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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와 기독교인 - 김용태 교수

심리치료와 기독교인 - 김용태 교수
  
횃불트리니티의 김용태 교수의 글입니다.
심리학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속에 속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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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smileman.info/bbs/zboard.php?id=mok13&page=1&sn1=&divpage=1&category=6&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57
           
상담이란 무엇일까? 에 대한 질문으로서 필자는 상담은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만남의 예술로 정의를 하고 싶다. 여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범주들에 대해서 좀더 분명하게 밝혀야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 본다.
 
1. 만 남
만남은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조명을 해 볼 수 있겠다. 어떤 수단 혹은 도구를 통해서 만나는가 하는 점에서 만남을 정의할 수 있겠다. 전화를 통해서 만나는 전화상담, 편지를 통해서 만나는 서신 상담, 컴퓨터를 통해서 만나는 사이버 상담, 직접 얼굴을 마주보는 면접 상담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서 상담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면접상담을 중심으로 상담을 발전해왔는지 상담역사와 서구문화의 토양을 살펴보는 일을 상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의 경우, 면접상담 보다는 전화상담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는데 전화상담에 대한 이론적 확립의 노력 혹은 기술적 차원의 주제들에 대해서 별로 많은 학자들이 조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신 상담의 경우에도 한국 문화 혹은 넓게는 비 표현의 문화를 가진 아시아의 경우에는 중요한 상담의 방법이나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는 부부 상담 혹은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서신을 통해서 만나도록 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표현에 익숙하지 못한 가족들인 경우에 효과적 수단이 됨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사이버 상담의 경우에 앞으로 상담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사회의 핵심이 컴퓨터라고 한다면 컴퓨터를 통한 상담의 방법을 개발하고 이에 대한 이론의 대비를 하는 일은 상담의 미래를 죄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남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전문 상담은 많은 임상훈련과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상담을 의미한다. 준 전문상담은 어느 정도 임상훈련과 다소간의 학문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상담을 말한다. 비 전문 상담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담을 의미한다. 친구관계 혹은 부모자녀 관계 혹은 부부관계 혹은 직장 및 무수한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담을 의미한다. 상담이 주로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상담의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만남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전문 훈련과 지식이라는 측면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과 인간 자질이라는 두 측면에서 중요하게 연구되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전문 상담자에 의해서 행해진 전문 상담과 비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상담에 대해서 의의 있는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상담자의 자질에 대한 두 측면에 대해서 주목을 해야하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만남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심리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심리 상담, 교육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교육 상담, 종교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교상담, 법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법률 상담, 목회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목회상담, 결혼 중매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혼 상담, 세무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무상담, 직업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직업상담, 행정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정 상담 등등 수없이 많은 직업의 종류에 의해서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리 전문가들은 상담을 심리 영역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함으로서 상담이 일어나고 있는 많은 영역들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있다. 여러 가지 직업의 종류에 의해서 일어나는 상담의 현상을 개념 혹은 관점을 통해서 정리하려는 노력의 부족 현상은 상담의 현상이 흩어지며 전문 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게 한다.
 
상담의 방식 측면에서 만남의 방법은 다르다고 생각된다. 개인상담의 경우에 있어서 만남의 방법은 일대일의 만남이며 가족 상담 혹은 집단 상담의 경우에는 일대다 혹은 다대다의 만남의 방법이다. 일대일의 만남의 방법은 깊은 심리적 차원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내담자들은 상담을 통해서 자신들의 내면세계와 상담자의 내면세계가 깊이 있게 만난다. 이러한 깊이 있는 만남이 곧 내담자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집단 혹은 가족 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 자신이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깊이 있는 만남을 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혹은 집단 구성원들끼리 깊이 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코치 혹은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가족의 전체 역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때로는 많은 정치적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겠다. 전체의 틀을 바꿈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를 꾀하는 활동이다.
 
