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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3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신앙독서자료

출처: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34834198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지음 옥성호 (부흥과 개혁사, 2007)
요약 권영배 (2008.06.29 ~ 07.22)

C O N T E N T S
글을 열며
02 마케팅 교회의 시대적 배경 :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래그머티즘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04 마케팅 교회와 복음의 상품화
05 마케팅 교회의 모델 1 : 빌 하이벨스와 윌로우크릭 교회
06 마케팅 교회의 모델 2 : 릭 워렌과 새들백 교회
07 마케팅 교회와 교회 컨설팅
08 마케팅 교회와 숫자 우상
09 마케팅 교회 극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 회복
글을 닫으며

 

 

03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부흥에 대한 시각


부흥과 관련해서 가장 대표적인 시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성경에 기록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회성의 사건

    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방언을 놓고 팽팽하게 맞서는 두 가지 주장과 비슷

   합니다. 방언이 초대교회로 끝났다는 시각과 오늘날도 계속된다는 시각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2. 두 번째 시각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는 시각입니다.
  2-①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부흥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시각
  2-②부흥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일어난다는 시각
약 170년 전 만해도 2-②의 시각이 통일된 의견이었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대변되는 부흥은 인간의

노력 내지 의지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에 달려있다는 의견이었지요. 즉, 당시까지만 해도 논의는 사도

행전 성령의 역사가 끝났는가 아니면 계속되는가의 문제였을 뿐 어떤 형태로 계속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이견이

없었습니다. 단일화되어 있던 2번의 시각에 다양성을 제공한 사람은 19세기 미국에서 소위 새로운 부흥을 이끌었다

는 인물, 찰스 피니입니다.

찰스 피니


○1792년 출생. 변호사로 사회생활 시작. 평범한 장로교 신도
○찰스 피니의 신학
  -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이성에 대한 모독이다.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중립적인 상태로 태어난다.
  -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은 죄를 100% 처리하는 완전한 구속이 아니다. 언제라도 취소 가능하다.
∴프래그머티즘에서 본 이신론적인 하나님과 동일.


○찰스 피니의 부흥관
  - 개인의 구원에 대한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개인에 대한 구원의 개념을 집단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
  -개인의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피니는 당연히 교회가 바라는 부흥 역시 인간의 ‘

     하기 나름’이라고 주장.
  ⇒그가 이룬 대중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주게됨.
    (숫자가 이룬 그의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함)

피니가 남긴 영향


○구원초청시스템의 발명자:부흥 집회에서 ‘앞으로 나오도록’하는 것.
○일반적으로 불리는 부흥회 캠페인에 최초로 ‘부흥’이라는 단어를 접목한 사람.
○정규집회가 끝난 후 음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후집회를 활성화시킴.
○설교의 변화
- 피니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로 설교가 좀더 즉흥적이고 예화를 더 많이 사용해 야 하며 청중과

   가능한 한 대화하는 식으로 강조.
찰스 피니가 추구함 ‘개심’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인간의 결심을 유도하는 데에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추구한

 ‘부흥’은 철저하게 인간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캠페인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이벤트 성의 행사들을 통해 인간

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바로 인간의 감정입니다. 피니는 우리가 앞 장의 프래그머티즘

에서 살펴본 감정주의가 교회 속으로 파고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도록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


모더니즘 시대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한 구절로 얘기한다면 ‘교리실종의 초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칸트 시대를

지나면서 기독교의 신학은 사실상 지식 세계에서 학문으로서 진지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신학은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계몽주의 시대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18세기에 등장한 인물이 독일에서 피니보다 더 빨리 태어난 프레드릭 슐라이어마허(1768~1834)입니다.

