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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신원하 교수

자살,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다음은 신원하 교수의 글이다 
자살은 과연? 


‘KOL, 고신의 소리’ - 자살, 교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기자명 고신뉴스 KNC   입력 2023.10.26 17:03  조회수 280 
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삶

1. 기독교세계관의 기초   2. 기독시민의 정치적 책임  3. 가상화폐와 주식투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4. 2030세대의 일상생활과 워라벨(일과 휴식)      5. 주일성수에 관하여   6. 십일조에 관하여     7. 기독교와 문화    8. 기독교적 결혼식   9. 기독교적 장례식    10. AI와 ChatGPT시대의 기독교적 반응   11. 그리스도인의 취미생활 어디까지 가능한가?    12. 기독교와 음주 주초문제   13. 연애와 동거에 관하여   14. 출산과 저출산 문제  15. 자살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6. 노화와 죽음에 관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2022년 현재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를 가리키는 비율인 자살률은 25.2명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 자살한 사망자의 수는 12,906명이다.

매일 35명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정점을 찍었던 2010년도 하루 42.6명이 자살한 해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셈이지만 여전히 OECD국가들의 평균 자살률보다 2배나 높다. 자살은 한국인의 사망 원인 가운데 순위가 5위이지만, 10대부터 30대까지는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40대에서 50대에서는 2위이다.

교회도 성도도 자살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살 사건은 교회에서도 발생해 왔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교회는 오랫동안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쉬쉬해왔고 장례를 치러주지 않았다.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교회도 유가족도 큰 충격을 받고 혼란을 겪게 된다.

목회자나 중직자가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자살에 대해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교회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가르쳐 왔는지를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자살 사건이 발생해도 목회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해 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자살 사건과 인물

성경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 다섯 명이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그 첫째 인물은 아비멜렉 왕이다(삿 9:52-54). 그는 사사 기드온의 첩에서 난 아들로  이복 형제들인 왕자 70명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에 대항하여 봉기한 무리들과 전투하던 과정에서 한 여자가 망대 위에서 내려 던진 맷돌에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스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부하 병사에게 자기를 죽여줄 것을 명령했고, 병사는 그 명령대로 그를 칼로 죽였다.

아비멜렉은 자기 뜻대로 타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끊은 일종의 조력 자살을 한 셈이다.

둘째 인물은 사울 왕이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전투 가운데 치명상을 입게 되자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었다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수하 병사에게 자신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 병사가 거부하자, 곧장 사울은 자기 칼에 엎드러져 자기 목숨을 끊었다(삼상 31:1-6).

셋째 인물은 하히도벨이다. 그는 다윗 왕의 지략가였지만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고 다윗이 급히 도주하자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가담했다. 어느 날 그는 압살롬에게 다윗을 공격할 계략을 제시했는데, 압살롬이 그것을 기각하고 후새가 제시한 책략을 받아들이자 고향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삼하 17:23).

넷째 인물은 북 이스라엘 왕 엘라의 신하였던 시므리이다. 그는 군사들이 전쟁에 나간 틈을 타서 그는 궁중에 남아있다가 엘라 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군사들이 시므리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 장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고, 시므리를 죽이기 위해 왕궁으로 진격했다. 시므리는 이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려 왕궁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왕상 18:15-18절).

다섯째 인물은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를 은 30에 유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고  자책에 견디지 못하여, 목매어 죽었다(마 27:3-5). 

자살 본문을 통한 유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비록 이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자살했지만 이들의 자살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고 분석할 수 있다. 이들의 죽음이 대체로 반역, 배신, 탐욕 심판, 수치 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 역대상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 그가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전쟁에서 그를 죽이셨다고 기록하면서 그의 죽음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설명하고 있다(대상 10:13-14).

아비멜렉, 아히도벨, 시므리 그리고 가룟 유다의 자살은 탐욕, 배신 그리고 살인과 수치와 같은 성격들이 뒤범벅되어 있다. 이처럼 성경에 묘사된 자살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하다가 상황이 나빠지고, 수모를 당하거나 심판을 받게 되자, 절망하고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자살 사건에 관련된 기록들은 보면 자살이 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자살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 행위인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에 관련된 답을 줄 수 있는 연관된 성경 말씀을 찾아 분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살펴보면 자살이라는 특정한 죽음의 방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해 놓고 있지 않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이유가 하나님의 그렇게 죽도록 심판했기 때문이라든지, 또 그들이 자살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와 같은 진술을 유추하여 주장할만한 어떤 언급이나 암시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진술이나 주장은 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구원에 관련된 교회의 교리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도출해야 한다. 