 
2. 예 술
상담은 예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정교한 과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상담의 실제에 있어서 예술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아무리 도공이 도자기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자기를 실제로 빚어보지 못하면 제대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없는 예술성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실제로 내담자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상담자는 좋은 상담자라고 보기 어렵게 된다. 예술은 작품에 의해서만 평가를 받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상담이라는 좋은 작품이 탄생되기 위해서 상담자는 심혈을 기울여서 상담을 해야하는 예술성의 혼과 정신을 요구하는 활동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담은 과학을 통해서 생겨난 학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상담을 과학이라고 생각을 하면 상담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상담은 과학의 도움을 받는 예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상담의 일차적 특성을 과학이라는 학문적 성격에서 찾기보다는 상담은 예술이라는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본다. 상담은 활동을 빼면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학문으로서, 과학으로서 상담만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인위적 구분이라고 생각된다. 과학으로서 상담을 생각하면 영토가 존재해야하는데 그러한 영토를 일정한 영역에만 국한시키려는 생각은 자연스러우리라고 생각된다. 상담을 학문의 대상인 어느 영역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상담의 활동성이라는 측면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상담은 예술세계의 한 분야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음악과 미술이 다같이 예술이면서 서로의 영역을 가지고 있듯이 상담도 예술이면서 독특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 소리라는 특성을 통한 예술이라고 한다면 미술은 그림이라는 특성을 통한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상담은 만남을 통한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술하고 그러한 변화들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규명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담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상담자에게 요구되는 특성이 있다. 개인 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 자신이 곧 예술의 도구가 된다. 상담자 자신이 예술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상담자는 자신과 내담자를 동시에 연주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어떤 종류의 만남이 되게 하며 언제 어떻게 만나야할지를 예술적 감각으로 구분하고 실제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좋은 만남의 예술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마치 성악가가 자신을 예술의 도구로 삼아서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하듯이 말이다. 가족이나 집단상담의 경우에는 상담자는 마치 연주가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합창지휘자가 많은 합창단원들을 지휘를 통해서 좋은 합창을 만들어내듯이 가족 혹은 집단 상담자는 여러 사람들이 좋은 화음을 내도록 하는 만남을 갖도록 해야 한다. 집단 혹은 가족상담자는 때로 자신의 예술도구를 시범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있으나 가족 혹은 집단 구성원들과 함께 화음을 낼 필요가 없는 상담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혹은 가족 상담자들은 개인 상담자들에게 요구되는 특성과 다른 예술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개인 상담을 잘하기 위해서 상담자들은 자신을 좋은 예술의 도구로 만드는 일은 필수적이다. 좋은 예술의 도구는 곧 좋은 만남을 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상담자의 특성으로 요구되는 따뜻함, 진실함, 배려 등의 특성들이 이해될 수 있다. 집단 및 가족 상담자들은 이러한 개인의 특성을 통한 상담자의 자질이 요구되기보다는 지도력, 조정력, 정치력과 같은 관계의 특성들이 요구되는 상담활동이라고 생각된다.
 
상담은 시간의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내담자들이 받아들이거나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에 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어렵게 된다. 많은 부모들 혹은 일반인들이 상담자와 같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상담의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의 예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부모들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개입해야 할 적절한 시기를 놓치기 일쑤이며 때로는 개입하지 말아야할 시기에 잦은 개입으로 인해서 더욱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3. 초 월
3.1 자기 초월의 의미(THE MEANING OF SELF-TRANSCENDENCE)
인간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기초월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 원욕이라는 충동적 욕구가 있어서 이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교훈을 주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될 것이다. 자신의 욕구나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충동의 인간이 되기 마련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도덕의 삶을 전혀 살 수 없게 된다.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행동과 욕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선택을 할 때 어떤 종류의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혹은 준거 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행동의 방향은 달라지게 된다.
 
초월이란 쉽게 표현을 한다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초월하고자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이 힘이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더 해보아야 할 것이다. Freud에 영향을 받은 많은 상담의 이론들은 욕구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의 내재된 특성를 설명하고자 한다. 욕구란 신체적 흥분상태로서 인간의 정신적 특성들이 신체라는 영역으로 환원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의 초월적 특성들은 어떻게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일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역량(Capacity)으로서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수평 초월(Horizontal transcendence)과 수직 초월(Vertical Transcendence)로 방향성을 생각할 수 있다.
 