칸트이후 이론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진 신학을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립하여 제시한 최초의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는 찰스 피니의 주장과 일맥상통합

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로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신학의 토대는 성경이 아니라 대신 개개인이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성경이란 애초에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주관적인 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슐라이마허가

이룬 놀라운 업적은 성경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무시하거나 아예 전면 부정하더라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가 이룬 신학적 업적이란 신학의 대상을 성경 말씀에서 인간 내부로 전환한 것

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신학은 종교 의식을 비롯한 인간 연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그 중심에

인간을 둔 신학 아닌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의 도전에 응답한 신학적 방법이었습니다.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

⇒현대 세계의 사상을 신학을 빙자한 인본주의를 통해 온몸으로 끌어안은 최초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위에서 살펴본 찰스 피니가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끼친 해악 못지않게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피해는

끔찍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굳이 의식 세계 속에서 구현되지 않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이 자유 신학의 길은 성경을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실종시켰습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찰스 피니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과 결합하여 말씀을

점점 더 신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 냈습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말씀 중심의 교회를 출석하는 많은 사람 중

에서도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크리스천의 충분조건이 채워졌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에 무지한 신자들에게는 교리와 관계 없이 뭔가를 확실히 느끼게 해 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성령운동파 또는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알란 울프는 오늘날 교회를

분석합니다.
교회 속에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5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Alan Wolfe,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Free Press, 2003
비기독교인인 알란 울프가 사회과학 또는 문화적 차원에서 연구한 기독교에 대한 연구의 결과는 교회 속에 아직도

슐라이어마허와 찰스 피니의 영향이 얼마 깊고 끈질긴지를 확인시켜 줍니다.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복음주의의 정의


복음주의와 마케팅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둘 다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복음주의 경우

이 개념을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념concepts'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복음주의의 시작을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찾습니다. 오래된 복음주의와 대비해

20세기의 복음주의를 신복음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주의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알려진 것을 의미하며,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생애와 그의 교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초점을 둔 신학을 말한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

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은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복음에 헌신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복음을 보존하고 선포하려는

기독교의 역동적 운동의 중심 취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목창균,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http://sgti.kehc.org/data/person/mok/evangelicaltheology/1.htm

빌리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을 미국에서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데뷔시킨 1949년 LA 집회는 빌리 그레이엄과 풀러 신학교간의

긴밀한 관계의 시작이 됩니다.

①풀러 신학교 이사로 참여 : 크리스차너티 투데이 발간(1956)
  ⇒분명 하나님 나라 확장의 거룩한 소명으로 시작했을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점점 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해 나가는 방향으로 바뀌어 갑니다.
②영국집회(1954) : 근본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광범위한 지지를 영국 교회들로부터 받음.
 ⇒영국집회의 성공은 그레이엄으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그레이엄은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근본주의적

   이미지(자유주의 신학에 반발해서 등장한 근본주의 신학은 교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임)를 버리기만 하면

   훨씬 더 큰 영향을 세상에 끼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연합과 일치의 상징’으로 나아감.
③캐나다의 한 기독교 잡지와의 인터뷰(1978)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BGER(빌리 그레

    이엄 복음협회)이 나중에 서둘러 그 발언을 취소하는 등 큰 소동을 일으킴.
④로버트 슐러와의 인터뷰(1997), 미국의 시사 주간지‘뉴스위크’와의 인터뷰(2006)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부정 : 다원주의적 구원관


오늘날 복음주의의 모습


①가톨릭과의 연합
②관용과 은혜의 혼돈
  (예) 필립 얀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그의 글은 사실상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라’라는 ‘관용’에 대한 메시지로 넘쳐납니다. 그가 생각하는 ‘은혜’의 정의로 볼 때 분명 이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타인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넘칩니다. 그러나 관용과 은혜를

  구분하지 않는 필립 얀시의 눈에는 분명 오늘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는 세상이지요. 그러나 관용에

  대한 목마른 세상을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다면 분명 하나님을 먼저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14:2~3).


일치보다 중요한 것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으로 하나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복음을 중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나 됨에 대한 노력은 복음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어떤 ‘열정’ 또는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하나 됨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을 교단으로 나누는 것은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대형 교회들은 형식상 속한 교파의 신학과는 관계없이 대표적인 모든 교파의 모습들을 다 섞어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들일수록 분명한 신학 대신 각종 방법만이 넘쳐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호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교회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의 초에 들어선 지금, 교회는 마케팅의 모든 가르침을 철저히 아무런 의문도 없이 수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너무 큰 반면에

교회가 가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틈 사이를 파고든 마케팅의 교묘한 유혹을 교회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교회는 약해졌습니다. 교회는 마케팅의 유혹을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적 상황’이라는 말로 정당화하기에 더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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