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위험한 생각들
기자명 박광서 입력 2025.02.09 07:59 수정 2025.02.09 08:15 댓글 0
박광서 목사(큰사랑교회 담임)
교회 우편함에 꽂혀 있는 우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뜯어보니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협조해 달라는 신학교에서 보낸 공문이다. 10년 전부터 신학교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지원자가 현저하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존폐의 위기를 느낄 정도다. 앞으로 문을 닫는 교회와 신학교를 보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요즘 중, 고 S.F.C 겨울수련회 참석 협조 요청을 받는다. 필자가 소속된 노회도 인근 노회와 연합하여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석 예정자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니 스텝 포함 100명이란다. 필자가 중고생 때만 해도 1,000명 이상은 기본이었다. 인구감소의 시대라지만 너무도 안타깝다. 그렇다면 교회가 직면한 위기, 교회와 신학교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신학교 교사들의 선을 넘는 생각들
나라가 어수선하다. 나라가 좌와 우 둘로 나뉘었다. 이는 신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교수들의 생각도 둘로 나뉜 듯하다. 위험스러운 발언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위험수위를 한참 넘어서고 있다. 물론 모든 성경 교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리라. 그런데도 걱정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모 교수는 SNS에 모 야당 대표의 이름을 예수님에게 견주어 그를 ‘빛’이라 묘사했다. 이런 식이면 ‘하나님 까불지마’하며 신성모독한 어느 목사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신성모독적 발언은 동일하다. 또 다른 교수는 누구 찍지 않은 사람은 모두 손목을 잘라야 한다고 강의 중 비난해서 학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눈에는 국민 절반의 손목을 잘라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전체주의 의식의 냄새가 난다. 또 최근에는 보수우파를 싸잡아 ‘뇌가 썩은 이들’이라며 ‘Brain Rot’ 운운하는 이도 있다. 역으로 본인의 뇌가 썩은 것은 아닐까? 조금만 정치사상에 대해 공부하면 분별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런 좌파적 사고에 놀라게 되고 걱정스러울 뿐이다. 물론 저들 역시 필자 같은 기독교 보수를 그렇게 보겠지만 말이다.
좌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같이 정치 발언하지 말라며 핏대를 높인다. 그러나 정작 저들이 누구보다 정치적 발언을 많이 한다. 자신들의 비판은 괜찮고 반대는 불가하다면 그것이 내로남불 아닌가! 표현의 자유는 저들에게만 있고 반대 견해는 모두 뇌 썩음의 현상이라 몰아친다면 그게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성경 교사들의 사고구조가 이렇다면 신학교의 미래가 걱정된다.
필자는 대다수는 경건한 교사들이라 믿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과 달리 신학교의 좌경화가 우려할 수준이라면 과연 신학생 보내기 운동의 의미가 있을까? 그런 환경에서 자란 다음 세대 목회자들이 과연 건강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좌경화를 목적으로 하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교회들이 기도와 인력과 물질을 후원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어디에 있을까? 이런 우려가 현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미국과 유럽, 특히 미국에서 대안학교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이유는 벤 샤피로가 <세뇌>에서 대학교수의 90%가 문화막시즘에 물든 인간들이라 밝히듯이, 전 세계 상아탑의 좌경화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TV 교양프로에 독일에서 68혁명을 열심히 학습한 좌파교수가 청소년들을 망가뜨리는 선동성 강의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미래가 걱정된다. TV에 나오면 신뢰할 만한 진리의 전도자라는 것인가? 작금의 신학교 성경교사들의 선을 넘는 사고의 수위는 심히 우려되며, 주의 깊은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다.
성경적 공의를 드러내야 할 목회자들
신학교 성경 교사의 좌경화도 문제지만, 교회 지도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필자는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했던 야당의 모 의원이 출석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예배 중 그를 한껏 높이는 동영상 설교를 듣고 기겁을 했다. 좌파적 설교는 차치하고 그런 이를 교회의 중직자로 세웠다는 사실도 기가 찼다. 하긴 군산의 모 교회 목양실에 예수 사진이나 성구가 아닌, 시진핑, 마르크스, 문재인의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다는 평신도의 호소는, 현재 대한민국이 좌파들이 활동하기 좋은 세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교인들의 모순적 행동도 이 시대의 아이러니다. 강단에서 조금만 보수적 정치 발언을 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하지 말라 겁박하는 이들이, 정작 좌파 목사의 좌파적 설교에는 “은혜받았다. 이 정권은 빨리 무너져야 한다”며 맞장구치며 더욱 정치 이야기를 하라는 식으로 재촉하는 것 역시 기이한 현상이다.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 하지말라.” 어떻게 생각하나? 문제는 성경 곳곳이 정치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구약만 해도 정치적 사건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신자는 영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뿐이다. 정치적 행위 없는 인간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목회자의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대해 자연인보다 더 깊이 알아야 하며, 세속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원리를 붙잡아야 한다. 틀린 것은 틀린 것이며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2가지 중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1) 대한민국의 국부가 누구냐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승만을 국부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김일성을 국부로 여기려는 친중, 친북 인민민주주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승자가 되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 (2) 도덕과 윤리, 그리고 성화에 대한 분별력이다. 혹자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데 교인들이 왜 변하지 않느냐며 한탄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도덕과 윤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잠시 반짝은 가능하겠지만 하나님 없는 윤리나 도덕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인간의 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해야 변하나? 사람이 변하는 것은 성령의 거듭남의 은혜 체험 이후 성령의 강권적 변화의 역사에 의해 변해간다. 변화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오, 죄인은 십자가에서 매일 죽는 만큼, 성령 안에서 살아나는 만큼 변해간다. 성화는 도덕과 윤리 같은 단순한 인간의 의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만일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윤리와 도덕적 갱신 운동은 또 다른 죄인의 자기 의로 자리 잡아 기이한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요 전체주의 사상이다. 그래서 윤리 운동하는 사람 중에 친북 친중주의 죄인들이 많은 것이다. 만일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죄인은 언제나 제자리걸음만 하는 잔인한 괴물이 될 뿐이다.