3.2 수평초월 (Horizontal Transcendence)
수평 초월이란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서 자신을 뛰어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이나 처지 등을 자신의 아픔이나 처지처럼 생각을 하는 공감 이해와 존중 등을 말한다. 타인을 위한 인간의 행위 곧 이타 행위들은 모두 수평 초월에 해당한다. 상담자들이 내담자들을 공감하는 행위들, 사회사업가들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행위, 이웃들끼리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행위들이 모두 수평 초월에 해당되는 인간의 활동들이다. 수평 초월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하는 능력으로서 타인들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감이라는 개념은 수평초월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수평 초월을 범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과 타인이 같이 들어있는 상태을 의미한다. 즉 범주의 확장으로서 자신과 타인들이 공동으로 들어있을 때 범주의 확장이라고 한다. 공감은 정의 상 자신을 잃치 않고 타인의 감정과 마음을 자신의 것인 양 이해하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만일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특성이 없이 가능하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으며 이로 인해서 인간은 타인의 마음도 내 마음처럼 이해할 수 있는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타인의 마음을 나라는 축에서 이해를 하며 또한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수평초월을 말할 때 아마도 인간에게는 서로 공통의 특성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신과 타인이 서로 공유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공유된 특성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반영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공유된 특성들이 두 사람에게만 존재하기보다는 아마도 인간이면 누구에나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된다. 한 인간에게는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초월적 특성은 모든 인간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 이해된다. 한 인간은 모든 인류의 특성을 자신의 특성처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때 수평적 초월이 완성된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예로서 많은 상담의 이론들은 한 개인의 마음을 조명하는 이론들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상담의 이론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인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가진 사람과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특을 가진 사람의 행동은 같을 수 없게 된다. 일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틀을 가진 사람들은 한 개인을 이해할 때 전체 속에서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살아가야 하는 방향성 등을 지시하고 조언할 수 있게 된다. 상담자의 활동들은 이렇게 인류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전체의 틀에 근거를 하고 있어서 이러한 틀들이 상담을 가능케 한다.
 
수평초월에서 자신이 포함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이해하는 행동이나 상태는 초월의 상태가 아니다. 수평초월을 말할 때는 범주의 확장을 의미한다. 범주의 확장이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인류 전체가 동시에 들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만일 자신이 없고 타인만 있다면 이는 여전히 한 개인의 범주만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범주는 개인 범주이며 관계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 범주는 여러 가지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게 된다. 개인 범주, 가족 범주, 사회 범주, 민족 범주, 인류범주사회 등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부분이 가능하다. 한국사회는 가족범주의 경향이 아주 강하다. 가족 범주의 여러 가지 변형으로 학교범주, 출신지범주, 회사범주 등이 가능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범주들을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은 많은 경우에 가족이라는 범주에 갇혀있다고 생각된다. 가족이라는 범주는 생활의식과 가치관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생활의식이라고 하면 조상숭배라는 제사의식을 말한다. 조상숭배라는 제사의식은 가족을 하나로 묶고 가족이 번창해야 한다는 철학적 믿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가치관 측면에서는 가계계승이라는 대 원칙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되어왔었다. 아무리 IMF시대가 되었더라도 장난감 산업이 불황을 모른다든지 아무리 가난하여도 자식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등의 사회적 현상은 가족범주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인의 극단적 개인주의 성향은 아마도 가족범주라는 측면에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극단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위한 행동이나 가치관이기보다는 아마도 가족을 지지하고 살리는 의미에서 개인주의라고 보아야한다. 가족과 자신과 관련되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행동들이 한국에는 많이 있다. 이러한 행동들을 묶어서 가족범주라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3.3 수직초월
수직 초월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영의 세계를 이해하고 영의 세계와 관련을 맺으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영의 세계에는 절대자 곧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려는 인간의 행위를 말한다. 상담은 곧 내담자들이 자신을 초월하도록 하는 활동을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분석이라는 활동을 한다. 분석이라는 활동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과정을 의미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이다.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하도록 돕는 활동을 한다. 의식화라는 과정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자기 초월의 행위인 것이다. 대화상담이론은 대화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대화를 보도록 돕는다. 이를 대화에 대한 대화(Metacommunication)라고 부른다. 대화에 대한 대화는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대화의 패턴을 보도록 하는 자기 초월의 행위이다. 상담자들은 사람에 대한 사람들로서 사람들을 초월하는 사람들(Metahumans)이다. 즉 인간에게는 이렇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초월을 가리켜서 수직 초월이라고 한다. 수직 초월은 인간의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인간적 경험들은 하나님의 세계인 영의 세계를 수직적으로 초월하는 인간의 행위들이다.
 