 

십계명의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출 20:3)

그러면 자살 행위의 성격과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0장 3절을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소위 십계명의 제6계명이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중에 여섯 번째로 나오는 명령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계명을 ‘타인의 생명’을 살해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은 동사만 있지 특정한 대상을 목적어로 두고 있지 않은 계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제10계명의 형식과 구조를 비교해 보면 잘 파악할 수 있다.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이나 소유나 가축이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탐욕의 대상을 분명하게 명시하여 명령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6계명은 단지 살인하지 말 것을 명령할 뿐이다. 이것은 제6계명은 타인의 생명이든 자기의 생명이든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삼는 포괄적 살인 금지 명령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웃의 생명과 아울러 본인의 생명도 파괴하지 말 것을 이 6계명을 통해 명령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가 칼빈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자살을 포함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6계명이 금한 살인에는 ‘자기 살인’에 해당하는 자살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창 9:6) 

자살의 성격을 유추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은 창세기 9장 6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 훨씬 전에 이미 노아를 통해 홍수 이후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살인을 금하는 명령을 이와 같이 주셨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창 9:6a).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여기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죄는 일반 죄와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그런 성격의 죄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정점이다. 이처럼 존엄한 존재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살인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반드시 그 피를 흘리게 할 것을, 즉 사형으로 처벌할 것을 노아에게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9:6). 그렇다면 본인이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죽이는 자살 행위도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살의 신학적 함의    

자살이 기독교 신앙에서 심각한 죄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역행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첫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인류에게 왔고 사람은 사람의 권세 아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사망을 “원수”라고 말했다(고전 15: 25-6).

그런데 사망의 권세 아래 살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던 그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은 어떤 면에서 예수의 사역을 역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가 싸우고 이겨야 할 원수인 사망과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살의 기독교윤리적 함의 

성도로 자살한다는 것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 지니는 기독교 윤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 세상에 온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보내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받아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나 살게 된 존재일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트 교리문답은 1문답에서 선명히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성도가 의로운 삶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빌 1:11; 엡 1:12-14). 이에 더하여 바울은 성도들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으로서 오직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성도들에게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이런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책임을 유기하는 일이다. 물론 자신이 처한 삶이 너무나 힘에 겹고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는 듯한 극한 상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변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그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은 인식해야 한다.

이 점에서 바울의 생애는 깊은 시사점을 준다. 바울은 사역할 때 육신의 가시로 인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히는 것이 자신에게 더 좋다고 말한 바 있다. 바울이 얼마나 고통을 심하게 받았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렇지만 바울은 자기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성도들을 위해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빌 1:21-24). 바울은 육신의 가시로부터 받는 고통이 무겁고 극심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즉 이방인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중하기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며 그 삶을 살아간 것이다. 

어떤 큰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십자가의 복음 사역은 모두 생명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생명을 죽이고 사망을 택하고 그것에 굴복하는 자살행위를 중대한 죄로 여기고 엄중히 금지해 왔다. 바른 신학 전통을 지닌 교회들은 이 점을 분명히 가르쳐 왔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의문을 품고 제기하는, 이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자살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살하면 구원받지 못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길게 다룰 수 없는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여 아주 간단히 그리고 쉽게 답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믿고 고백하는 신자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이기 때문이지 자살했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을 받는 자는 그가 믿는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짓는 그 어떤 큰 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7 문답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는 죽을 때 그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친다.

믿는 신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전적으로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신자의 구원 문제를 자살 사건으로 환원하여 단정해서는 안되고 할 수도 없다.

구원의 문제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선하신 주권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예방 사역: 관심과 돌봄

성경이 자살을 죄로 규정하기에 교회는 자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금해 왔지만, 성도들은 자살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상태가 너무나 절망적이고 헤쳐나갈 희망이 보이지 않다고 느끼게 되면, 성도들도 낙망하여 삶의 의욕을 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붙잡아야 한다. 

교회는 주위에 이런 상태에서 자살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이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갖가지 실패와 좌절로 자포자기 상태에 놓여 있는 자들이 있다면  교회와 성도들은 그들을 찾아가 대화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으며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사랑의 온기는 그들에게 치유와 생명의 기운으로 작용하는 큰 힘이 된다. 이런 손길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이 아직도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교회는 이런 사역을 통해 자살을 예방하고 이 사회에 생명을 되살리는 운동을 전개해 가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375


 






정태홍목사의 유튜브채널 https://www.youtube.com/user/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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