 위해 힘을
들여 노력하고 그 길은 오로지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길이다. 참으로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교회와 설교자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고통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놓고 산산이 부서지면 그는 자신의 약함을 놓고 애통하며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삶을 목말라하고 갈망하여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건 인간의 공로로 천국 간다는 얘기잖아요?
“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자신의 죄 앞에서 절망하는 순간 당신은 결코 당신의 혼자 힘으로 그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님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다.…당신의 부서짐 속에서는 이제 그분의 능력만이 당신의 자원이 된다.
우리의 몫이란 단지 우리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은혜를 갈구하며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John F. MacArthur, Hard to Believe, Nelson, 2003, pp. 84~8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아주 효과가 있었을 그리스 철학의 설득력 있고 지혜로운 말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능력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선택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는 한 이 선택을 더 쉽게 잘 하도록
도와 주는 갖가지 방법을 교회에서 쓰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프래그머티즘의 정체를 바로 아는 것은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과 직결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