인간이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자기초월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에 원욕이라는 충동적 욕구가 있어서 이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교훈을 주고 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욕구나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충동의 인간이 되기 마련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도덕의 삶을 전혀 살 수 없게 된다.
 
자기초월을 인본주의 심리학의 관점에서도 이해를 할 수 있겠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욕구를 예민하게 알고 이해하며 이를 충분히 받아들이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이 없다.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자신을 알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의식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Rogerian에서 제시되고 있는 잠재지각은 결국 수직 초월의 개념을 의미하며 인간은 자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인 셈이다.
 
자기를 초월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욕구들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일단 자신의 행동과 욕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적어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선택을 할 때 어떤 종류의 가치관과 생각의 틀을 혹은 준거 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행동의 방향은 달라지게 된다. 기존의 심리치료 이론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선택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무엇, 그렇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없이 충족해야하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만일 인간의 욕구를 객관적으로 보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된다. 기존의 심리치료 이론들은 이러한 선택을 위한 준거 틀을 제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활동은 자연적이고 객관적으로 주어진 그 무엇이기보다는 적극적 준거에 의해서 판단되고 선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학문을 가리켜서 규범적 학문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자연 학문으로서 심리치료이론들은 자연상태를 연구하는 물리학의 범칙들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인간에 대해의 폭을 대단히 좁히거나 왜곡하는 방향에서 이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인간을 객관적 상태로 존재하는 물질과 신체의 특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동물적 특성을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수직 초월의 의미는 자신 보다 더 큰 존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심리 치료의 이론들은 인간보다 더 큰 존재를 상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의 존재이고 인간은 가장 발달된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더 큰 존재를 상정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입장에 선다면 논의는 크게 달라진다. 초월적 존재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을 가질 때 인간은 완전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수직 초월은 인간이 자신 보다 더 큰 존재와 관련을 가지며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자신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 자신의 사회, 자신의 나라 그리고 인류 전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마치 높은 산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와 사방이 잘 보이는 이치와 같이 인간이 수직적으로 초월을 하게 되면 행동의 폭이나 이해의 폭은 훨씬 넓어지게 된다.
 
3.4 초월의 방법
3.4.1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초월할 수 있을까?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서 한 개인은 자신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안목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해야할 활동이 있다. 자신을 반성적으로 보는 안목이다.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 혹은 반성적 관찰(Reflective Observation)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인간의 생각은 참으로 자유롭다. 아주 작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기도 하고 아주 영원한 삶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영화나 많은 다른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생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구들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의 자유로움은 인간이 신의 특성을 닮았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의 특성은 시간과 공간에 사로잡힘이 없이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심지어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벽을 지나다니며 시간을 초월해서 다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자유로움을 오직 생각 혹은 영혼이라는 측면에서만 지니고 있는 듯 싶다. 인간의 생각은 자유롭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자유로움을 현실세계에서 다 실현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육체와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는 곧 육체와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삶이다. 육체와 삶의 조건들은 변화시키기가 너무 어렵지만 인간은 생각을 통해서 그러한 삶의 조건들이나 현실들을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재구성을 할 수 있게 된다. 정신적으로 재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활동은 곧 반성적 관찰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될 것 같다. 반성적 관찰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도구를 갖게 된다. 반성적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역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의미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음미하고 생각하게된다. 이러한 반성적 관찰은 적어도 내담자 혹은 우리들로 하여금 적어도 자신의 삶을 다른 방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가져다준다.
 
3.4.2 Member and Class
영원성이 존재하는 형상적 존재로서 인간은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고 기술되어야할 것이다. 초월의 방법을 논의함에 있어서 인간은 영원성이라는 커다란 범주는 변화의 원리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된다. 변화를 할 때 인간은 members와 그들을 포괄하는 class를 상정하게 된다. Member들은 결코 자신들을 초월하는 상태에 있는 class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member들이 class의 논리를 이해하려고 하면 member들은 이차 변화(Second Order Change)를 경험하여야 한다. 만일 member들이 class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차변화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임으로 인간은 자신의 member를 초월하여서 class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영원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더 이상 큰 범주에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영원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인간이 member에 갇혀 있는가 하는 점은 초월과 인간의 정신병리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할 사항이다.
 
3.4.3 영원성 : 내재 혹은 외재
인간의 영원성이 인간에게 내재적인가 혹은 외재적인가 하는 점은 또 다른 중요한 논의사항이다. 만일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로 인간에게 내재적인가? 만일 인간의 외부에 있는 영원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러한 영원성과 접촉을 할 수 있는가? 접촉된 영원성들은 어떻게 인간의 내면관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일까?
 
3.4.4 분화 (Differentiation)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 혼자서는 그러한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의지하는 대상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의존이 Interdependent Relationship이 되지 못하고 Codependent Relationship이 되면 인간은 자신을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이 그 대상과 Codependent Relationship을 갖게 되면 인간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이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Freud는 인간의 심리에너지가 고착되면 인간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심리에너지가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고착되지 않고 흘러야만 인간은 심리적으로 건강해진다.
 
인간이 이 세상의 영원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인간은 건강하게 된다. 자유롭다는 말은 인간이 초월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건강하지 못함은 이 세상의 것들에 사로잡혀있을 때 발생된다. 집착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겠다. 집착의 상태는 인간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안은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된다.
 
3.4.5 통합 ( Intergration)
자신을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분화를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관계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나와의 관계, 타인과 나와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영적 세계의 신비는 마음속에서 심리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을 대하거나 상대방을 위협하여서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하는 일들은 영적 체험이 심리적으로 일치를 이루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된다. 영적 체험은 심리적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도록 해야한다.
 
신비의 영적 체험은 먼저 마음속에서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그리고 심리적 안정으로 다가와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분화는 곧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영적 체험을 자져오도록 하여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즐거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체험이 불안을 가중하고 세상의 것들로부터 불편함이 마음속에 싸이게 되면 이는 심리적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영적 체험이 심리적으로 일치를 가져오면 그 결과는 사회적 장면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심리적 일치는 사회 속에서 부드러움과 사회적 기여로 나타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물론이고 사회의 구조적 악들에 대해서 저항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때 조심할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방식으로 일을 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핍박을 받는 모습으로 보여져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물질적 풍요 그리고 삶의 여유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일로서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비평 - 이런 내용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만 되어지는 일입니다.
 
 
New Age운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인간의 힘만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죄성을 드러낸 일이다. 인간은 영적 세계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잠재력을 개발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인간에 대해서 지나친 낭만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주의 심리학자들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Rogers, Perls, Maslow---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이고 낭만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잠재력 개발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넓혀나갈 수 있다는 기본적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잠재력 개발로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려다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김용태 교수 자신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엄마인 여성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다가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여권신장주의자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들과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충족하겠다고 하는 일들도 인간에 대한 잠재력 개발이라고 하는 낭만적 생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잠재력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기 위해서 성장을 거듭해 나가야 한다. 성장을 거듭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검증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극단적 자아주의(Egoism)로 빠지게 된다. 인간주의 심리학자들이 극단적 자아주의에 빠지는 반면 인간의 초월을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려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신비적 환상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다. 환상주의와 자아주의는 둘 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일정한 한계를 가진 존재이며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절대자의 도움을 받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절대자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영적 성숙 혹은 발달은 무엇인가?
 
3.5 초월 상태의 인간
3.5.1 Human Life Goal: The Restoration of God’s Image
인간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은 개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Individual Identity에서부터 Relational Identity로 관점을 전환할 수 있을 때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하게 회복된다. 기존의 Erik Erikson의 이론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정체감을 정의하고 있다. 이는 서구사회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Ideology인 개인주의 시대 사상을 벗어나지 못한 생각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 일서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정체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랑이라는 말은 개인주의적 용어가 아니며 관계적 용어이다. 관계라는 틀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용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이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의미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사랑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은 탄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공포심과 수치감의 상태를 경험적으로 알게되며 이러한 공포심과 수치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데 어려움을 갖게 한다. 인간은 죄 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살게 된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버려 두지 않은 것처럼 인간이 탄생될 때 부모는 아이가 혼자 살도록 버려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생아는 엄마의 사랑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엄마의 사랑이란 신생아에 대한 전적인 받아들임인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신다.
 
3.5.2 성경에 나타난 인간상
예수는 인간에게 분명하고 뚜렷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산상수훈에 보여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 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등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는 심령이 가난하고 청결한 자로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청결하고 가난한 심리적 상태를 소유할 수 있다. 청결하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한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는 의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의란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사모하고 목말라해야 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고 가난하게 된다고 말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은 청결하게 되고 심령이 가난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할 일은 곧 화평케 하는 일이고 불의에 대해서 핍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산상수훈은 성경 속에 나타난 인간의 심리적 상태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인간이 대인관계 속에서 보여져야할 모습, 그리고 이 땅에서 할 일이 제시되고 있다.
 
마음이 청결하고 가난한 상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마음속에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소유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필자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인간은 무엇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한다. 인간은 자신들을 의지하는 대상들이 돈과 권력, 미, 학력, 다른 사람들, 동물들, 기타 등등 수없이 많은 이 세상의 대상들에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게 된다. 돈이 있다가 없어지면 급격히 마음 속에 불안과 공포, 두려움 등이 생기게 된다. 학력이 없어지면 또한 비슷한 심리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보우웬은 사람이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분화될 수 있으면 건강한 상태라고 하였다. 건강한 상태란 인간은 자신 속에 진짜 자아라는 심리적 요소가 있어서 그 진짜 자아를 많이 확보하면 건강하고 관계 속에서 흔들림이 없이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보우웬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진짜 자아라는 요소를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다. 진짜 자아라는 요소를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적 건강을 논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그 진짜 자아를 갖게 되는가 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는 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보우웬의 생각의 틀은 인간과 인간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뛰어 넘는 영적 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와 연관성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진짜 자아는 존재의 근거를 잃고 만다. 인간은 절대 진리에 자신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의 진짜 자아를 갖게 된다. 진짜 자아를 상정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틀이라는 생각의 구도가 아니면 인간의 진짜 자아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참으로 개인적이거나 개별적일 수 없다는 견해를 필자는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관계의 존재인데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의 틀 속에서 규정괴고 이해되는가에 따라서 인간을 보는 관점과 생각이 달라진다.
 
인간이 이 세상의 것들에 많이 자신이 붙어 있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를 하여 하나님과 연합을 하면 할수록 진짜 자아를 많이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연합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미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위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사는 일이다. 죽는 연습들이 곧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괴 연합하는 사실임을 인식해야 한다.
 
목숨을 내어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많은 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즉시 그 자리에 놓고 예하고 대답을 하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를 때 예수의 제자들이 즉시로 예수를 따랐다고 하는 성경의 장면들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3.6 초월 상태의 인간
3.6.1 인간의 타락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의 타락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 그 뒤에 뱀의 유혹으로 인해서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해서 입었다. 그 뒤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수치감에 관한 대화이고 그 결과로 인간의 죽음의 형벌을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원리는 기독교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핵을 이루고 있다. 죄인으로서 인간은 두 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다. 하나는 죄 된 행동을 하는 인간이고 또 하나는 죄 된 속성을 가진 인간이다. 죄 된 행동에는 죄책감이 따르고 죄 된 속성에는 수치감이 따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책감은 인간의 행동의 영역에서 발생된 감정이라고 한다면 수치감은 인간의 존재의 영역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살펴보면 죄 된 행동과 죄 된 속성으로 구분을 해서 살펴 볼 수 있겠다. 인간의 죄 된 행동을 통해서 인간은 죄 된 속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래 인간은 죄 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죄 성을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인간이 창조될 당시에 죄 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큰 논란거리라고 생각된다. 아담과 하와의 행동은 이러한 죄 성을 발견하게 한 사건인지 아니면 행동을 하자마자 죄의 속성이 들어왔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와와 아담이 뱀과 아내로부터 유혹을 당한 것을 보면 인간은 창조 때부터 죄 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간의 죄 성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불완전성과 죄 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불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이란 의미는 곧 유혹이 왔을 때 넘어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뒤에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자신들의 불완전성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닐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불완전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일까? 최고의 학위를 갖지 못한 사람이 최고의 학위를 가진 사람 앞에 서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리라.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 앞에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부끄러운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완전성을 발견한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완전한 분 앞에서 수치감을 느꼈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려운 감정은 그 수치감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드는 감정이 아닐까?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완전을 향한 환상을 갖게 된다. 그 환상을 세상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꿈이라고 부르고 혹은 야망, 대망이라고 부른다. 혹은 이상이라는 말로 인간들은 미화를 하여 불완전함을 무마하려고 한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이 된다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를 점차로 깨달아가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깨달아간다는 의미는 곧 인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젊은 처녀 총각들이 애인을 사귀고 사랑을 하면서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인간의 사랑에 대한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기 전에 인간은 왜 자신의 불완전성을 알지 못하였을까?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읫 삶은 어떠하였기에 인간의 자신의 불완전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아마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수치감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신들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서로 수치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된다. 아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완전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받아들여줌을 통해서 어린아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서로를 사랑함을 통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고 있는 것처럼 불완전성이 메꾸어질 때 인간은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total acceptance(완전한 받아들임)을 통해서 인간의 부족함을 메꾸셨던 것이다.
 
부모의 안전한 보호 속에 살고 있던 자녀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그 자녀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자녀는 부모의 낯을 피하게 되고 숨으려 하게 된다. 부모가 나타나면 그/그녀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 두려움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감을 동시에 나타내주는 감정이다. 이미 자신이 수치감과 죄책감을 갖게 된 자녀는 그 부모의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그 부모의 집은 그러한 수치감과 죄책감이 자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는 자연히 그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데 자녀의 집을 떠남이 곧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며 거꾸로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행위를 쉽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살인의 행위를 통해서 발견한 살인자라는 존재는 살인의 행위를 더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모습이 가인으로부터 시작한 살인자의 모습이 라멕에게서 엄청나게 커지는 행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에 처음 할 때가 어렵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한 번 하게 되면 다음은 쉬우며 계속해서 더하는 경향성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경향성은 인간의 불완전성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행위를 저지른 자녀에 대해서 부모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단속을 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단속은 곧 구약의 율법이며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일단 일어난 행위에 대해서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용서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용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 죄책감은 해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서 오는 수치감은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수치감은 은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 은혜란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것을 의미하며 전적인 받아들임은 수치감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수치감을 전적으로 하나님은 받아들인 것이다. 불완전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수치감은 전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해서 해결되며 이는 곧 은혜를 통해서 해결이 된다.
 
하나님이 구약에 율법을 주었을 때는 인간이 존재의 수치감을 맛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율법을 존재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마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의 전적인 받아들임을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율법에 의한 구원은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위를 통해서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어리석음을 바로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통한 전적인 받아들임은 존재에 대한 받아들임을 의미하며 예수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의 수치감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결코 율법을 폐하러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일은 이해할 수 있다.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수치감은 극복될 수 없으며 오히려 행동은 자신들이 수치감을 더욱 깊숙이 감추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죄 성을 가진 인간, 불완전성을 가진 인간, 이미 아담과 하와의 죄된 행위를 통해서 갖게 된 인간의 수치감은 결코 율법이라는 행위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구약의 십계명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들이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였음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이미 알게 된 인간의 수치스러운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셨다.
 
인간의 죄 성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될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처럼 인간이 처음 어머니의 배속에서 완전한 연합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태아와 어머니의 완전한 연합은 에덴동산에서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해를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다. 태아가 어머니 배속에서 탄생되는 순간이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경험으로 일치시켜 보면 어떨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많은 공포심, 두려움을 경험했으리라 상상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마치 밀림에 떨어진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인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는 어려움과 부담을 안게 되었다. 태아가 어머니의 배속에서 분리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곧 인간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일으키며 그 공포와 두려움은 곧 인간을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데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갖게 한다. 모든 인간은 PTSD에서 보이는 증상을 탄생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갖게 되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를 늘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경험했던 엄마와의 일체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엄마와의 일체감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경험을 하였던 하나님과의 일체감은 아닐까? 엄마와 일체감을 경험한 인간은 탄생 후에도 그 일체감을 늘 원하면서 사는 존재일 것이다. 완전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완벽을 향한 인간의 욕구, 이상을 향한 인간의 생각 등은 경험적 측면에서 보면 엄마와의 일체감 속에서 경험으로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살게 된다. 엄마와의 일체감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으로서 영원을 향한 그리움과 하나님을 갖는 생각 혹은 욕구의 경험이 된다.
 
3.6.2 Total Depravity or Reason Theory
일체감을 인간이 엄마의 배속에서 경험할 때 인간은 사랑과 따뜻함, 안전한 느낌, 타인을 향한 그리움 등을 경험하며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의 형상을 재생산하게 된다. 인간은 엄마와의 일체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 속에 경험적으로 간직하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 또한 인간의 죄성과 같이 경험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이된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어디엔가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소인을 통해서 엄마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전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의 소인과 경험적으로는 엄마와의 완전한 일체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세대를 통해서 전이되게 된다.
 
3.6.3 Definition of sin
인간의 죄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필자는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다. 죄성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정의를 할 수 있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간은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마음은 힘을 향한 욕구와 선해지려는 욕구로 나누어서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선해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힘을 향한 인간의 욕구와 밀접한 방식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타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서 선해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도덕이라는 보기 좋은 방패를 가지고 있어서 쉽게 사람들이 인지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죄성이다. 내가 선하다라는 말은 이미 나 아닌 누군가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아미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곧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죄성의 표현이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 또한 선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힘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통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타인을 통제하여서 자신의 우월감을 충족하려는 인간의 마음의 표현이다. 집단상담의 단계를 보면 처음 단계에서는 집단 원들이 서로 인정하고 칭찬을 하여서 어느 정도 친한 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심한 갈등과 비난이 생기게 된다. 갈등은 곧 힘을 통해서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의 욕구로서 이러한 욕구로 인해서 집단 원들은 우위를 점하기 위한 투쟁과 전쟁에 들어가게 된다. 젊은 두 남녀가 서로 데이트를 할 때에는 서로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로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어서 가깝고 자유롭게 되면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은 엄청난 갈등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때 갈등은 서로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한 Power Struggle이다. 서로 힘을 통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힘에 대한 욕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내와 남편의 마음 속에 상처를 만들게 된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 라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라는 말로 해석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상태가 너무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곧 자신에 대한 창피감과 수치감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창피감과 수치심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곧 자신이 더 능력있고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낳게 되었다. 수치심과 창피감은 능력있고 착하다 라는 자기인식을 하고 있는 한 맛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감정이다. 능력이 없고 착하지 않다는 인식은 곧바로 자신에게 수치와 창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또다시 힘과 선함을 추구하는 수레바퀴에 빠져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불가능의 노력을 하고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은 자신이 부족함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신이 무능하며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수치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수치심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즉 하나님처럼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나는 선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시인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 자신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즉 다른 인간들과 비교를 해서 비교우위를 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세우는 일을 할 때만 이러한 인간이 되려는 노력은 가능하다. 다른 인간들과 내 자신을 비교하는 일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면서 자기가 나이가 더 많고 힘이 더 세다 하고 비교하는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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